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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9화 (29/300)
  • #   29-희망을 위한 찬가 - 변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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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경은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울화를 양 눈썹 끝에 붙이고, 그 끝에서 흘러내린 여분의 울화가 다시 양 눈꼬리에 머물러 만들어진 표정 같았다. 오늘 이번 카미에 대한 문제로 이세로 보냈던 문서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는데, 그 내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인 책임이 어쩌고 저째?”

    진경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핸들을 쥔 손으로 푸른 핏줄이 솟아올랐다. 오늘 받았던 답신의 내용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그 답신에서, 이세는 이번 푸른 이빨에 대한 일체의 직접적인 책임을 부정하고 도의적인 책임이라면서 일억엔의 돈을 보낸다고 했다.

    물론 일억엔은 큰돈이다. 이번 전투에서 부상당한 사람들 전부의 치료비와 수고비를 다 충당하고도 상당한 돈이 남는다. 그렇지만 진경은 돈을 바라고 이세에 그런 문서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그 문서에 자세한 전투의 흐름을 적어 보냈는데,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적당한 내용을 적어 보내거나 과장된 내용을 적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일제-6.25-군사독재의 3단 콤보를 얻어맞아 이제 겨우 재건에 들어간 한국과 달리 이세와 일본정부의 관계는 튼튼하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보다 재정적으로 튼튼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부터 쭉 이 일은 적어도 한, 중, 일의 동북아 삼국이 긴밀한 공조체제를 이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얼마 전의 황사도 그렇고, 이번의 카미도 그렇고 이 세계의 사건 자체가 세계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를 위해서 이세는 밉든 곱든 가장 중요한 집단의 하나였다. 때문에 진경은 이세와 신뢰를 쌓고자 했고, 신뢰의 기초는 정직이었기에, 그런 문서를 보냈다. 그런 의도를 모를리 없건만 그걸 이세에서는 싹 무시했다.

    “하물며, 귀국의 이번 처사는 유감스럽지만, 이라고?”

    그들의 무책임한 태도에 이어 진경이 화나게 하는 것은 그 답신에서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카미를 소멸시킨데 대해 이세측이 한국을 비난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정말로 소멸했는지는 진경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은결의 몸속에 잠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종류의 이야기를 집어넣었다가는 귀찮아질 가능성이 높음으로, 그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 진경은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 그에 대해 이세 측에서는 매우 불편함 심경을 내보인 것이다.

    “젠장, 그렇게 소중하면 봉신을 제대로 관리나 하던가! 이쪽은 여동생을 잃을 뻔 했건만!”

    다시 생각해봐도 열 받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개자식들! 이라 한 마디 해주고 싹 무시하고 싶었지만,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그렇게는 또 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위에 구멍이 뚫릴 지경이었다.

    “젠장...”

    탄식 같은 욕설을 흘리며 진경은 차를 세웠다. 주변에는 고급 주택이 즐비했다. 그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 오빠 이제 돌아와?”

    차 밖으로 나온 그를 맞이하는 밝은 목소리가 있었다. 진경을 고개를 돌렸다. 막 대문에서 빠져나오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방금 전 진경의 혼잣말에 화제로 올랐던 세연이다. 진경은 여전히 마뜩찮은 표정을 하며 물었다.

    “또, 그 꼬맹이 만나러 가는 거야?”

    세연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오, 오늘은 아냐.”

    “오늘은? 그럼, 내일은 간단 말이냐?”

    그녀의 양 볼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래도 ‘역시나’였던 모양이다. 진경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서라. 그 녀석은 너완 사는 세계가 달라.”

