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희망을 위한 찬가 - 현자의 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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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다. 태양은 높고, 하늘은 푸르고, 시내는 사람으로 붐볐다. 그 혼잡한 시내의 길을 걸으며 은결은 사람의 군파(群波)는 의미를 상실하게 한다, 고 잠깐 생각해 봤다. 눈앞의 무수한 걸음걸음이 모두 자신의 의지와 삶을 가진 사람의 움직이라 생각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던 탓이다.
자신의 눈앞에 비치는 저 무의미해 보이는 걸음들에서, 실은 그 걸음을 걷는 개개인들이 다른 어떤 것과도 대치되거나 병치될 수 없는 고유한 특수성을 지니고, 그래서 그 하나하나가 모두 이 세상에 대한 해석의 한 주체들이고, 개개인의 세계와 우주를 지니는 해석자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어쩐지 꿈속에서 들려오는 먼 환상의 한 장면 같이 느껴졌다. 사람의 인식이 가 닿기에, 그곳은 너무나 먼, 아갈타의 한 환영.
“무슨 생각해?”
은결의 옆에서 걷고 있던 미래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은결은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상념의 여운이 담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사람이 많구나- 하고.”
“흐응- 나는 또 왕따틱한 생각은 하고 있지 않나 했는데.”
미래는 눈을 가늘게 하며 웃는 낮으로 새초롬하게 말했다.
“왕따틱이라니?”
“남들 안하는 생각하면 왕따틱이지 뭐야. 오빠 그런 거 잘 하잖아.”
은결의 마음 한 구석이 뜨끔, 했다. 미래는 득의만만한 낮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시당초 시내 와서 사람이 많구나, 하고 감탄하는 시점에서 틀려먹은 거라니까. 사람이 많은 게 자연스럽지가 않다니, 얼마나 세상과 오빠의 교류가 협소한지를 증명하는 것과 같지.”
미래가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은결은 문화적 다양성의 인정과 이데아론적 세계관의 극복이 어떤 방식으로 연관된 위대한 인류 인식의 도약이며, 미래의 발언이 그 도약을 어떤 방식으로 짓밟고 있는 건지- 장대한 설명을 전개할까 하다가, 한결 더 왕따틱하다는 소리 들을까봐 닥치기로 했다. 현명한 선택이다.
“시, 시끄러.”
“후훗, 그러니까 오빠는 이렇게 가끔 끌고 나와주는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미래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은결은 옆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꽤 유감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고1이다. 미래의 미래는 밝은 편이다. 은결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넘겼다.
“아-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래야지. 에헴.”
그리고 미래는 은결의 팔을 잡았다. 주변을 지나가던 남자 들 중 몇몇이 부러운듯 은결 쪽을 쳐다봤다. 미래의 외모를 생각할 때, 신기할 건 없는 반응이다.
“그런데 오늘 아빠하고 할아버지 집에 안 계신다던데, 무슨 일이야?”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 진경인가 하는 사람하고 만나기로 되어 있을거야.”
“진경? 아, 그 오빠. 꽤 멋지던데. 내 취향이야.”
미래가 눈을 크게 뜨며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몇 번 집을 들락이는 사이 미래도 진경의 얼굴을 익히게 됐다. 그는 객관적으로 보아 깔끔한 미남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첫 만남을 이룬 은결과 달리 미래의 그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은결은 조소를 섞어 그녀에게 한 마디를 건냈다.
“네가 괜히 미워하는 세연양의 오빠이기도 하지.”
미래의 표정이 웃- 하고 찌푸려졌다.
“벼, 별로 미워한 적은 없어. 별것도 아닌 걸로 괜히 친한 척 하면 좋은 인상은 받을 수 없잖아. 그 정도일 뿐이야.”
은결은 그가 세연을 구해준 인연을 생각할 때 그녀가 은결에게 보이는 호의는 결코 ‘괜히’로 해석될 수 없는 정당성을 품고 있고, 그것을 무시할 때 도리어 그녀는 비판받아 올바르다는 점을 지적할까 하다가, 오늘 나온 목적이 미래의 화를 풀어주기 위한 점이었음을 생각하고 그만뒀다.
