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희망을 위한 찬가 - 현자의 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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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은 주변을 휘 둘러봤다. 어제 이어 쿠로사카가 보이지 않은 것은 물론, 은결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기로 은결은 점심 식사를 끝내고 6교시를 끝낼 때 까지는 있었다. 하지만 7교시에 들어서서 보이지 않았다. 농땡이를 쳤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애매한 시간이다. 어제오늘 이가 안 좋다고 밥도 안 먹더니, 치과에 가기 위해 조퇴라도 한 모양이다. 선생님의 말이 들려왔다. 더워지는 날씨에 겹쳐, 수업은 한결 지루했다. 민성은 하품을 하며 자본의 노예가 되기 위한 매뉴얼을 꺼져가는 의식과 더불어 거절했다.
...덕분에 그날 반 청소에 괜히 노동력을 보태게 되긴 했지만.
서울시 울천동에 있는 미리내 여자 고등학교는 한길 제약이 출자해 만들어진 사립 고교다. 시설이 좋고, 진학률이 높기로 유명하다. 더해서, 다니는 여학생들의 수준이 총체적으로 높다. 주변 남학교에서는 선망의 대상이다. 한국의 교육체계가 좀 더 자유주의적이었다면 선명하게 계급분할의 한 문턱이 되었을 곳이다. 세연이 다니고 있는 학교이기도 했다.
7교시를 끝낸 다음 쉬는 시간이었다. 오늘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세연은 다음 시간 까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중간고사도 걱정했던 것 보다 점수가 잘나왔고, 앞으로 기말고사 전까지는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반 친구 한 명이 끼어들며 들뜬 얼굴로 말했다.
“얘, 저기 교문에 왠 남자애가 와 있대.”
“어머, 정말?”
“어디어디.”
세연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학생들은 금세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연이 고개를 돌리자 창가 쪽은 여러 학생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반이 평소보다 한결 들떠 있다 싶었더니 이런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들은 그 남자애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남자애의 점수가 몇 점이니 하는 문제까지, 광범위한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발랄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80점 이하로 점수를 주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을 보니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남자애가 꽤 괜찮은 모양이다.
하지만 번 전체가 들썩이는 건 아니었다. 열 명 중 서너명 정도? 그 외에는 별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평판이 좋은 여학교인 미리내 고등학교에서는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들도 그런 남학생들이 있어도 지나치지 않으면 별반 제재하지 않았다. 일부러 보고 싶은 마음까지는 생기지 않았지만, 조금 부럽기는 했다. 자기도 누가 저런 식으로 찾아와 준다면, 특히 그것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쁠 것 같다고 여겨졌다.
‘이를테면, 은결이라던가...’
그녀의 볼로 작게 홍조가 피었다. 은결이 퇴원한 토요일에 은결의 집에 들려본 이래 한 번도 은결을 보지 못했다. 전화도 안 했다.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결의 태도가 너무 담백해서, 뭐라 말을 붙이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정도였다.
‘후웅-’
세연은 한숨을 쉬며 상체를 책상위에 길게 누였다. 생각하니 괜히 우울했다. 사실 그녀는 은결과 접촉을 자주하면 자연히 그가 관심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아직 남자와 사겨본 적은 없지만, 자기 좋다는 남자들은 과거부터 쭉 있어왔다. 외모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괜히 적대적이긴 했지만 동생이 무척 예쁘던데, 그 탓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은 동생일 뿐이다. 은결은 애당초 이성에게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시선은 무언가 다른 것을 향하고 있었다. 잘 알 수 없지만 지나치게 나이답지 않은 담백함이라고, 세연은 느꼈다.
-딩동...
음악이 흘러나왔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 세연은 몸을 일으키며 8교시 수업 교과서를 꺼냈다. 창문을 바라보던 소녀들은, 쉬는 시간 끝날 때까지 그 남학생이 기다리는 여학생이 오지 않았다며, 왜 오지 않았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타진하며 여전히 흥미진진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들의 말을 무의미하게 들으며 세연은 오늘 수업할 페이지를 펼쳤다.
소란에 휩싸인 운동장을 가로질러 세연은 친구들과 함께 하교하고 있었다. 여고생다운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며 교문을 빠져나가려던 세연 일행을 한 소년이 막았다.
“저-”
“에-?” 세연은 당황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녀의 두 눈이 불현듯 커졌고, 그녀와 길을 함께 하던 친구 두명은 흥미진진한 기색을 보이며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랜만입니다.”
정중한 목소리로 소년은 세연에게 인사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어딘가 쑥스러운 주저함이 엇갈리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은결이었다.
“아, 예... 오랜만이네요.”
세연도 마주 인사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시간 남자애가 교문 앞에 있었다더니, 은결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잠깐만이면 됩니다.”
“그렇지만-”
-이라고 말하며 세연은 양 옆에 서 있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힐끔 눈길을 줬다. 그녀들을 놓아두고 혼자서 떨어져 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은결은 반가웠지만 세연으로선 주변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 세연의 주저하는 모양새를 보고, 오른 쪽에 있던 친구가 짐짓 시계를 보며 “아- 학원 가야지.” 라 능청을 떨며 세연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 치며 멀어져 갔다. 마찬가지로 왼쪽에 있던 친구도 세연의 등을 떠밀듯이 치고는 “오늘 선약이 있어서-”라 과장되게 말하고는 멀어져 갔다. 쓸데없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모습이었다. 아주 좋은 친구들이다.
“괜찮은... 모양이군요.”
