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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34화 (34/300)

#   34-희망을 위한 찬가 - 두려운 것은 무의미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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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の名前は黑坂百合繪と申します. これから皆さんと一緖に勉强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 韓國語を喋るのはにがてですが, 聞くことは大抵できます. 筆談もできます. 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제 이름은 쿠로사카 유리에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어를 말하는 것은 서투르지만, 듣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필담도 가능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교단에 올라간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말 끝에 붙인 미소가 그 차가운 인상을 부드럽게 감싸며 상쾌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옆에 서 있던 담임이 그녀의 말을 듣고 해석해 학생들에게 전달하고는 몇 마디 말을 더했다.

"그녀의 이름은 유리에다만, 되도록 이름으로 부르는 실례는 하지 않도록. 물론 그녀도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만큼, 한국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은 습득한 상태에서 왔다만, 그래도 일본에서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자리 말인데-"

그리고 담임은 주변을 쭉 훑어봤다.

"혹시, 일상생활 전반에 대해 일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라."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은결은 할 수 있지만 손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고 그녀에게 간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만일 이 곳에서 왕따에 준하는 일이 발생한다 해도 저런 눈을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별반 대단한 일이 아니다. 소외가 고통이 되는 것은 대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이들 사이의 의미단절일 경우이다.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다면 소외는 고통으로 전환될 수 없다. 만일 폭력사태까지 번진다면 모르지만, 교환학생을 상대로 그런 미친 짓을 할 녀석이 있으리라곤 도무지 생각되지 않았다.

"정말 없어?"

선생님이 곤란하단 얼굴로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였던 모양이다. 그때 한 명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민성, 네가 이런 것도 할 수 있었어?"

"아, 저는 아니고, 추천하려고 손 든 겁니다. 은결이가 할 줄 안답니다."

"그래?"

담임은 반가운 표정을 했다. 은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설 뻔했다. 겨우 자제한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 만 벌린 채, 경악의 눈길을 민성에게 보냈다. 민성은 득의만만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 은결을 향해 윙크해 보였다. 원래 사내가 사내의 윙크를 받으면 기분 나쁜 법이겠지만, 그게 살의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은결은 새롭게 체험했다. 은결은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쥐 죽은 듯 지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그럼 유리에 양의 자리는 은결 옆자리로 정하도록 하자. 은결, 괜찮겠지?"

"아, 예."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녀가 선생님에게 물었다.

"なら,あの生徒の隣席に座ればいいんですか?"

(그럼, 저 학생 옆자리에 앉으면 됩니까?)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듣자니, 한국어 청취능력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은결은 그럼 그녀가 한국어를 어느 정도 말하는 것도 가능하단 말일텐데, 왜 한국어로 말하지 않는가가 의아했다.

"그래."

담임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결 옆자리에 있는 학생에게 지시해 뒤로 보내고 유리에를 그 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녀는 담임의 지시에 따라 은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은결에게 간단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약한 미소를 보이며 유리에를 맞이했다.

"よ,よろしく.俺は朴銀ギョ-ル.な,仲よくしましょ."

(자, 잘 부탁해. 나는 박은결. 사, 사이좋게 지내자.)

못알아 먹을 거야 없지만, 유창한 일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은결이 일본 가서 산 것도 아니고, 이제까지 책 읽을 때나 써먹어 왔으니 별로 질책할 것은 못된다. 유리에는 은결의 인사를 듣고,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은결은 조금 창피해 하면서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했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피부였다. 유리에도 은결에게 '요로시쿠'하고 말했다. 처음의 인상이 거짓 같았다. 유리에는 차분하고 친절한 소녀 같았다.

'-읏!'

그때, 은결의 가슴이 뛰었다. 미약하지만 카미와 싸운 날 느꼈던 것과 같은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 친밀한 파동의 정체는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모든 종류의 영적 현상은 종류를 불문하고 그 비일상성을 통해 일상을 파괴하는 힘을 지닌다. 학교에서 그런 힘이 느껴진다는 것은 좋지 않았다. 어쩌면 주변에 사념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何か 變なことでも?"

(무슨 이상한 일이라도?)

“い、いや。何でもないんです。"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결은 호의적으로 답하고 얼른 손을 떼냈다. 그는 시간을 마련해 이 주변을 한 번 돌아봐야 하겠다고 여겼다. 느껴진 파동의 크기로 봐선 설사 그 힘이 적대적인 사념체나 괴물의 것이라 해도 아직은 우려할 수준이진 않을테니 여유를 가지고 탐색해도 충분했다.

'점심시간을 노려야겠군.'

