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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56화 (56/300)

#   56-희망을 위한 찬가 - 방법은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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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쨍쨍하고 구름도 몽실몽실 이뻤다. 누구라도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는 아깝다고 생각할만한 날씨다. 이런 날 시간표에 체육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날씨도 무상하게 성천 고등학교의 운동장 스탠드 일단의 그늘진 곳에서는 남성제군들이 앉아 있었다.

“...좋구나.”

남성 제군 중 한 명이 낮게 중얼거렸다. 민성이다.

“...그러게.”

민성의 옆에 있던 여우가 그 말을 받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여우 옆에 늘어선 늑대와 고릴라도 시선에 별반 차이는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운동장의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서는 여자들 여럿이 모여 피구를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특히 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끝을 묶어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한 긴 흑발의 생머리라던가, 큰 키라던가, 단정한 얼굴이라던가- 외형적인 면뿐만 아니라, 좌중을 압도하는 실력을 선보이는 것 까지 일동의 혼을 빼놓고 있었다. 그녀는 쿠로사카였다.

“...일본에서는 부루마던가 입고 저렇게 활약했겠지.”

아쉬움이 흘러넘쳐 한숨이 된 것 같은 어조로 민성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자극받아 무언가 상상이라도 해 본 듯, 민성 옆에 앉은 동물원 삼총사가 하아- 하는 긴 한숨을 토했다.

“...너희 같은 인종들을 우려해서 이제 그 동네서도 블루머를 체육복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 대한민국 욕 먹이지 말고 리비도가 넘치면 운동이나 해라. 죽치고 앉아 음습한 청춘을 구가하지 말고.”

민성과 일당들의 행태를 옆에서 접하다 못해, 옆에서 책이나 읽던 은결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켕기는 게 있었던지 동물원 삼총사는 읏, 하고 뒤로 빼는 모양을 취했지만, 민성은 되레 가슴을 당당히 펴며 말했다.

“흥!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으로서, 이성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지극히 건전한 거야! 그것은 자연의 인류에 대한 일종의 정언명령이라 할 수 있지! 그리고 너야 말로 이런 날씨에 밖에 나와 책이나 읽고, 그게 뭐냐!”

그 말을 듣고 은결은 장래 민성은 꽤 크게 될 인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보자니 지금이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시대’라는데, 그걸 받아들인다면 이 녀석만큼 시대적 코드와 딱 맞아떨어질 사람을 달리 발견하기 힘들 테니까. 하여간 그는 민성의 주장을 되게 까줄까 하다가, 그가 뒤에 한 말은 그리 틀린 것도 없다 싶어서 가볍게 웃어 보이는 선에서 그만두고 다시 책으로 시선은 돌렸다. 민성이 슬금슬금 접근하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뭐 읽냐? 책이 좀 바뀐 거 같은데.”

“아, 야생의 사고라고, 레비스트로스라는 학자가 쓴 책.”

은결은 책표지를 가볍게 민성에게 내 보이며 답했다. 그는 요즘 한창 진을 역산하며, 그 역산을 단순히 어떤 틀에 끼워맞춘 채 하나하나 해체하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격하시키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 말하자면 마음의 환기를 위해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모든 종류의 위대함은 도식화된 틀로서 사로잡을 수 없는 질적 특징을 품고 있기 마련이고, 은결이 지금 역산하고 있는 수행의 봉인 술식 역시 그 점에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틀에 구속되지 않은 통찰로 야생의 논리와 기호를 읽어 문명의 논리와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는 ‘야생의 사고’는 사고를 환기하기에 아주 좋은 책이었다.

“레비스트로스? 유명해?”

그 말을 듣고, 민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 인문학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으면 유명하고, 아니면 자기 동네 똥개보다 덜 유명한 거지 별거 있겠냐. 리비도가 넘치는 우리 민성군의 호기심을 끌기 적합하게 설명하자면, 근친금기의 연구를 통해 친족의 기본구조를 밝혀냄으로서 구조주의라는 지적조류를 개막한 문화인류학의 거인이다, 라고 설명하면 충분치 않을까 하는데. 그래서 그는 근친금기를 자연에서 문명으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문으로 보고 있지.”

“헹, 근친이랑 친족구조랑 무슨 상관이래. 근친은 거 뭐냐, 유전적으로 기형아가 많이 나와서 하면 안 되는 거잖아.”

구조주의야 뭔지 알바 아니었지만, 근친금기라는 섹시한 표현이 리비도 넘치는 민성을 낚았다. 그는 드물게 눈빛을 빛내며 은결에게 말했다. 거기 더해, 어느 사인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동물원 삼총사가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음- 그것도 그렇지. 타이완의 조혼 풍습에 대한 연구에서 30개월 이내에 접촉하게 되어 같이 지낸 이성간은 일종의 각인이 이루어져 혈연관계가 없더라도 이성으로 인식하기가 극히 어려워진다는 결론이 나온 점이나, 식물, 동물의 관계에서도 사실상 근친금기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회적 관계를 강조하는 근친연구는 좀 부족하다 싶지. 그래도 한 사태의 방향성을 한 가지로만 인식하면 안 돼.”

은결은 “이러한 연구에 대한 반론이 있기도 하고 말야.”라 말하고는 다시 논지를 이었다.

“근친금기라는 사항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구조화 되어 있는가를 파악한다는 측면에서라도 그런 연구는 매우 중요한 거야. 강력한 근친금기가 없는 사회는 없거든. 가령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구조를 연구함으로서 다양한 사회의 모습이 이면에 감추고 있는 구조적 통일성을 읽어냈고, 그로서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개념을 보편화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 이 ‘야생의 사고’는 그 점에 대한 기념비적 대작이고. 덕분에 문화의 차이에서 우열을 찾으려던 모든 근대적 시도는 종언을 고했어.”