세연의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은결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괜한 뻘줌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세연도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럼.”
그리고 은결은 세연의 손목을 잡고 큰 걸음으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세연은 끌리듯이 은결을 따라 황망히 걸었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의 사람이 많이 오다니지 않는 으슥한 골목길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골목은 한결 더해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먼 곳에서 개짓는 소리와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는 소리만이 적막을 방해하며 들려왔다. 무언가 이상한 공간이었다. 이 공간이 일상적이 아니라는 것은, 은결이 무언가 손을 썼다는 것은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죠?”
결국 은결이 자신을 찾은 용건이 그다지 핑크빛으로 채색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세연은 약간 실망을 뒤섞어 맥 빠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은결은 “조금 확인 할 것이 있어서요.” 라 간단히 답하곤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신비로운 감각이 그녀의 전신을 장악했다.
‘아-’
딱 알맞은 온도의 깨끗한 물속에 잠수해 있으면서, 산소걱정을 하지 않고 해면을 투과해 들어오는 태양빛의 이지러지는 모양새를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하면 이런 감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깊고도 넓고, 따스하고, 온화한 그런 느낌이었다. 몇 시간이고 이대로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온 전신에 충만했던 상서로운 감각이 썰물이 빠지듯 밀려나가며, 그녀의 전신 감각을 일상적인 것으로 되돌렸다. 세연은 깊은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탐탁지 않은 표정의 은결이 있었다.
“아, 뭔가 잘못 됐나요?”
“아니요. 세연 양과는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은결은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을 되돌리며 고개를 돌려 말했다.
“쿠로사카 부탁해.”
“에?”
세연은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은결의 옆에 못 보던 여자애가 있었다. 은결과 그렇게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자신이 모르는 사람을 그가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거 하나 없지만, 굉장히 미녀라는데서 위기감이 조금 느껴졌다. 여린 선이 단정하게 이어지며 굴강한 이미지를 이루어내는 소녀였다. 특히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이 특이하면서도 매우 잘 어울렸다.
"失礼。"
(실례.)
쿠로사카라 하더니 일본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세연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짤막하게 하고는 그녀의 오른손목을 잡아챘다. 세연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시금 신비한 힘이 그녀를 감쌌다. 은결의 힘에 비하면 훨씬 차갑고, 예리해서 몇 시간이고 계속 이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깊게 가라앉으며 차분함을 이끌어내 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때, 무언가 두근, 하고 박동 쳤다.
‘아......’
세연의 의식이 끊어졌다.
세연이 의식이 희미해짐을 느꼈을 때, 쿠로사카는 은결을 검색했을 때와 흡사한, 하지만 분명히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는 어떤 신적 힘의 존재를 느꼈다. 그녀의 뇌가, 피가, 세포가 그 모든 본능이, ‘이거다!’라고 외쳤다. 이런 선명한 확신의 감각을 그녀는 이제껏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는 것의, 돌을 하늘로 던지면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의 자명성은 이 명료한 확신의 감각 앞에서는 아무런 자명성도 지닐 수 없었다. 그녀가 미리 이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면 결코 은결에게서 푸른 이빨이 있다고 느끼는 착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쿠로사카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멈춰!”
은결이 외쳤다. 쿠로사카는 무시했다. 하지만 허리춤에서 검이 빼어지지 않았다. 이미 은결이 검 손잡이를 잡고 마법진을 일으켜 발검을 봉하고 있었다.
"放せ! この女を始末せねばどんでもない事になる!"
(놔! 이 여자를 죽이지 않으면 터무니 없는 일이 일어난다!)
“그녀는 대한협회 간사의 여동생인 동시에 협회 스폰서의 딸이야! 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構わない! 私は朴さんの息子であるお前を殺そうとした。今更ー"
(상관없어! 나는 수행의 아들인 너를 죽이려고 했어. 이제와서-)
쿠로사카가 날카롭게 말을 이어가는 도중, 세연이 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뒤로 넘기며, 요염한 목소리로, 하지만 저열한 태도로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아- 결국 저 재수 없는 계집 때문에 산통이 다 깨진 거군. 빨리 죽여버리는 건데, 쓸데없이 복수 따위에 취해버리느라 이런 지경에까지 와버렸군.”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아니, 바뀐 게 맞았다. 은결은 지금 세연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의 이름에 증오를 뒤섞어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푸른 이빨.”
“큭. 언젠가 눈치 채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빨랐군. 건방진 꼬맹이와 재수 없는 계집.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지극히 언밸런스한, 그러나 지극히 잘 어울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조화 가운데, 고고한 지배자의 표정을 한 세연-푸른 이빨-이 경멸의 눈동자로 두 사람을 깔아보며 말했다.
*머리도 되게 아프고 기분도 우울합니다. 머리가 아파서 우울한건지, 우울해서 머리가 아픈건지 모호하네요. 역시 머리가 아파서 우울한 거겠죠. 아, 지끈.
*얼마 뒤 컴퓨터를 바꿉니다. 바꾸게 되면 오블리비언이 하고 싶습니다. 하프 라이프2와 피어도 하고 싶고, 둠3와 퀘이크4, 히어로즈 마이트 앤 매직 5편과 로마 토탈 워도 하고 싶네요. 슈프림 커맨더 같은 게임도 무척 기대되고. 오랜만에 침식을 잊고 게임에 몰두할 수 있을 지도? 그럼 이 쓸데없는 울쩍함도 몽땅 날아가겠죠. 두근두근.
*하여간 즐겁게 즐기셨길 바라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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