“후, 어련하실까.”
그리고 대화는 맥이 끊어지지 않은 채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은결이 주로 듣고 대답하는 측이었고, 미래가 활발히 입을 열며 지속적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문득, 미래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탐색하듯이 은결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쿠로사칸가 하는 학생하고 친해?”
“아, 교환학생? 그렇게 까진 친하지 않은데. 왜?”
“아니, 그냥 친해 보인다는 얘기가 있길래 궁금해서.”
“친해 보인다면 친해 보이겠지만, 그렇진 않아. 그냥 일어를 좀 하니까 관광가이드 비슷하게 맡은 거고, 얘기도 자주 하게 된 것 뿐이야.”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죽을 뻔 했는데 아무리 은결이 호인이라도 쿠로사카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는 없다. 때문에 쿠로사카에 대해 말하는 은결의 말투가 비교적 차갑다. 미래는 그 점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기색이 담긴 어투로 말했다.
“흐응. 그렇구나.”
은결은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시계를 쳐다봤다. 예매한 영화의 시작 시간 까지 2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의 속도를 올리며 미래에게 성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간 어서 가자. 영화 시작하겠다.”
“응.”
미래는 발랄한 목소리로 답하며 은결과 보조를 맞춰 걸었다.
청광(淸光)이 고요를 노래하는 밤이다. 가끔씩, 가깝고 먼 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그 고요를 깨뜨리며 정적 너머의 생명을 소근 거렸다. 은결은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왔다. 사위는 무거운 어둠으로 텅 비어 있었다. 은결은 고개를 돌려 집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아무런 빛을 발하지 않는 창문은 어둡게 입을 다물고 있다.
미래는 지금 기분 좋게 자고 있다. 오늘 자기 전까지 쉬지 않고 활달하게 움직이고 이야기했던 것을 보아 꽤 기분 좋은 하루였던 모양이다. 팔자에 없어보이던 멜로 영화 따위를 보아야 했지만, 미래의 기분이 많이 풀린 것을 접하니 나름대로 보람은 있었다고, 은결은 생각했다. 되돌아보면 영화도 재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케익을 크림만 걷어내 먹은 것 같았다는 점 정도일까. 하여간 이제 나머지 일을 해야 할 차례다.
그는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는 걸음으로 작은 정원 길을 따라 집 뒤쪽을 향했다. 뒤쪽에는 따로 작은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창고였다. 은결은 창고의 양 모서리 쪽에서 대각선으로 길게 선을 긋고는 그 위에서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침묵하는 대지 위로 어울리지 않는 빛을 머금은 선이 복잡한 기호의 이합집산을 이루었다.
다 그린 다음 은결은 그 중앙에 손바닥을 내리찍었다. 진이 폭발하듯 긴 빛을 뿜어내었다. 다음 은결은 다른 세 모서리에도 모두 같은 작업을 했다. 네 모서리에 모두 진이 그려지고 발동하자 그 진의 빛들이 이어지며 마름모꼴로 창고를 감싸 안았다.
은결은 그제서야 창고 문손잡이에 손을 댔다. 문은 어렵지 않게 얼렸다. 처음부터, 문에는 아무런 마법적 처리도 되어 있지 않았다. 드륵, 소리를 내고 열린 창고 안에는 잡다한 것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은결은 창고 가운데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손바닥을 내려쳤다. 팡-! 소리가 나며 먼지가 풀풀 날았다. 은결은 그 먼지 가운데서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곧, 웅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진이 떠올랐다. 은결은 역산을 시작했다.
20분 이상 계속해서 웅얼거린 끝에, 은결은 천천히 그 진에서 손을 땠다. 동시에 진의 빛이 느릿하게 스러졌다. 다 스러지고 나니, 창고 바닥에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작은 손잡이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은결은 그것을 잡고 뒤로 열어 재꼈다. 안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그는 그 나무계단을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무미건조한 냄새가 났다. 내부는 위쪽 창고와 마찬가지로 무질서하게 물건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곳에 보관된 것들은 마법적인 것들이고, 위쪽은 정말 일반적인 것들이라는 점 정도다.
