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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38화 (38/300)

#   38-희망을 위한 찬가 - 두려운 것은 무의미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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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오십억 년간 그러했고, 장래 오십억 년간 그러할, 새삼스런 일출의 빛이 새벽을 찢은 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찢겨진 어둠의 궤적에서 흘러나온 굴절하지 않는 금색 빛은 직시할 수 없는 원구의 상승과 더불어 농염한 백색을 띄어나갔다. 성천 고등학교의 운동장은 혼곤한 황금색과 뜨거운 백색 사이에 걸친 아릿한 태양빛을 받으며, 길게 아침의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등교생들을 전송했다.

“...다음 주 쯤에 카탈로그를 만들어 줄 테니까, 그 중에 하나 사 줘야 해.”

자전거를 주차시키고 돌아오는 은결을 향해 미래는 참새처럼 조잘거렸다. 기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은결은 가슴 아픈 표정을 지으며 “아, 알았어.”하고 답했다. 어제 시험 성적이 모두 발표되었는데, 미래가 정말로 전교 1등을 했다. 괴물이다. 그래서 당초 약속한 대로 은결은 미래에게 선물을 하게 됐다. 가격도 싸지 않다. 덕분에 은결은 왜 옛사람들이 입은 만 가지 화의 근원이라 말했던가, 하는 것을 자신의 얇아지는 지갑과 더불어 실감할 수 있었다. 꽤나 비싼 통찰이다.

‘앞으로는 미래하고 성적가지고 내기하는 미친 짓은 말아야겠구나...’

그때 은결의 뒤에서 청아하고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銀ギョ─ル、おはよう。"

(은결. 좋은 아침.)

은결과 미래는 함께 시선을 돌렸다. 운동장으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린 밝은 얼굴의 미소녀가 거기 서 있었다. 쿠로사카였다. 은결은 반갑게 인사했다.

"あ、黒坂さん,おはよう。"

쿠로사카는 미래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미래에게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은결에게 물었다.

"傍にある綺麗な人は銀キョ─ルの妹さん?"

(곁에 있는 예쁜 분은 은결의 동생?)

"はい。"

(예.)

그녀는 은결을 바라보며 새초롬히 웃었다.

"銀キョ─ルの妹さんがすごい美人だとは聞きましたが、本当ですね。びっくりしました。"

(은결의 동생이 굉장한 미인이라 듣긴 했지만, 정말이군요. 놀랬어요.)

“하, 하하하. 미래야. 너도 알지? 이쪽이 이번에 후쿠오카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쿠로사카양이야.”

은결은 어색하게 웃으며 미래를 소개했다.

“...하지메마시데.”

미래는 어렵사리 고개를 숙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쿠로사카에게 인사했다. 어딘가 어색한 인사였다. 은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밝은 그녀를 생각하면 설명하기 힘든 태도였다.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은결은 고개를 저었다. 미래의 어색한 인사는 단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 머뭇거림과 어두움의 뒤섞임- 간단하게 말해 거부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어색한 인사를 듣고, 쿠로사카는 환한 얼굴로 회답했다.

"始めまして。黒坂百合絵と申します。いつも貴女のお兄さんには迷惑を掛けでいます。よろしく。"

(처음뵈요. 쿠로사카 유리에라고 한답니다. 항상 오빠에게 폐를 끼치고 있답니다. 잘 부탁해요.)

“크흠, 쿠로사카 유리에라고, 앞으로 잘 부탁한데.”

쿠로사카의 말을 그대로 전하려니 제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아 거북했다. 은결은 대화의 중간 부분을 쏙 빼고 해석해 미래에게 전달했다. 은결이 뭐라 해석한 것인지 알아들은 쿠로사카는 약간 장난끼 느껴지는 얼굴로 은결에게 말했다.

"あ、照れなくでもいいのに。"

(아, 창피해할 필요 없는데.)

“아, 아하하하.”

은결의 머쓱해 하는 모습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녀는 가볍게 쿡, 하고 웃어보이고는 가방을 들지 않은 왼손을 들어 두 사람에게 흔들어 보였다.

"それじゃ、教室で。"

(그럼 교실에서.)

"ええ。"

(예에.)

