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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33화 (33/300)

#   33-희망을 위한 찬가 - 두려운 것은 무의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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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 고등학교에 2학년 학급은 총 10개가 있다. 그런데 개 중에서 은결네 반에 교환학생이 오게 된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2학년을 담당하고 있는 십 여 명의 담임선생 가운데 은결네 담임이 일본어를 가장 잘 했기 때문이다. 그는 JLPT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 일어 능력자가 과장 좀 보태서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수준으로 있다곤 하지만, 역시 JLPT 1급쯤 되면 그렇게 흔하지 않다. 납득할만한 처사였다.

“한 명도 그런 자격증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배정이유를 알게 된 민성이 의문스런 얼굴로 말했다. 은결이 간결하게 답했다.

“학생 기준으로 찾지 않았을까? 2학년 다 합하면 400명이나 있는데, 설마 그 중에 일어 능력자가 없을까봐. 이번에 교환학생으로 간 녀석도 어느 정도 일어 하니 갔을 거 아냐. 나만 해도 일어 가능한걸.”

“우와! 너 일본어 할 수 있냐?”

“할아버지하고 아버지가 일어를 잘 하시거든. 옛날에 그 덕에 좀 배웠지. 특히 할아버지는 청음과 탁음도 제대로 발음할 수 있어.”

한국인은 ‘ㅅ’, ‘ㅆ’의 차이와 같은 된소리 구분에 능하지만 일본어의 청음과 탁음의 차이 같은 유성음과 무성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물론 일본인은 그 반대다. 한국인이 청음과 탁음을 구분하는데 이어 발음까지 올바로 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일어를 배워 사용했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고 나면 어지간한 훈련으론 결코 그런 발음상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 은결 할아버지의 일어 능력이 그런 차이를 극복할 만큼 높은 것은 일제 강점기를 거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은결은 일부러 그 말을 뺐다. 그는 이야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흠, 그렇군. 하여간 좋은걸 알았다. 나중에 동시통역사로 초빙하마!”

민성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은결이 의뭉스런 얼굴로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やめて(그만둬)와 気持いい(기분 좋아)로 점철된 영상물에 대한 통역이라면 미리, 이 자리에서, 정중히, 사양하마.”

민성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그는 툴툴거리며 은결을 쏘아붙였다.

“쳇. 쩨쩨하긴.”

“그 전에, 그런 건 통역이 필요 없잖아.”

은결은 어차피 그런 영상물은 내용이라 할 만한 것도 얼마 없지만, 있다 해도 그것의 대부분은 바디랭귀지로 충분히 해결되는 법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일본 성인 비디오의 심오한 세계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 말에 민성은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얼굴을 하며 그 말을 받았다.

“그래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감상의 차이가 있는 법이지.”

“그럴 거면 한국어로 된 걸 보면 되잖아.”

“으음, 물론 그것도 방편의 하나긴 한데, 뭐랄까- 국산은 좀 신비감이 없달까?”

“...아, 그러세요.”

야동 보면서 저렇게 까다롭게 이것저것 고려하는 것도 나름대로 대단하다 여기며, 은결은 한심하단 목소리로 답했다. 그에 민성은 남자의 로망을 모른다며 투덜댔다. 그때 지나가며 두 사람의 말을 듣던 동물원 삼총사는 민성 편을 들었다.

조례 시간이 머지않았다. 전에 없이 들뜬 분위기에 충만해 있던 교실도 지금은 꽤 가라앉았다. 기대와 흥분이 차가워진 것은 아니다. 폭발하기에 앞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은결도 마찬가지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 탓인지 이런 한적한 시간임에도 드물게 그의 책상 앞에는 책이 펼쳐져 있지 않았다.

‘일본인이라- 요즘은 어쩐지 일본과 인연이 많군.’

은결은 칠판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카미와 싸워 병원에 누워 있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이란 걸 생각하면 역시 조금은 공교롭게 느껴진다. 이 두 사건 사이에 아무런 연결이 없을 거란 걸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서는 ‘혹시’ 라는 생각을 몰래 하게 된다. 그 무의미하고 우연적인 기준을 통한 사건의 연결과, 그 연결에서 억지로 의미를 뽑아내고자 하는 욕구야 말로 미신과 독선의 기원이란 것을 알면서도.

은결은 작게 웃었다. 카이사르는 고대에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말했는데, 그의 이 말은 과거부터 익히 알려져 있던 인간 인식의 특성을 다시 한 번 말해봤던 것에 불과하다. 스토아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런 인간 인식을 이성에 따라 훈련시키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사람의 인식이란 무분별한 여러 사태들을 질서정연하게 하나로 엮고자 하는 욕망을 본능적으로 품는것 같다. 그렇다면 이 근거 없는 질서에 대한 욕구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인간 인식이 가지는 그 본능을 무작정 부정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질서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은 모든 지식의 기원이니까. 학문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현상들의 이면에 숨어 있는 질서를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이 곳까지 웅비한 것은 본능이 각인시키고 있는 이 질서에 대한 욕망에 기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차별과 억압의 기원이기도 하지.’

