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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40화 (40/300)

#   40-희망을 위한 찬가 - 두려운 것은 무의미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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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광이 달빛을 가르며 날았다. 이번에, 은결의 팔이 칼에 베였다. 피부가 갈라지며 핏방울이 허공을 날았다. 창백한 달빛 아래서 핏방울은 낮선 남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핏빛을 무심하게 시야에 담으며 쿠로사카는 뒤로 물러갔다.

용케 피하고 있지만 은결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은 분명했다. 그의 전신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이런 지루한 공방이 계속 된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차피 이 결계는 은결과 같은 약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점이라면 비아(非我)와 오래 접하게 되면 인식이 기능을 회복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고 쿠로사카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단순한 전투력이라면 그녀는 은결에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식신과의 전투를 토대로 추측해본 은결의 전투력은 자신의 절반 이하였다. 그러나 이 결계의 목적은 전투에서 유리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은결의 탈출과 외부의 개입을 막는 격리였다. 때문에 가문의 치욕을 씻어야 하는 그녀는 만의 하나를 예방하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검을 회수하던 쿠로사카의 팔목이 은결에게 잡혔다. 쿠로사카의 맑은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자신을 향해 주먹을 뻗어오는 은결의 모습이 반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주먹이 다가오며 주변으로 복잡한 마법진이 떠올랐고, 그 마법진은 복잡한 궤도운동을 보이며 엄청난 에너지의 흐름을 일구어 그 모든 것을 순결한 파괴력으로 전환했다. 쿠로사카의 두 눈은 모든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来る!’

(온다!)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복부로 대포가 터진 듯한 충격이 전달됐다. 그녀의 허리가 뒤로 꺾어졌다. 실제로 3세대 전차의 포격에 비길만한 위력이다. 그 위력 앞에서 보통 인간의 몸 따위는 종이조각과 같다. 쿠로사카의 가녀린 동체가 거세게 뒤로 튕겨나갔다. 그녀는 한참 허공을 날아 겨우 대지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일어서려던 그녀는 두 다리로 꼿꼿이 서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꿇었다.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육체 자체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신이 덜덜 떨렸다. 척추에 금이 갔을 성 싶었다. 일을 빨리 끝내고자 공격에 기를 많이 배분하느라 방어에 충분히 심경을 쓰지 못했다.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그녀의 입가로 붉은 피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먼 거리에서 은결을 바라봤다. 먼 거리에서도 은결의 담담하고 슬픈 표정은 뚜렷했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悪いが、感覺遮斷は僕には効かない。異なる事だけが認識出来るのは、昔から分っていった。それを知った以上, この仕掛けは無用さ。"

(미안하지만 감각차단은 내게 통하지 않아. 다른 것만이 인식 가능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것을 안 이상 이 기술은 쓸모없어.)

은결은 감각차단실을 통해 그것을 알았다. 그가 최초로 감각 차단실을 체험한 것은 열 살 때의 일이다. 칸트나 후설,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에 대한 공부를 어느 정도 이루어놓음으로서 해석학의 기초를 닦았고, 그를 통해 각종 상징기호에 이해를 넓혀 나가며 본격적으로 헤겔을 접하던 시기였다.

그때 은결은 수행의 지시에 따라 별반 크지 않은 철제 통에 들어가게 되었다. 특수한 마법적 처리를 통해 완벽하게 소리를 차단하는 통이었다. 안에는 체온과 같은 온도의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비중 역시 사람과 동일했다. 피부 감각은 물론 심부감각이나 항중력근등 일체의 감각작용을 막기 위한 처치였다. 수행은 그것이 미국의 과학자 릴리의 격리탱크를 모방해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은결은 그 안으로 들어가 장시간을 보냈다. 소리도, 빛도, 감촉도 없는 공간이었다. 위도, 아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은결은 자신의 몸이 물에 녹아버린 것 같다고 느꼈다. 의식만이 뚜렷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감각차단은 완벽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은결은 몇 번이고 반복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며 은결은 신비한 체험을 했다. 수행을 하며 특정한 순간에 찾아오곤 하는 황홀경과도 닮은 환상이었다. 때로 그것은 유체이탈이었고, 때로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완벽한 영상으로 재현해 내는 것이었고, 때로 그것은 신적존재와의 조우였다. 때로 은결은 그 영상들을 자유로이 조정하기도 했다.

