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희망을 위한 찬가 - 두려운 것은 무의미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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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대화들 사이로 한량한 햇살이 길게 뻗어 나오고 있는 교실의 풍경은, 지금이 점심임시간임을 설명한다. 막 배식을 받은 은결은 식판을 들고 먼저 배식을 받은 민성과 동물원 삼총사가 기다리는 자리로 갔다. 마지막으로 은결이 자리해 다섯 사람 모두 앉은 다음, 일동은 식사를 시작했다. 그다지 뛰어난 품질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전업주부가 다수 여성들의 희망직종이 된 현실에서 도시락을 기대하긴 어려운 노릇이다.
밥을 입안으로 쑤셔 넣고, 이어 반찬을 집던 민성이 문득 생각난 듯, 은결을 향해 물었다.
"아, 그러고보니 너 유리- 아니, 쿠로사카 한테 계속 일어로 말하던데, 굳이 그럴 필요 있어? 내가 이야기 해 보니까 그럭저럭 한글로도 대화가 가능하던데? 나야 필담 병행이라 속도가 늦긴 하지만, 너 같은 경우 쿠로사카가 그냥 일어로 말해도 알아들을 거고 말야."
자기는 아직도 '쿠로사카 상'이라 격식을 갖춰 말하는데 이쪽은 벌써 무시하고 있었다. 은결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듯, 심심치 않게 쿠로사카에게 다가가 대화를 걸더니 그럭저럭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돌이켜 보면 자기의 경우도 민성이 먼저 말을 걸어왔었다.
"그럴까? 쿠로사카 양의 한국어 실력이 그렇게 썩 뛰어난 것 같진 않던데. 한글 쓰기도 서투르고. 사실 네가 말하는 만큼 한글에 능하면 굳이 일어능력자를 찾아서 같이 앉힐 이유가 없잖아. 그렇다면 한글로는 말하고 싶은 것도 잘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많을 테고, 된소리나 탁음 문제처럼 그 언어권 특유의 차이로 인해 극복하기 힘든 소통상의 문제도 있을 수밖에 없지. 그걸 아는데, 안 한다면 몰라도, 그녀의 편의를 봐주기로 했다면 이 정도 배려는 당연하다고 봐."
민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흠- 그런 건 그냥 사전 들고 해결해도 충분한 거 아냐? 청음인지 탁음인지 하는 문제도 잘 모르겠고.”
은결은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을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언어를 그렇게 단순한 문제로 파악하면 안 돼. 모든 종류의 언어는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아. 심지어 네가 사용하는 한국어와 내가 사용하는 한국어조차 같은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다 말할 수는 없단 말야. 기의는 언제나 기표 위에서 미끄러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개인적 개념을 사회적 언어로 전환시키고, 그 전환을 다시금 한국어로 전환시켜야 하는 쿠로사카 양 같은 경우 소통에 불편이 클 수밖에 없지. 개념의 중역(重譯)이잖아. 번역본도 중역은 높게 안 친다고. 그렇다면 그걸 덜어주도록 노력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말해도,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서 실감이 안 나는걸.”
민성이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작심하면 진짜로 뜬구름을 잡을 수 있는 은결은 포기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으음, 요는 언어가 결국 사태를 재단하는 하나의 범주지만, 공통된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따라 선명한 경계선으로 나눠진 것은 아니란 말이지. 우리는 쉽사리 손가락이니 손이니 팔목이니 말하지만, 그것들이 그렇게 쉽게 나눠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잖아. 어디서 어디까지를 손가락이라 할 것이며, 손이라 할 것이며, 팔이라 할 것이며, 이런 것을 세심히 살피면 아무런 답이 없지. 그냥 특정한 언어적 약속으로 뭉텅뭉텅 그러한 것들을 잘라 지칭하고 있을 뿐이야. 범주화 하는 거지.
그러니 언어를 통한 분할이나 판단들은 사회적인 특성을 지니지만, 결국 본질적으로 선명한 기준을 가지지 못한 자의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해. 물론 그러한 범주화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아냐, 꽤 정확해. 그렇지 않다면 소통 할 수 없겠지. 다만 완전히 정확할 수는 없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당연히 개개 언어 문화권, 심지어 한 언어 문화권 가운데서의 특정한 개인의 언어조차 다른 사람의 언어 사용과의 비교 속에 완전한 일대 일의 대응관계를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하지.”
“사태를 재단하는 범주로서의 언어라. 으음,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고...”
민성은 꿍얼거렸다. 사실 ‘알듯 모를 듯’ 한 것을 넘어서 먹던 음식이 식도에서 걸려 안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 이 자식 평소 쌓인 게 많았구나’하는 은결에 대한 동정의 마음도 일었다. 앞으로는 한층 더 책만 파는 꿀꿀한 인생에서 은결을 해방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동물원 삼총사의 감상도 민성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은결은 남의 속도 모르고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별거 아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개 짖는 소리는 ‘멍멍’으로, 고양이 소리는 ‘야옹’으로, 들리지만 미국 사람들에게는 ‘바우와우’와 ‘뮤-’로 들리잖아. 하지만 미국에 사는 개의 짖는 소리와 한국의 개의 짖는 소리가 그렇게 심한 차이를 가질 리가 없지. 그건 언어가 그렇게 듣도록 만든거야. 일본어의 청음과 탁음이나 우리나라의 된소리 발음은 좀 더 본질적인 것이지만, 원리는 똑같은 거고. 언어가 사태를 재단하는 범주라는 것은 그런 의미지.
그럼 특정한 언어는 그 언어 고유의 방식으로 그 사용자가 사태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관념의 틀로서도 작동한다고 볼 수 있겠지. 그래서 바이스게르머같은 언어학자는 말을 인간과 사물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세계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같은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한 사람의 언어의 한계는 그 사람의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을 한 것일테고.
