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희망을 위한 찬가 - 현자의 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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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사카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푸른 이빨에게 달려들려 했다. 살기가 형상화되어 외부로 맺힐 것 같은 기세였다. 은결이 서둘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おまえ…"
(너...)
“검을 거둬. 그렇지 않으면 항의 서한을 취소하기로 했던 걸 무효로 돌리겠어!”
은결이 엄중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쿠로사카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시 대답했다.
"勝手にして!"
(마음대로 해!)
그러나 은결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한층 거대하고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언 듯 살기와도 흡사한 느낌을 담은 감정을 담고 외쳤다.
“그리고, 너를 죽일 각오로 싸우겠어!”
그 말은 역시 쿠로사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전신을 움찔 떨어 보이더니 발검 하려던 자세를 풀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은결의 기세는 진짜였다. 이대로 걸음을 내뻗고, 검을 뽑으려 든다면 당장 그는 손을 써올 것이다. 결국 물러선 쿠로사카는 화난 어조로 은결을 향해 낮게 말했다.
"…後悔するぞ。"
(...후회하게 될 거야.)
“미래가 두려워 현재를 버린다면 후회할 것도 남지 않겠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하고는, 은결은 고개를 돌려 푸른 이빨에게 물었다.
“역시, 그때 그녀의 몸속에 들어간 건가?”
그는 자신이 푸른 이빨을 잡았을 당시의 정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한 손은 푸른 이빨
을 잡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세연의 배 위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푸른 이빨이 세연의 몸에 들어갔다면 아마도 그때일 것이다. 세연의 몸 거만하게 조종하며, 크- 웃어보인 푸른 이빨은 고개를 끄덕여 은결의 예상을 긍정했다.
“그래. 네 손에 잡혀 파괴되는 연기를 하며 이 계집의 몸속으로 들어갔지. 힘을 수용하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은 네 아비 덕분에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혼만을 수용한다면 이만큼 좋은 곳은 거의 없지.”
은결이 잠시 의아한 얼굴을 했다. 푸른 이빨의 말대로라면 세연의 놀라운 체질은 푸른 이빨과 무관했다는 말이다. 푸른 이빨이 관여했다고 해도 여러 의문이 남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하면 많은 의문이 해소된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또 겹쳐 그녀에게 있었단 말인가? 불길한 예감이 은결의 마음을 뒤덮었다.
“뭐 어느 쪽이든 네 몸에 비하면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이나 마찬가지다만.”
세연의 얼굴이 요염하게 젖었다. 푸른 이빨은 습한 눈동자로 은결을 바라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은결은 그 눈길을 불쾌한 표정으로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올 생각은?”
“네 몸을 주면 얼마든지 이런 허접 쓰레기 같은 고깃덩어리에서 나와 주지.”
“진지하게 답해. 정말 길이 없다면 세연 양을... 죽여서라도 널 막을 생각이니까.”
은결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러자 푸른 이빨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소녀가 거친 태도로 배를 껴안고 웃음을 터뜨리는 광경은 현실의 것이라 생각하기 힘든 기괴함에 물들어 있었다.
“낄낄낄- 죽여? 죽인다고? 그것 재밌겠군. 해보지? 이 소녀의 속에 들어간 나에겐 아무런 힘도 없으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 여자애를 죽이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럼 덩달아 나도 소멸될 수도 있을 테고. 안 그래? 오만한 위선자야.”
모멸적인 푸른 이빨의 태도에 은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필요하다면 세연을 죽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큭, 역시 그렇군. 너는 결코 네 위선을 떨쳐버릴 수 없어. 그것은 이미 네 본질의 한 모습이 되어 있을 지경이지. 네 머릿속에 들어가 본 나는 이미 알고 있지.”
“......”
은결은 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켜 분리될 수 없는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옳음과 그름, 긍정과 부정 사이의 격렬한 쟁투였다. 자신이 자신의 언어를 부정하고, 자신이 다시 자신의 언어를 부정했다. 외부에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말을 가질 수 없었다. 아무것도 확고한 자신의 기반 위에 서 있지 않았다. 흥미로운 듯 은결의 기색을 살피던 푸른 이빨은 이내 말을 이었다.