그리고 쿠로사카는 태양빛을 뒤로하고 은결에게서 멀어져 갔다. 손을 들어 인사하고 몸을 돌려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유려한 연결을 보여줬다. 마치 춤의 한 동작 같은 세련된 부드러움이었다. 은결은 속으로 감탄했다. 어쩌면 그녀는 오랫동안 체조라던가, 무용을 해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됐다.

“오빠.”

멀어지는 쿠로사카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며, 미래가 말했다.

“응?”

“저 사람하고 사이... 좋아?”

“으음, 좋다고 하긴 그렇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나쁘진 않지. 왜?”

“아, 아냐.”

한동안 우물쭈물하던 미래는 결국 하려던 말을 접었다. 깊은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 감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연에 대한 적대감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미래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저 밝고, 활달한, 호의와 자신감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소녀에게서는, 이상스런 불안감과 이질성이 느껴졌다. 공간적인, 시간적인 접근성이 결코 존재의 본질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이어지지 않는 기묘한 거리감. 그것은 매우 미묘한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마치-

‘오빠- 같아.’

미래는 미간을 좁히며 조용히, 그리고 겨우 자신의 감각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유쾌하지 못한 결론이었다. 그런 미래의 동태를 살피던 은결이 침착하게 말했다.

“키도 작은 게 싱겁긴.”

그리고 방금 배운 교훈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덕분에, 은결은 카탈로그에 수록된 선물 가격을 배춧잎 한 장 만큼 더 올려야 했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 뿐이라는 격언이 증명되는 서글픈 장면이다.

밤에는 악이 꽃핀다.

나태한 정신과 은밀한 마음. 교묘한 말과 끈덕진 욕망. 뜨거운 분노와 헛갈리는 좌표. 따가운 침묵과 위험스런 손. 재빠른 달음질과 폭발하는 충동. 핏발선 눈과 뜨거운 삿대질. 날카로운 비명과 끊어지는 숨결. 좁고 높은 철조각과 부드러운 지방. 욕망과 욕망. 충동과 충동. 절망과 절망. 밤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한다. 낮의, 빛의, 선의 반대이기 때문이 아니다. 어둠은 그저 빛의 부재다. 그래서. 빛이 빠져나간 넓은 폭으로 낮이 감싸지 못하는 것들을 감싼다. 그저, 그 뿐이다.

...은결은 손을 내리쳤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두 조각이 나며 대지로 널부러졌다. 은결은 손을 내렸다.

“이것으로 정리 끝.”

가벼운 한숨을 토하며 은결은 긴장하고 있던 어깨를 내렸다. 혈액을 타고 흐르던 아드레날린이 점차 묽어지며 그의 마음이 품던 긴장도 스러져갔다. 기의 흐름이 늦어지며 전신을 장악하고 있던 고통도 약해졌다.

“오늘로 오일 째인데, 사람 놀리는 건지...”

뒷정리를 위해 자신이 쓰러뜨린 괴이쩍은 존재들에게 다가가며 은결이 중얼거렸다. 가로등의 창백한 빛이 은결의 옆얼굴을 비췄다. 절반이 드러난 은결의 얼굴은 짙은 의혹과 불쾌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오일 째 이 기분 나쁜 녀석들을 계속 상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일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하지만 이 작자는 무슨 의도인지 전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않고 식신인지 고렘인지 모를 사역물들을 조종하고 있을 따름이다. 체크는 꾸준히 하고 있지만 자신은 물론 할아버지 역시 일체의 기색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도천시 외부에 있거나 상상도 못할 만큼 고도화된 스텔스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숨어 있는 상대가 보내는 무의미한 졸개들과의 싸움밖에 할 수가 없다. 완전히 적의 페이스였다. 불쾌할 수밖에 없다.

“제길.”

은결은 투덜대며 손을 내뻗었다. 마법진이 일렬로 늘어서며 강렬한 힘을 전달했다. 쓰러진 인형에게 그 힘이 주입되며 파란 불길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밤을 강조하듯 불길은 거셌고, 매캐한 탄내는 넓게 퍼져나갔다. 그것을 다 태우고, 은결은 자리를 옮겨 다른 녀석을 태웠다. 그렇게 하나하나 태워나가, 은결은 결국 모든 인형을 태웠다.