은결은 쓰게 웃으며 상념의 뒤를 그렇게 이었다. 그는 직접 왕따의 대상이 되어보았다. 때문에 차별의 원리를 잘 안다. 차이 사이에서 질서를 읽어내기. 그것은 틀림없이 차별의 기원이기도 하다. 무차별적이고 무수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 단 몇 가지 기준을 통해 무수한 다른 모든 차이를 무시하고 경계선을 지어 질서정연하게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기. 그리고 우리와 너희 사이에 있는 차이를 수평적 ‘다름’이란 판단에서, 수직적 ‘우열’이란 판단으로 전환하기.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두고, ‘거짓’과, ‘악’과, ‘추악함’을 저들에게 두기. 그로서 우리의 저들에 대한 폭력과 배제를 정당화하기.

그것을 생각하면, 인류의 웅비에서 은결은 이카루스의 신화를 연상하게 된다. 다이달로스의 미로를 벗어나, 밀랍의 날개로 태양을 향해 날다, 결국 추락하는 청년. 그 신화는 은결에게 이성이란 날개로 무차별한 카오스를 품고 있는 자연이란 다이달로스의 미궁을 벗어나는 인류를 상징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인류의 날개 역시 밀랍에 불과한가 하는 것이겠지.'

-그것이야 말로, 아버지가 패배했던-

-은결은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생각이 길어지다 보니 쓸데없는 데 까지 상념을 이은 듯하다.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이 조금 축축했다. 은결은 손바닥을 펼쳤다. 마른 대기가 습기를 앗아갔다.

‘안 좋은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은결은 우려 섞인 표정으로 다시 한 숨을 쉬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오늘 반에 온다는 그 학생이 걱정됐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일본과 한국 사이의 분위기가 별로 좋지는 않다. 한류로 통칭되는 문화적 교류를 통해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더니, 독도 건이 터지고 또 급속히 냉각됐다. 원래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려할만한 일이다.

그런 여파가 이번에 찾아온다는 그 일본 학생에게 미치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교환학생이니 별 일이 있겠는가 싶긴 해도, 여기까지 교환학생으로 왔다는 것은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실망해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일본인이 과거 일본의 악행에 대해 무관계하다고 잡아떼는 것도 추한 짓이지만, 평범한 한 명의 일본인 개인을 과거 일본의 악행에 대한 속죄양으로 삼게 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추악한 짓이다.

‘그렇게 되면... 도와줘야겠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 최선이지만. 은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교실 앞문이 열렸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더불어 교실을 떠들던 소란은 완전히 사라졌다. 곧 담임선생님이 들어와 교단에 섰다. 그는 서둘러 몇 가지 공지사항을 이야기하고선 올라 학생들을 길게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미 다들 알고 있으리라 여긴다만-”

학생들의 시선이 드물게 담임을 향해 열정적으로 집중되었다. 제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오늘 후쿠오카시 군마현의 아오조라(青空)고등학교에서 친선교류의 일환으로 교환학생이 한 명 왔다. 길지 않은 한국 생활이 되겠지만 즐거운 추억이 되도록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도록 해라.”

일동은 기세 좋게 “예!” 하고 답했다. 은결은 언제나 그렇듯 기세만 좋은 대답이 아니길 기대했다. 선생님은 열려진 교실 앞문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君、こちらに。”

(자네, 이쪽으로.)

“はい。”

(예.)

맑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소녀가 교실로 들어왔다. 정갈한 걸음걸이였다. 옆 얼굴선은 인형처럼 단정했다.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은 끝에 가까이 이르러, 흐트러지지 않게 흰 띠로 묶여 있었다. 그녀의 걸음마다 그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따라 출렁였다.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남성제군 일동은 벌써 녹아나고 있었다. 은결도 솔직하게 감탄하며 모든 것이 기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어느 정도는 슬픈 일이지만 저쯤 얼굴이 받쳐주면 일본이니 한국이니 하는 차이가 무의미하다. 여성제군 일동과는 어떨지 모르지만, 여학교가 아니니 별 문제 없을터였다.

그리고 소녀는 교단 위에 섰다. 그녀의 시선이 정면으로 반 학생들과 마주했다. 맑고, 무심한 눈동자였다.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은결은 자신의 걱정이 무의미했다고, 두 번째로 깨달았다. 그 눈동자는 자신과 같이, 그녀가 이곳을 자신의 현실로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은밀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으로 혹여 이곳에서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해도, 그녀에게 그 소외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였다.

*강호노검객님께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아니, 열심히 쓰고 있군요! 진짭니다! ^^;

*여러분의 압박에 못 이겨 신 캐릭터는 미소녀... 는 아니고, 원래 이렇게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훗.

*최근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읽어야 하나, 마나하고 빌빌대고 있습니다. 읽어야 될 책은 쌓여 있는데, 굳이 울화통을 참으면서 이 두꺼운 물건을 읽을 것인가, 생각되면 참 고민이 됩니다. 하지만 비판이든 뭐든 제대로 된 의견의 성립은 역시 한쪽 말만 듣고는 아니 되지 않겠는가! 하고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편집자는 별론데,(다방면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습니다. 사실 먹을만하죠. 서문부터 사실 확인도 제대로 안 된 정보를 기초로 한 ‘격문’이고...) 수록된 논문 자체는 좋은 것들이 몇 개 있다고 합니다. 뭐, 정히 이쪽 의견이 보고 싶으면 일본 쪽 글을 구해야 할 테지만, 한글로 된 것도 충분히 못 읽은 판국에 무슨 일어겠습니까... 다행히(?) 이 글은 이 부분에 대해 살짝 터치만 하고 넘어갈 겁니다. 논쟁적인 부분이기도 하고, 글 주제라던가 내적논리와의 조화라는 측면을 생각하면 적당한 선에서 잘라줘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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