넓지 않은 공간의 왼쪽 윗편에, 과거 은결이 사용했던 격리탱크도 보였다. 격리 탱크 내부에서의 체험이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기에 별로 그립진 않았다. 은결은 서둘러 잡동사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연금을 위한 각종 기구를 비롯해 성과물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묵은 먼지가 주변의 공기와 은결의 손을 금세 더럽혔다. 그는 더렵혀진 공기를 폐로 운반하면서, 과거 아버지가 들이마셨다던 최루탄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하게 여겼다.
“여기 어디... 있을텐데...”
한참을 뒤지며 은결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이 창고의 경비체계 전부를 무력화 시키는 작업은 직계인 은결이라도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길어봐야 네다섯 시간 정도다. 이곳의 보안 진은 전성기의 수행이 직접 시술했다. 들키게 될 경우의 변명거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건 최후의 방도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아버지가 자신을 실망의 눈길로 쳐다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 있지...”
물건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차피 가지고 빠져 나가려고 한 것도 아니다. 지금 그것을 손에 쥐어봐야 자신에게 어떻게 할 도리는 없다. 은결의 손길이 한층 빨라졌다. 한순간,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기 있다!”
은결은 기쁜 기색으로 네모난 상자를 꺼내들었다. 오래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직육면체의 상자였다. 희미한 빛에 드러난 상자의 모습은, 그러나 이음매가 전혀 없었다. 상자가 아니라 철괴(鐵塊)같았다. 은결은 그것을 양 손으로 쥐었다. 무언가 웅얼거렸다. 그의 손으로 황망한 빛이 모여들었다. 폭발할 것 같은 빛이 이어졌다.
그리고 빛이 저물었다. 남겨진 공간에서, 30개? 40개? 몇 십 개인지 세기도 힘든 광대한 진이 가득 펼쳐지며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가장 복잡한 시계의 내부 운동을 레이저로 표현하면 이와 흡사하지 않을까 싶었다. 은결은 그 진을 바라보며 계속 무언가 웅얼웅얼 거렸다.
십분. 이십분. 한 시간, 두 시간- 마침내 푸른 어스름이 태양을 예고하는 시각이 됐다. 그제서야 은결은 쥐고 있던 철괴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림을 멈췄다.
“후, 겨우... 다 외웠군.”
이마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린 은결은 그 철괴를 아무렇게나 창고 한 구석에 던져 넣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멀지 않은 태양을 예비하는 가녀린 빛으로 세상은 충만했다. 은결은 겨우 자취를 남기는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다 조용한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갔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피곤했다. 조금 쉬고 싶었다.
*텍스트로 장난치고 있다고 말했다고 뭘 장난치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다면 그건 장난의 기교가 너무 낮은 거겠죠. 추리물에서 트릭이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트릭을 독자가 이해하는 건 종결부인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지난 화에 해체주의를 언급하신 독자분들이 계시는데, ‘문화적 다양성의 인정과 이데아론적 세계관의 극복’ 이라는 문장이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겠죠. 별로 데리다를 의식한 문장은 아닙니다만, 일정한 목적의식 아래 이루어진 문장이긴 합니다. 텍스트로 장난을 친다는 건 이런 것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경 안 쓰고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상징기호의 해석은 퍼스의 세미오시스 이론과 상당한 연관을 가질 것입니다. 소쉬르의 경우는 이 글에서 말하는 상징기호는 상징하고자 하는 것들과 낮은 수준의 연관관계를 지니기 때문에 오롯하게 ‘차이’를 통해 기표와 기의의 연결이 보장된다고 보는 그의 언어철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작품 본 내용에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겠지만요. 장황한 설정을 글 속에 때려 박을 것도 아니고.
*제가 요즘 블루 하긴 한데, 은결 같은 블루보이는 아닙니다. 발랄하고 명랑한 청년이죠! 그러니 딥블루에서 일어나도록 성원을 합시다. 지난 화는 댓글도 별로 없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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