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희망을 위한 찬가 - 변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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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이 은결의 병실을 찾아갔을 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에 메모가 한 장 남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옥상에 있습니다.’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혹여 찾아올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은결의 메시지였다. 세연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강렬한 햇살과 더불어 세연을 맞이했다.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릿결을 손으로 정리하며 옥상에 발을 내딛었다.
한길 종합병원의 옥상은 작은 정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높고 튼튼한 펜스로 둘러싸인, 허공의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 같은 공간 안은, 푸른 식물과 간단한 레저 시설로 채워져 있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수의 환자들이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공중정원의 불가사의함은 이제 책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세연은 시설과 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은결을 찾았다. 그렇게 넓은 공간은 아닌데다가 공간 자체가 폐쇄된 곳이라 그녀가 은결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벤치에 앉아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주변의 모든 것을 무화하며 한 점으로 집중해 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자신과는 존재의 층위가 다른 것 같았다. 지난번에 보았던 모습과 같았다. ‘보이지 않으셨겠지만’ 그날 은결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어디...’
관심이 동했다. 세연은 팔목에 차고 있던 장신구를 모두 빼내고선 땅위에 놓아뒀다. 자신은 특수한 체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혹시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은결을 바라봤다.
‘아-’
그녀는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장대한 빛의 흐름이 은결을 둘러싸고 있었다. 수십 개의 마법진이 같은 장소에 높이를 달리해 차곡차곡 전개되어 있었다. 그 주변을 다른 소형 진들이 휘돌고 있었다. 그 진들은 기둥 같은 빛의 띠에 의해 통합되거나 분리되었다. 그 움직임은 담백하고 질서정연했다.
거기서 빛은 하나의 고형체이자 무정형체였다. 흐르는 듯 하며 정지했고, 정지의 끝에 흘렀다. 끊어짐 없이 통합되었고, 통합됨 없이 흩어졌다. 전체 속의 개체이며, 개체 속의 전체였다. 개체는 개체로서 존재하고, 전체는 전제로서 존재했다. 모순되는 현상들이 전체 가운데 모순이 없었다. 세연의 가슴이 뛰었다. 그것이 중중무진(重重無盡)하며, 융통무애(融通無碍)하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은결은 그 거대한 빛의 탑 중앙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선연하던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은결의 시선이 세연을 향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땅바닥에 놓아뒀던 장신구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기서 뭐 하고 계세요?”
은결이 벤치에서 일어서며 세연을 맞이했다.
“아, 그러니까-”
그녀는 은결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세연의 가까이로 접근해 은결은 그녀의 손에 장신구가 쥐어져 있는 것을 봤다. 은결은 사정을 이해했다. 왜 엉덩방아라도 찧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던가 했더니, 정말로 엉덩방아를 찧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은결과 같은 이들이 기를 전력으로 전개하는 모습을 보통 사람이 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처음에는 크게 놀랄 것이다.
“보셨군요.”
“에, 예.”
은결이 쓰게 웃으며 물었다. 세연은 어색하게 긍정했다.
“수련 장면을 들키다니, 좀 창피한걸요.”
“저기, 굉장했어요.”
“그렇습니까...”
은결은 쓴웃음이 한결 짙어졌다. 그녀의 감탄에 거짓은 없겠지만, 그녀의 감탄을 자아낸 은결의 수련은 실상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내부에 잠재한 카미의 힘과 대결하기 위해 격통을 참고 전력을 다해 자신의 힘을 펼쳤지만, 그래봐야 원래 자신이 지닌 힘의 1/3을 약간 넘기는 수준에 그쳤다. 이래선 개울물로 바위를 쓸어내고자 하는 꼴이다. 원래 은결의 힘은 훨씬 더 넓은 공간을 훨씬 더 장대하고 자연스럽게 장악할 수 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극복해야 할 것의 강대함과 자신의 초라함을 선명하게 마주하고 보니 씁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은결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느끼고 세연이 물었다. 은결은 서둘러 표정을 정리했다.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호신부는 가능한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게 좋습니다.”
“주, 주의할께요.”
“아, 질책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디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가 없거든요. 방금 전에도 어떤 기색이 느껴진 때문에 수련을 중단했던 거고...”
“에?”
세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사적으로 은결 옆에 서며 그의 오른팔을 잡았다. 은결이 당혹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지금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그런가요.”
세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은결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도 붉었다. 세연은 이왕 화제가 이쪽으로 옮겨 왔으니, 어색함도 털어볼 겸 이전부터 궁금하던 것들이나 물어보자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제가 봤던 그 검은 것들은 대체 뭔가요?”
대답에 앞서 은결은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결정했다. 세연은 신의 그릇으로까지 선택되었던 여성이며, 그 육체의 순결한 특성은 여전하다. 그것이 충분히 더렵혀지기 위해서는 수년 이상 필요하다. 여기까지 발을 들여놓은 이상 차라리 충분한 지식을 쌓아놓는 쪽이 안전할 지도 모른다. 은결은 그렇게 생각해 입을 열었다.