은결은 그 체험들을 수행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수행은 그 영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은결에게 물었다. 그때 은결은 슬픈 표정으로 ‘타자에 대한 요구’라고 답했다. 수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은결의 감각차단 수행은 끝났다.

그 모든 영상은, 모든 감각을 차단함으로서, 세계와 나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게 된 자아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억지로 만들어낸 ‘차이’, 즉 ‘타자’의 모습이었다. 똑같은 길이의 직선에 안으로 향하는 화살표를 붙이느냐, 밖으로 향하는 화살표를 붙이느냐에 따라 그 길이가 달라보이는 착시 현상이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진 모습이었다.

수행은 은결에게 헤겔을 공부시키기에 앞서, ‘절대정신’이 자신을 알기 위해 자연이라는 대상이 필요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시키기 위해 그런 단계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로서 은결은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해함에 이어 인간인식에 대한 이해의 폭을 한층 더 넓혔고, 이런 종류의 환상에 미혹당하지 않을 정신과 기술을 갖출 수 있었다. 다만, 은결은 그 경험과 결론을 ‘참혹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僕は貴女と戦いたくない。今退くなら今日の事はなかっだ事にする。"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 지금 물러간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지.)

은결이 말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원래 은결은 쿠로사카를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회복불능에는 몰고자했다. 그래서 그녀를 방심상태로 몰아넣기 위해 감각차단결계라는 것을 알고 난 뒤로도 한동안 그녀의 검 끝에서 놀아났었다. 하지만 수많은 검상을 입으며 겨우 얻어낸 기회를 살려 날린 통한의 일격에도, 쿠로사카는 기대한 만큼 피해를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더 강했다.

‘그런데다 이곳 자체가 뒤틀린 이공간이라 감각 차단 자체는 막더라도 결계 밖으로 빠져나갈 길은 요원하고...’

은결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면 그 힘의 차이도 쉽사리 극복할 수 있겠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데, 그녀는 궁지에 몰린 쥐가 아니라 고양이다. 더구나 필요하다면 죽일 각오도 서 있지만,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선택이다. 가능하다면 그녀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과 싸우기 위해 이런 파괴적인 힘을 몸에 익혀두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あ、なた…、調子に乗るんじゃ…ない…"

(당, 신... 우쭐 거리...지마...)

그러나, 쿠로사카는 전투 시작 후 처음으로 입을 열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겨우 일어서며, 분명한 거절의 뜻을 전달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을 처음 은결에게 들이 내밀었던 것 처럼 내밀며,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あなた見たいな朝鮮人に…やられるほど、わたしは甘くない…。"

(당신 같은 조센진에게... 당할만큼, 나는 약하지 않아...)

은결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일본인에게 ‘조센진’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은 매우 기분이 나빴다. 틀림없이 그 불쾌감의 상당부분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 뿐만은 아니다. 은결은 ‘조센진’이라는 모멸적인 단어가 담고 있는, 민족이라는 범주로 선악을, 우열을 나누고자 하는 해석의 체계가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싸우고 있는 상대에게 ‘정치적 올바름’따위를 요구하는 것도 웃긴 노릇이긴 했지만, 그 세계관을 받아들여 발설함으로서, 타인을 재단할 수 있는 정신의 저열함도 불쾌했다. 어차피 모든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은결은 차갑게 말을 토하고, 쿠로사카에게 돌진했다. 그녀가 검을 들었다. 은결의 주먹이 차가운 검신에 가 닿았다. 따앙! 악기를 울린 것 처럼 긴 공명음이 나며 그녀의 예도가 흔들렸다. 달빛이 그 흔들림을 타고 스산하게 흩날렸다. 이어, 은결의 발이 쿠로사카의 복부를 걷어찼다. 마법진이 발생하며 은결의 공격을 방어했다. 꽈앙!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은 서로 뒤로 튕겨나갔다.

“하악!”

쿠로사카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자세를 무너뜨렸다. 일어서긴 했어도 역시 은결에게 당한 일격의 위력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은결은 지체하지 않고 달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그의 주먹이 검을 쥐고 있는 쿠로사카의 오른손을 노렸다. 쿠로사카는 이미 예측한 듯, 손을 뒤로 빼며 검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은결의 손아귀가 검에 부딪혔다. 퍼억!

“헛!”

은결은 헛바람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번 일격에 그의 손에 펼쳐졌던 마법진이 깨어지며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점이 둘로 쩍 갈라졌다. 벌어진 살점 사이로 붉은 피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쿠로사카는 그 틈을 타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자세를 잡았다.