메마른 탄내가 공간을 꽉 채웠고-

“-뭐야!”

-그 탄내는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달은 높고, 주변은 사라진 채, 어둠만이 엄격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은결은 침을 삼켰다. 긴장이 뒤섞인 침은 끈적한 질감을 느끼게 하며 어렵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그 어둠 가운데, 또박 또박, 조용하고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소리는 달빛으로 이어지며, 아름다운 선의 음영을 이루었다.

은결은 지금 등장할 이야말로 이번 일의 주모자일 것임을 직감하고 전신의 기혈로 기를 강맹하게 회전시키며 등장을 기다렸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긴장이 그를 지배했다. 손끝이 조금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토록 완벽하게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접근할 수 있는 상대를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할 수 있는 데 까지... 할 뿐이지.’

마음을 굳히고 은결은 새삼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예리하게 긴장되어 있던 은결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맹렬하게 회전하던 기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쿠로사카상-?”

은결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경악이 제 멋대로 언어가 되어 튀어나갔을 뿐이다. 기의를 배신하는 기표. 기표를 배신하는 기의. 그렇듯, 의지를 배신하는 언어.

"あなたを切ります。"

(당신을 베겠습니다.)

달빛을 닮은 청아한 언어로 말하며, 그녀는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어둠에 묻혀있던, 긴 철(鐵)과 살(殺)과 예(藝)의 정합물이 드러나며 은결에게 그 끝을 향했다. 그 청결한 얼음을 올리게 하는 선명한 예도 위에서 달빛은 푸르게 부서진다.

*으음, 쓸 수 있는 만큼은 썼습니다. 피곤하네요. 날도 덥고...(털썩)

*쿠로사카가 은결에게 ‘상’을 붙이지 않는 것은 한국식을 따라서 그렇습니다. 에이, 대다수 독자 분에겐 상관없는 얘긴데;;

*은결놈 하는 말이 제 생각이라 생각하심 매우 곤란. 일단 저하고 생각하는 게 같으면 성장이나 발전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부디 부담가지지 말고 무시하세요. 무협 소설 읽으면 주인공이 운기행공 하면서 내공심법 외우는 장면이 나오곤 하는데, 그때 애매한 이야기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일이 이가 되니 어쩌니, 대주천이 어쩌니. 대다수 독자 분들에게 그건 분위기 조성 이외에 아무런 역할도 안 할 겁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무협에서 그러하고. 그저 폼이죠. 읽어도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무협소설이니 집어넣는다, 수준의 감초랄까? 이 글에서도 그런 수준으로 인식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무협에서 내공심법보다는 훨씬 내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지만, 그것들은 독자를 가르치거나 설교하기 위한 내용들이 아닙니다. 뭐, 계속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나오시면 아주 해체해서 모자이크 방식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겠죠. 내용이 길어지는데다 그런 방식으로 정보를 다루기도 솔직히 자신이 없어서 모험이긴 합니다만. 쩝.

*맑스는 마르크스가 단순한 일본어의 번역이라는데 반성(혹은 자격지심)한 학계에서 제안된 말입니다. 한국의 marx표기는 그 둘이 반씩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 김수행 교수가 진행한 맑스 꼬뮤날 조직위원회 창설 때 참여자 대다수가 맑스를 원했다고 하니, 현재는 맑스가 더 힘이 센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원어 발음에는 둘 다 거리가 멀고, 외국어 표기법을 따르면 오히려 마르크스가 올바르다고 합니다. 참고로 원어발음에 가깝게 하고 싶다면 ‘마륵스’가 가장 가깝다고 합니다. 사실 생산양식이니 소외니 사적 유물론(맑스는 이런 말 쓴 적 없습니다만.)이니 이런 주요한 개념어 다 일본에서 번역한 거 쓰면서 마르크스만 가지고 한국화 하는 것도 좀 애매하게 느껴지긴 합니다. 쩝. 안 하는 것 보단 나을까요?

*추천해 주신 디 아크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응원에 힘입어 이렇게 썼습니다. 후훗.

*프랑스와 비겼습니다. 기쁘더군요. 하여간 16강에 올라갔으면 좋겠네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문장이 패러디 성격을 띄게 되어 수정했습니다. 댓글의 맥락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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