“일종의 사념체입니다.”
“사념체라 하면?”
“사람의 생각이 무수히 모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람의 생각이 많이 모였다고 그런 것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의 발생조건은 미묘합니다. 때론 감정이고, 때론 정령이고, 때론 물질적인 것들인 경우도 있습니다. 모양도 지난번 보셨듯 부정형체인 것들부터 동물의 형상을 하는 것들까지, 다양합니다. 발생의 제일조건이 엄청나게 많은 생각의 중첩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외에는 아직 잘 모릅니다.”
“헤에, 생각의 중첩이라 하면 역시, 원한이라던가, 시기라던가, 그런 감정들이 발생하는 건가요?”
“주로 그런 것들이긴 합니다만, 그 표현은 오해를 부르기 쉽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은결이 자신의 턱을 쓸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령, 전쟁 시에는 도리어 사념체의 발생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단순한 감정의 크기가 문제라면 전쟁만큼 사람에게 압도적인 양의 감정을 이끌어내도록 하는 사건은 없겠지요. 그 감정의 종류 역시 좋지 않은 것들입니다. 간혹 전쟁시에 발생하는 사념체는 다른 때에 발생하는 사념체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합니다만, 그것은 전쟁이 이끌어내는 감정의 크기를 설명할 수 있을 뿐, 왜 사념체의 절대수 자체가 훨씬 작은가 하는 문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세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어떤 감정들이 충족되어야 하는 건가요?”
“솔직히, 저희도 잘 모릅니다. 거기에 대한 설명은 파(派)마다 약간씩 틀립니다.”
은결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서울을 향한다. 무수한 직사각형의 돌곽들이 형형의 색을 칠한 채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다. 무수한 인간이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빌딩의 매끈한 유리는 대지로 저 하늘의 태양을 끌어내릴 것을 선언하듯 눈부시다.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높이 솟아오른 빌딩의 선을 따라 상승하는 욕망. 하지만 누구의 욕망일까? 은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것이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혼합된 결과물이며, 어떤 감정의 낙차와 자기객관화의 정도, 미래의 전망에 대한 그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어쩌면 현자의 돌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이런 세계와 연이 없던 세연으로서는 알듯, 모를 듯 한, 애매한 말이었다. 하지만 세연은 은결에게 무식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들은 척을 했다. 갑자기, 은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다.
“무, 무슨 일인가요?”
“뭔가, 있습니다.”
“엣!”
세연은 은결의 등 뒤에 숨었다. 은결의 시선이 조용히 주변을 훑었다. 곧 그는 자신을 향하던 어떤 기색의 근원이 어디였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멀지 않은 곳이었다.
“헉!”
당혹스런 탄성이 은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저기, 뭔가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결은 그렇게 말했지만, 얼굴 가득히 퍼져있는 긴장을 보자면 세연은 도무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긴장하긴 했어도 별반 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는걸 봐서 위험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세연은 뭘까, 하고 고개를 빼꼼히 빼고 방금 은결의 시선이 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에?’
거기에는 한 소녀가 도끼눈을 뜨고 서 있었다. 얼마 전에 은결의 병실에서 만난 적이 있던 소녀다. 세연은 그때 도망치듯 빠져나오느라 인사를 나누지 못해,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은결의 여동생이었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많은 추천을 받았습니다. 아주 기쁩니다. 훍뷁후닭, 천유마, 야차, 설원순례자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노력해서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진짜로 바쁘긴 합니다만; 시간이 안 납니다만; 어떻게든 해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클라우스 학원 당시도 그렇고, 이 글도 그렇고 인식론적 절망이 베이스로 깔려 있는 세계관입니다. 아무도 명확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런 정답이 있는지에 대한 전망도 희미합니다. 실은 글의 주제와 관련을 가진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클라우스 쓸 때는 캐릭터들을 자주 논쟁을 시켰고, 알렉은 정답도 아닌 주제에 맨날 이김으로서 그러한 세계관을 강조하도록 했죠. 좋아하는 분들은 별로 없었지만.(흑흑)
이번도 마찬가지긴 한데, 클라우스를 거울삼아 본격적인 논쟁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 절망을 기초로 잡은 세계관은 설정에 관련해 작가가 급할 때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다는 겁니다!(뻔뻔)
*오타 지적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퇴고를 해도 수두룩하게 나오곤 하니 쩝. 그리고 댓글로 질문하신 분들에 대해 잡담에 답변이 없다면, 대게 너무 사소하다 싶거나 너무 개인적이다 싶거나, 까먹었거나 중의 하나입니다. 주로 세 번째 이유니 섭섭해 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남자의 정조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_-; <--political incorrect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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