    “그, 그런 거 아냐! 두 번이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데, 이 정도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런 게 뭔데?’하고 푹 찔러주고 싶어지는 대답이다. 진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사례금으로 한 일억쯤 그 녀석한테 전할 테니 그만 가는 건 어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실제로 이번에는 은결네에 상당한 거액이 지불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전에는 은결이 길바닥을 워낙 부숴 먹은데다 그것 때문에 뉴스에 나기도 해서 벌금의 의미도 함께해 보수가 거의 지급되지 않았지만 이번은 경우가 틀렸다. 만개산 정상 한쪽이 무너지긴 했지만 발자국만 자연스럽도록 처리하고 나니 산사태라는 말로 간단히 무마됐다. 물론 그 돈을 은결이 관리할리는 없다. 사실 은결은 이런 제도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

    “오빠!”

    세연이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 그녀는 배금주의를 혐오한다. 어느 정도는 부르주아지의 여유지만 그것만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매달 용돈 기록부를 작성하며, 소박하게 천원, 이천원에 쩔쩔맨다. 돈에 대해 소탈한 것은 그녀 개인의 성격과 집안 교육으로 인한 것이다.

    “아,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흥!”

    진경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세연은 더 듣기 싫다는 듯이 외치고는 발걸음을 빨리 해 얼른 진경을 스쳐지나갔다. 멀어져가는 여동생의 등을 바라보며 진경은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안팎으로 문제가 많았다. 진경은 멀지 않은 미래에 자신의 위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오늘은 민성과 동물원 삼총사가 은결을 찾아왔다. 그들은 은결이 전세내고 있는 병실에 들어오더니 놀란 표정을 하며 한 마디씩 했다. 그 내용은 주로 이 병실이 우리 집 보다 좋다, 라던가, 은결을 전에 없이 아주 친근한 눈길로 바라보며 앞으로 돈독한 우정을 쌓아나가자든가, 하는 종류의 계급적 발언(?)이었다. 우리의 혁명전사 민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여간 웬 일로 찾아온다 했더니 오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이 속물들아. 이 병실은 그저 우리 아버지와 아는 분이 병원 관계자라서 편의를 얻은 것뿐이야.”

    은결은 피식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민성은 근처 의자에 엉덩이를 올리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감전 때문에 입원이라니, 그 소리 들었을 땐 솔직히 놀랐다.”

    “그러게. 안 죽은 게 천만 다행이지.”

    고릴라가 어느 사인가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으로는 먹어도 좋다고 한 적도 없는데 세연이 사왔던 과일이 들려져 있었다. 살펴보자니 고릴라뿐만이 아니고 다른 녀석들도 다 그랬다. 하여간 대범한 녀석들이다. 은결은 감탄하며 민성의 물음에 답했다.

    “...나도 죽는 줄 알았어.”

    그건 사실이다. 카미를 맨손으로 잡을 당시 은결은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정황을 생각하면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비정상적이다. 은결의 표정과 말이 진지해서 민성을 비롯한 친구들은 더 이상 장난어린 말을 할 수 없었다. 생명이란 가치 앞에서 가벼이 농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세상에 찌들지 않았다. 은결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분위기를 쇄신시키고자 말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뭔가 특기할만한 일이도 있어?

    그에 고릴라가 진중한 얼굴로 선언하듯 말했다.

    “다다음 주에 시험이 있지.”

    주변의 반응이 한방에 가라앉았다. 방금 전 은결이 심각하게 자신의 생명이 위험했다고 말했을 때보다 한결 더하다. 은결은 모욕을 느끼기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모의고사야 모의고사라지만 이쪽은 얄짤없이 성적에 반영되는 진검승부다. 자본에 좋은 조건으로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해 필요한 브랜드 꼬리표를 얻어내기 위한 중요한 분기점이니까. 노동자는 그 노동력을 팔 수 있는 한에서만 존재하고, 또한 생존할 수 있다. 그럼으로 노동력의 브랜드는 어느 정도 생존의 문제다. 그때 민성이 벌떡 일어서더니 은결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에이,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한 그 여유 넘치는 얼굴은 뭐야! 사실은 니놈이 제일 위험하잖아! 감전인지 뭔지 때문에 다음 주까지 학교에 나오지도 못한다며!”