그렇다면 봐, 특정한 언어는 그 언어 사용자의 해석의 틀로서 작용하는데, 앞서 지적했듯 그러한 틀로서의 언어 역시 명확한 경계선을 가진 채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니 소통이란 측면에서 이러한 상념이나 개념의 번역은 적을수록 좋은 거지. 해석은 단계마다 어느 정도 자의성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으니까.”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 현상의 드러남이 물자체에 대한 범주적 해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듯.
“큼, 뭐 쿠로사카 양의 경우 이렇게 세심한 고려까진 간 건 아니고, 그녀의 한국어 실력이 내 일본어 실력보다 낮은 수준이라 생각 되서 일어를 사용해 원활한 소통을 꾀한다는 면이 제일 중요한 이유지만, 원론적으로는 그러하다는 거야.”
은결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말을 끝낸 그의 입꼬리가 쓸쓸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을 헤, 벌리고 멍하니 은결의 말을 듣던 민성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감상을 말했다.
“으음, 어렵구만. 하지만 다행히 명백하게 이해한 것도 있어.”
“뭔데?”
은결의 기대어린 눈망울에 대고 민성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왼손 검지를 쭉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
“35%가 0.3%처럼 말하면 되게 재수가 없다는 것! 그치?”
그리고 민성은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돌려 고릴라를 바라봤다. 그도 진중한 표정으로 민성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와 늑대도 가세했다.
“이것들이...”
자신의 열정적인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혔던 모양이다. 글로만 읽던 ‘인문학의 위기’(?)를 눈앞에서 접하고, 은결은 좌절했다.
은결은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는 부드럽게 유영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바람을 전신으로 맞이했다. 전신을 훑는 봄과 여름 사이의 바람은 따스하고도 뜨거워, 먼 하늘을 향한 아득한 안타까움을 기억나게 했다.
은결은 그 감각과 더불어 전신의 기를 운용했다. 서투른 외국어로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려 하는 것처럼, 소통은 원활하지 않았다. 고통에 일순 그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은결의 얼굴은 이내 평안을 되찾았다. 감각이 광범위한 범위로 확장되어 나갔다. 금세 그것은 학교 전역을 뒤덮는 것이 되었고, 동 전체를 넘어서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곧 은결은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다. 보이지 않지만 이미 무언가를 눈동자 속에 담아 둔 것 같은 시선이다.
‘이 동네에만 셋이라...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발생한 녀석들이지? 얼른 처리 해야겠군.’
확장된 감각 가운데 이질적인 존재의 느낌이 셋 정도 느껴졌다.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쿠로사카와 악수할 때 느껴졌던 떨림은 이 녀석들의 흔적인 것 같았다. 아직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현재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전력을 가졌다면 이런 방식의 검색으로도 그 힘의 크기는 여실히 느껴질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이후 흩어져 추적하기 곤란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 내에 다 처리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갈등은 금방이었고, 은결은 옥상 펜스를 밟고 맹금류의 날렵함을 생각나게 하는 선명한 도약으로 허공 가운데 몸을 실었다. 학교에 늦겠지만, 별 수 없다. 늦더라도 해야 한다.
학교라는 단어가 대표하는 일상의 범주는 어차피 은결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그럼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범주는 오히려 이쪽이다. 미국인에게 개 짖는 소리가 ‘바우와우’로 들리듯, 한국인에게 개 짖는 소리가 ‘멍멍’으로 들리듯, 이러한 일을 하는 은결의 세상에 대한 시각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가 없다. 은결은 허공을 통로의 한 범주로 파악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허공은 허공일 뿐이지 않겠는가.
‘범주, 라-’
채 소화되지 않아 뱃속에서 느껴지는 점심밥의 여운처럼, 그때의 친구들과 나눈 대화의 파편과 분위기고 그의 뇌리를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도덕경의 첫 마디가 떠올랐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도를 도라 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범주화가 결국 해석의 한 형식임으로, 그것은 자의성을 집어넣기 마련이고, 그 자의성으로 인해 반영하고자 하는 객관적 사태의 본질은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 때문이 이 말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그렇지만 범주화 하지 않고 받아들이기에, 억지로라도 무엇인가 의미 있다 믿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지 않기에, 그래서 무언가를 저 밖으로 ‘밀쳐내’지 않기에는 세상의 모습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이다. 인간이 이런 범주화에 대한, 해석에 대한 욕망을 본능적으로 품는다는 것은, 진화 가운데 인간이 그러한 욕망으로 세상을 효율적으로 파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후-”
은결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고민이 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앎으로서, 슬픔을 함께 익힌 지는 오래다. 아니다. 상관없다. 우선 해야 할 일은 저것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다.
*슬슬 예측하신 분도 있겠지만 이 글의 절망, 혹은 회의는 개인적인 성격이 짙지 않습니다. 은결이나 히로인과 같은 등장인물을 끈질기게 괴롭혀서 얻어내는 절망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란 말이죠. 그냥 은결 주변을 몰살시켜 절망을 얻어내는 게 편하긴 하겠지만, 제가 그런걸 별로 안 즐기는지라,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이쪽으로 택했습니다. 이 부분도 차분하게 읽으면 꽤 즐거울 거라고 여깁니다.
*그냥 리얼리티 획득과 개인적인 향상심의 차원에서 일어를 도입한 거라, 여기에 관련해 조언을 얻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 외로 여러 조언을 얻었습니다. 감사히 생각합니다.
*월드컵에서 토고를 이겼습니다. 즐거운 일입니다. 대표팀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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