은결은 혀를 차고 그녀에게로 다시 돌진했다. 하지만 방금 전보다 훨씬 상태가 나아진 듯, 그녀의 방어는 안정되어 있었다. 공방이 연속해서 수십 회 이어졌다. 쾅쾅쾅쾅! 아무 것도 없는 대기를 향해 내뻗은 공격에서도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며 이 대결의 흉험함을 설명했다. 은결의 공격은 번번이 막혔다. 쿠로사카는 공격 없이 방어만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방어는 점차 여유를 되찾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은결은 초조함을 느꼈다. 시간을 끌면 다시 형세는 그에게 불리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올렸다. 격통이 전신을 치달렸다. 기맥이 몽땅 터져버릴 것 같았다. 쿠로사카가 은결의 기세에 놀라 흠칫, 표정을 바꾸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난전 가운데서 기세의 눌림은 흔히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한 걸음, 두 걸음, 쿠로사카가 점차 뒤로 밀렸고, 그녀의 손이 바빠졌다. 처음 은결을 공격할 때 보여줬던세련되고 부드러운 동작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겼다!’

은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기의 상태도 결코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전신의 상처는 대부분이 피부를 벤 정도였다. 이대로 밀어붙인다면 이길 수 있었다. 승리의 예감이 전신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때, 쿠로사카의 눈빛이 악독해졌다. 은결은 그 눈길을 정면으로 접하고 등골을 쓸어가는 짙은 소름을 느꼈다.

"解! 靈劍 切り闇!"

(해! 영검 키리야미!)

쿠로사카의 목소리가 공간을 떨쳐 울렸다. 빛이 번쩍였다. 은결은 전신의 닭살과 함께 서둘러 뒤로 빠졌지만 피할 수 없었다. 강렬한 빛이 한 줄기 선으로 압착되며 그를 향해 날았다. 마법진이 자동적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관통되며 은결의 가슴으로 깊은 절상(折傷)이 새겨졌다. 쩍 갈라진 가슴의 피부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륵 쏟아졌다. 은결은 서둘러 기를 운행해 그 곳의 혈액 운행을 중단시키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기위해 쿠로사카 쪽을 바라봤다.

“우...”

은결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녀는 은결에게 처음 검을 겨누었을 때와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처음처럼 고결한 모습이었지만, 여러 가지가 처음과는 달랐다. 격렬한 전투로 그녀의 모습도 초췌했고, 옷도 넝마처럼 상했다. 입가로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연하고, 머리칼은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차이점은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이었다.

검신은 달빛을 머금지 않고 스스로 빛나고 있었고, 날은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기의 맥박을 느끼게 했다. 청아하고 고결한 그 검은 스스로의 예리함으로 어둠을 가르며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살아있음에 대한 느낌은 단순한 유기물의 활동이 흔히 지칭되는 살아있음과는 질적으로 틀린 숭고함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일전 수행이 신성을 펼쳐내었을 때, 은결이 느꼈던 것과 흡사했다.

흡사하지만, 그러나 그것과도 분명히 틀렸다. 수행이 펼쳐낸 신성은 가짜지만, 그녀가 쥐고 있는 검의 신성은 진짜였다. 은결의 본능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글을 쓰다보면, 때때로 잘 쓰고 있는 건지 불안에 빠지곤 합니다. 이럴 때 괜히 좌절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꽤 무서운 일입니다. 후~

*격리탱크는 실제로 있습니다. 80년대에 스포츠 용품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 중독성이 없지만 고급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가진다고 합니다. 혹은, 높은 수준의 수행과 같은 명상효과라고도 합니다. 다만 장기간 사용하면 사람에 따라 격리탱크에서 빠져나와도 환상을 보는 경우가 있어 모두 폐기되었다고 합니다. 만든 사람인 존 릴리 박사는 이 기구를 통해 정말 극적인 신비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신과 만났습니다.)파인만도 들어가보고 체험기를 남긴 것으로 압니다. 격리탱크의 신비체험에 관련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단순한 환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적입장으로 해석은 하지 않습니다. 근데 이 글은 사념체니 뭐니 하는 주제에 묘하게 유물론적이군요.

*생각해보니, 이 글 연재되고 나서 은결에게 좋은 일이 일이라곤 거의 없었군요. 음. 조금 반성.

*오늘 스위스와 승부가 있습니다. 한국 대표팀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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