    은결은 해탈한 부처의 미소를 선보이며 말했다.

    “걱정마. 너보다는 잘 나올 거다.”

    민성은 침몰했다. 은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그런 슬픈 사항 말고 다른 건 없어?”

    “쩝, 암울한 고등학교 시절에 그 외에 특별히 기록할만한 사항이 달리 뭐가 있겠냐. 있다면 빨간 날이 언젠지하고 방학까지 남은 날자 계산하는 정도지.”

    고릴라가 유감천만이라는 얼굴로 말했다. 그때 옆에서 여우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늘 아침 조회 시간에 선생님이 우리 반에 새로 학생이 한 명 올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 그랬나?”

    떨떠름한 얼굴로 고릴라가 말했다. 늑대가 피식 웃으며 “또 잤구만.”하고 예리한 현실통찰력을 선보였다. 은결은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여우가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더니 리듬감 있게 흔들며 그에 맞춰 “쯧쯧쯧”하는 소리를 냈다. ‘매우’ 안 어울렸다. 하지만 본인은 별로 신경 안 쓰고 말을 이었다.

    “그럴까? 하지만 무려 외국인! 이란 말야!”

    “오오!”

    은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확실히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라면 특기할만하다. 여우는 뿌듯하게 계속 말했다.

    “으음, 자매결연 맺은 학교에서 교환학생이 온다나 어쨌다나?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온대. 아마 시험 끝나고 나면 곧 이었던 거 같은데. 그 외에는 별로 밝혀진 바가 없고.”

    “헤-”

    일본은 솔직히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나라였다. 당장 자신이 이 병실에 누워 있는 것만 해도 일본과 관계가 있다. 한 명의 국민이 그 국가를 대표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한 국가의 국민이 외국인들 사이에 끼이게 되면 그는 자연스럽게 자국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대표성을 띄게 된다. 그것이 시시껄렁한 연접관계에서 비롯되는, 섣부른 일반화의 위험도가 지극히 높은 연상 작용이라는 정도는 은결도 잘 알지만, 그래도 일본, 일본인이라는 점에 호기심은 동했다.

    ‘동해봐야 뭘 어쩌겠나마는. 하여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괜히 왕따나 안 당하길 기원해 줘야지.’

    연상의 끝에 은결이 그렇게 결론짓고 피식, 자조적으로 웃을 때, 침몰했던 민성이 뭔가를 깜빡 잊었다는 듯이 “아!” 하며 벌떡 일어나더니, 근처에 내려놨던 가방을 뒤졌다. 은결이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뭐 하냐?”

    “네 병문안 선물을 사왔는데, 아직 안 줬잖아.”

    “이야, 네가 그런 기특한 일도 다 하는구나.”

    은결이 감탄하며 주변의 다른 이들을 살폈다. 모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거나 시선을 돌렸다. 성의가 없는 녀석들이다. 은결은 ‘쯧쯧’하고 혀를 찼다. 그때 민성이 말했다.

    “자!”

    은결이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민성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은결에게 ‘컨디션’을 넘겼다. 건강관련 음료니 병자에게 선물하기에 안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참 미묘한 선물이었다. 은결도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마워.” 하고 사의(謝儀)를 표했다. 민성은 환하게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고맙긴. 네가 컨디션에 ‘한’이 맺힌 것 같아서 이렇게 사왔지. 자자, 쭈욱- 들이키고, 그 ‘한’도 같이 좀 쓸어가라.”

    ‘한’이라는 단어가 무척 강조되어 있었다. 은결은, 컨디션 병을 민성 이마에 던져버리는 게 어떨까, 하는 유혹에 꽤 강하게 시달렸다.

    *하늘나레님이 거창한 추천을 해 주셨습니다.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앞으로 한 동안은 시간내기가 좀 힘들 것 같지만, 열심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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