“헤에, 그럼 좋은 책이네.”

은결의 설명을 듣고 있던 여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한 듯이 말했다. 그는 특히 ‘문화의 차이에서 우열을 찾으려던 모든 근대적 시도는 종언을 고했다’ 라는 은결의 말이 무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응. 하지만- 나는 이 책이 굉장히, 굉장히, 슬픈 책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강조해서 말을 이어가는 은결의 목소리가 비감에 젖었다.

“왜?”

고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하긴 해도 문화의 상대성이란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공부했고, 실천적인 영역에서야 어떠하든, 그것이 옳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 누구보다 그런 걸 잘 알고 있을 은결이 ‘슬프다’고 하니 요상할 수밖에.

“문화에 문명들 사이에 선명한 질적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이제 우리에게 ‘진보’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선언이기도 하지 않겠어? 질적 우열이 없다면 ‘개선’이란 것도 없는 거니까... 그건, 어떻게 보면 못 견디게 쓸쓸하고 아픈 이야기일 수도 있는 거야. 더 이상 위대한 꿈을 꿀 수 없을 지도 모르니까-”

이 비루먹은 쓰레기 같은 세상에 대한 불멸성의 선고일지도 모르니까- 은결은 속으로 그런 말을 더했다. 은결의 이야기를 듣던 일동은 그의 분위기에 압도당했음인지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으음.”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그때 은결이 앉아있는 곳의 그늘이 짙어지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나타타치, 나니시데루노?”

아침 햇살을 싱그러이 반사하는 풀잎 위의 이슬 같은 미소를 생긋, 선보이면서 일어를 꺼낸 소녀는 물론 쿠로사카였다. 막 피구 시합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녀의 미소 앞에 은결과 고릴라를 제외한 일동은 그대로 녹아났다. 민성이 은결의 옆구리를 툭툭치며 어서 해석하란 뜻을 전했다. 은결은 뚱한 표정으로 민성에게 말했다.

“니들 뭐하고 있냐는데.”

“여기 앉아서 너를 보고 있었지. 피구 시합 때 굉장히 멋지던걸.”

은결은 치솟는 닭살을 느꼈다. 정말이지 난 놈이다. 쿠로사카는 기쁜듯 후후 웃으며 “아리가토.”(고마워.)하고 응답했다. 은결은 그녀의 대답을 전하며, 이쪽도 내숭떠는 거 생각하면, 두 사람이 오십보백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어 그녀는 지나가는 듯한 눈길로 은결을 바라보다가, 그가 들고 있는 책을 알아보곤 확인 차 되물었다.

“레비스트로스?”

“그래.”

“흐응.”

그녀는 알만하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그리고 일동에게서 손을 흔들어 보이며 멀어졌다. 새초롬한 몸동작이 또 두 사람 빼고는 다 녹였다. 은결이야 쿠로사카의 정체를 아니 요조숙녀인척 하면 소름밖에 돋는 게 없었고, 고릴라는 지조있는 사람이다.

한데 그녀가 멀어지며 일행을 향해 무어라 했었다. 물론 일어라서 은결을 제외한 이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중간에 ‘은결’이란 이름이 들어있던 것은 알아들었다. 다만 그 외에는 암흑의 세계였다. 민성이 불안을 느끼며 은결의 옆구리를 쿡쿡 쑤셨다.

“야, 뭐래?”

“아, 별거 아냐. 그냥, 그렇게 음습한 청춘으로 있지 말고 운동도 좀 하래.”

은결이 엉거주춤 답했다. 고릴라를 제외한 세 사람이 버럭 화내며 그를 압박했다.

“이 자식이! 네 이름이 언급된 것도 못 알아먹을 만큼 우리가 병신인줄 아냐!”

“그러게!”

“얼른!”

전문 해석을 요구하는 일당의 압박에 이기지 못한 은결은 책을 들고 벌떡 일어나며, 역시 책은 혼자 읽어야한다 여기며 그들에게서 달아났다.

“에익! 몰라, 이 자식들아! 하여간 나가 놀래!”

“억?! 도망간다! 잡아라!”

고릴라를 제외한 일당들이 펄펄 뛰며 그의 뒤를 쫒았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친구들에게 쫒기며, 은결은 쿠로사카를 원망했다. 그녀가 떠나가며 남긴 말의 전문은, “쉬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날씨도 좋은데 나와서 몸도 좀 움직이는 게 어때요? 그렇지 않으면 옆에 있는 은결처럼 될지도 몰라요.”였다.

은결은 자기 입으로 자기를 욕하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 결코 뒤에서 그를 쫒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달콤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달리다보니 쿠로사카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친구들을 뒤에 달고 열심히 달리는 은결을 모양새를 보고 씨익 냉소적으로 웃었다. 즐거운 모양이다.

‘괜히 시비야...’

그는 한숨을 쉬며 뒤에서 쫒아오는 바보 일당들이 저 표정을 보았어야 한다고 여겼다.

*제가 온라인 게임은 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물건이다 보니, 끝이 있는 쪽을 좋아하죠. 여차하면 에딧도 되고 말입니다.

*카미의 힘을 흡수했을 당시 은결의 힘은 키리야미를 해방한 쿠로사카의 세 배는 간단히 뛰어 넘었습니다. 괜히 은결의 몸을 가지고 푸른 이빨이 도박을 한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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