선생님이 조회를 끝마치고 교실을 나갔다. 수업시간 까지 10분 정도의 시간이 비었다. 유리에 주변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은결은 그 틈을 타 하얗게 웃는 얼굴로 민성을 찾아갔다. 필담이 가능하다니 유리에에게 굳이 자신이 붙어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됐다.

민성은 은결의 얼굴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은결이 숨은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극 소수의 사람 중 하나다.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민성의 뒷걸음질도 결국 교실 벽에 부딪혀 막혔다. 은결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문장이야 별 것 아니지만, 어조가 아래로 깔려 있었다.

"아, 아니- 선생님이 곤란해하시는 걸 보고 제자로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싶어서."

"친구가 곤란해지는 것은 괜찮고?"

"그, 그런 건 아냐, 사실 따지고 보면 너, 나한테 고마워 해야 할 거 아냐. 저 유리에라는 여자애 굉장히 예쁘던데, 옆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 옆자리에 앉고 싶어도 못 앉는 놈들이 쎄고 쎄었다!"

그건 사실일게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미녀에게 강한 남자는 찾아보기 힘들고, 유리에는 예쁜 소녀다. 하지만 은결은 배부른 소리 한 마디로 논의를 종결시키고자 했다.

"아무도 안 부탁했지."

민성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 그리고 이게 다 너를 생각한 거라니까. 네 이번 기회를 통해 네 시스콘 기질을 고쳐..."

"시스콘은 무슨 얼어죽을 시스콘! 까고 말해서, 너 아무도 이 반에 저 아이 상대해줄 사람이 없으면 다른 반으로 넘어 갈까봐 그런 거지?"

"웃...!"

은결은 이를 박박갈며 말했다. 그에 민성은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정곡인 모양이다. 은결은 냉소적인 미소를 떠올리며 공세를 이어갔다.

"누가 시꺼먼 니 놈 속 하나 못 읽을..."

그때 두 사람 사이에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もし迷惑なら先生に話しで席を換えますが..."

(혹시 폐가 된다면 선생님께 말씀드려 자리를 바꾸려는데...)

유리에였다. 조금 우울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벌써 민성과 자신이 나눈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은결은 민성에게서 떨어지며 서둘러 변명했다.

“そんな! 迷惑だなんで、とんでもないんです! "

(그런! 폐라니, 당치 않습니다!)

민성은 그 사이 도망갔다. 은결은 속으로 탄식을 토했지만 기회야 얼마든지 있다. 우울했던 유리에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よかっだ.賴りにしますよ."

(다행이다. 든든하게 여기고 있어요.)

"は,はい..."

(에, 예...)

유리에의 가벼운 미소를 보며 은결은 얼빠진 얼굴로 답했다. 차분하고 평화로운 인상이었다. 정말로 자신이 잘못 봤던걸까? 은결은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있는 편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인상은 굉장히 강렬한 것이라 내심 자신의 판단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뭐랄까, 어떤 동지감 같은 것이 강렬하게 느껴졌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접한 그녀의 인상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는 굳은 것 같지만, 주변과 충분히 소통하고자 하는, 평범한 소녀 같았다.

'뭐, 어느 쪽이든 잘 적응해 나갈 것 같으니, 첫 인상이 틀린 거라도 상관없겠지. 일본인이라서 너무 민감하게 여겼던가봐.'

은결은 그런 결론으로 자신의 혼란을 정리했다. 일단 급한 것은 학교 주변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념체를 탐색하고, 있다면 처리하는 것이었다. 고통은 여전히 전신을 휘달리고, 힘은 1/3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학교를 부술 생각이 아니라면 사념체를 상대하는데는 어차피 그 정도면 충분했다.

*리얼리티와 개인적인 일어 쓰기 능력 향상을 위해 본문에 일어를 도입했는데, 생각 외로 많이 귀찮습니다. 다음 챕터부터는 때려치울까 싶네요. 오타나면 고치기도 힘들고. 아, 영문 조합으로 を쓰는 방법 아시는 분? 그냥 쓰니 이 お만 나오는데.

*눈썰미 좋은 독자 분이 에피쿠로스에 관련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인식론은 이성적 인식을 무의미하다고 봅니다만, 제가 말한 것은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이 아니라 '인식'이었습니다. 메타적인 것이었죠. 다시 말해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성적 판단이 무의미하다는 이성적 판단을 인식에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인식을 이성에 종속시킨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근데 쓰고 보니 오해를 부를만한 문장인 것 같기도 해, 에피쿠로스는 그냥 지울까 싶기도 합니다.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럼, 다음 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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