“좋아. 현실적인 제안을 하마. 나도 네 애비는 껄끄러우니 이 계집의 몸이 편하긴 해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 네가 내 힘을 몽땅 넘겨준다면 나도 떠나도록 하지. 그럼 너도 네 원래 힘을 회복할 테고, 서로 좋지 않아?”
“...그렇겐 할 수 없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지만 자기 외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었다. 타자(他者)는 자아보다 선명했다. 은결의 말은 단호했다.
세연의 얼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다. 푸른 이빨은 이내 가소롭다는 듯이 흥- 웃어 보이고는 은결에게 말했다.
“끅끅- 뻔뻔한 새끼. 그렇다면 그대로 살다 뒈지는 것도 좋겠지. 어차피 20년이면 그 힘은 너끈히 모을 수 있어. 너희 인간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내게 2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냐.”
“......”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거군. 나는 이만 들어가지. 그리고 이 계집의 몸에 묘한 작업을 하면 이 년을 죽여버릴테니 각오해. 특히 네 아비에게 내 위치를 알리면 그때 앞뒤 보지 않고 이 계집을 죽이고 떠날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
푸른 이빨은 일방적으로 선고하고 세연의 몸속으로 숨어들었다. 은결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말려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차피 오늘의 은결도 단지 세연에게 푸른 이빨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려 했을 뿐, 그 이상의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에?”
정신이 돌아온 세연이 놀란 표정을 했다. 기억의 결락이 있는 그녀로서는 갑자기 영상이 바뀐 느낌일 것이다. 은결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기를 돌리면서 잠깐 수면 상태에 들어갔을 뿐입니다. 걱정 마세요.”
“헤에- 몸이 좀 편해진다고는 느꼈는데, 그세 잠이 들었나보군요.”
세연은 몸을 휘돌던 기의 감촉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다 치면 왜 은결이 할 대가 아니라 일본 여자애가 기를 운행시킬 때 잠이 왔던 건지 좀 이상했지만, 그렇게 꼼꼼한 성격이 아닌 세연은 그러려니 하며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뭐- 애프터서비스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껏 팔찌를 넘겼는데 지난번에 그런 일도 있었고 해서.”
그렇다면, 저 일본 여자애는 괜히 왜? 라는 당연한 의문이 세연의 뇌리에 떠올랐지만, 굳이 중요한 문제일 것 같지 않았고, 꼬치꼬치 캐물어 은결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도 않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사람은 골목을 빠져나갔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오다니고, 자동차가 매연을 내뿜으며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소음과 활기가 물질처럼 뒤섞인 서울의 도로다. 그녀의 전신이 세계의 일상성이 회복됐음을 알았다. 몇 미터 되지 않는 길이었지만 느낌만으로는 세계의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결이 담백하게 세연을 향해 미소어린 말을 건내왔다.
“에-예...”
세연은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 말을 이으면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모양새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결은 방향을 틀어 세연에게서 멀어져 갔다. 일본 여자애도 또렷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허리에 매인 검의 흔들림이 선명한 걸음걸이와 어울리며, 서리가 끼기 시작하는 깊은 산속의 청수(淸水)를 생각나게 했다. 깊은 아쉬움을 담은 눈길로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연은 결국 포옥, 작은 숨을 내쉬곤 발향을 틀었다.
세연과 헤어져 조용히 걸음을 걷던 두 사람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쿠로사카였다.
"どするつもり?"
(어쩔 생각이지?)
은결은 답백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가만히 놔둘 생각이야. 너도 주변에 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줘. 세연양을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
"何を勝手な!"
(무슨 제멋대로인 말이지!)
그러나 쿠로사카는 반발했다. 그녀의 불평은 당연했다. 쿠로사카를 달래듯 은결은 말을 이었다.
“단순히 내 욕심인 건 아냐. 한 가지 생각해 둔 건 있어.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그러니까 부탁해.”
"それは?"
(그건?)
“현자의 돌.”
“......!”
담담한 은결의 한 마디에 쿠로사카는 얼어붙었다. 은결이 꺼낸 말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의 진공이 흐르는 사이, 은결은 그녀를 무시하고 처음과 같은 걸음걸이로 길을 걸었다. 주변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빛이 물러간 공허로 마가 몰려들 시간이다.
*후, 왠지 쓸쓸...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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