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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28화 (28/300)

#   28-희망을 위한 찬가 - 변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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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병실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바닥에 있는 모든 땀구멍의 위치를 외우기라도 할 것 같은 집중된 시선이었다. 곧, 그의 손바닥으로 빛의 원이 떠올랐다. 자그마한 진이다. 그것은 작게 회전했다. 곧, 웅- 하며 원의 외곽이 확장되었고, 은결의 손바닥을 넘어가는 더 큰 진이 떠올랐다. 그 진은 앞선 진의 반대로 회전했다.

다시, 그 진의 외곽으로 나무뿌리 같은 기호의 집합이 이 발생하며 더 큰 진으로 확장됐다. 이어 공중으로 크고 작은 진이 여러 개 발생하며 별들의 운행을 닮은 맞물림과 리듬을 가진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휘황한 빛과 에너지의 군무였다. 은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펼쳐지는 에너지의 흐름을 좀 더 확장시켰다.

웅- 나무뿌리 같이 기호가 뻗어나며, 더 큰 원을 형성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은결의 손아귀에서 선명한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그 진이 고장난 텔레비전의 화면 같은 지직거림을 보이더니 흐려졌다. 은결의 표정도 한순간 바늘에 찔린 것 같은 고통의 흔적을 보였다. 그의 손에서 형성되었던 진이 모두 빛의 가루가 되며 사라졌다.

“후우...”

은결은 한숨을 쉬었다. 기가 원활하게 유통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은결의 병실에 있었다. 수행은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은결의 두 손을 꼭 잡고, 진지한 얼굴로 ‘은결아, 어서 몸 건강히 돌아와 미래를 말려다오!’하는 말을 함으로서 은결을 당혹스럽게 했고, 옆에서 할아버지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주된 화제는 그쪽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세 사람이 나눈 대화의 주된 내용은 은결의 몸속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이야기를 듣고 은결은 크게 놀랐다. 자신의 내부에 이질적인 힘이 잠재해 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로 온전한 카미의 힘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해체되어 나가던 힘의 조각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예측에 따르면 카미가 지니던 힘의 적어도 구할 이상이 은결의 내부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 했다. 어쩌면 카미의 영적 본질 역시 은결의 내부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사실상 카미를 흡수한 것이다.

두 사람이 떠난 다음, 은결은 기의 유통을 시험해 봤다. 일정량의 힘을 넘기자 도로의 곳곳에 거대한 바위가 자리해 소통을 막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은 극히 이질적인, 카미의 힘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힘들을 밀어낼 수 없었다. 힘의 양도 문제지만, 질적으로도 차이가 너무 심했다.

기의 유통이 적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일정 수준을 넘기면 문제가 심각했다. 더구나 기혈이 균등하게 억제되어 있다면 그걸 계산해서 기를 유통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간단히 말해, 은결의 힘은 카미와 싸울 때 당시의 1/3이하로 제약되어 있다.

스스로의 부족함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절실하게, 정말로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다. 이런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다할 좋은 방법이 없었다.

이 힘에서 해방되기 위해 은결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그 힘을 외부로 모두 몰아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예 흡수하는 것이다. 첫 번째나 두 번째나 은결이 운용하는 기와 그 질적 차이가 심해 사용하기 어려웠다. 현격한 신격을 지닌 힘인데다 그 크기 역시 은결의 힘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했다.

다른 방법으로 카미의 영적 본질이 은결의 내부에 깃든 자신의 힘을 규합해 외부로 빠져나오는 것이 있지만, 그것은 카미의 완연한 부활을 의미한다. 은결로서는 죽으면 죽었지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을 풀기 위해서는 가장 속성인 방법을 택해도 십수년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에게는, 도무지, 그런, 여유가, 없었다. 답답하고, 초조했다.

“젠장!”

은결은 침대 바닥으로 주먹으로 내려쳤다. 퍼억! 하는, 그의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소리가 났다. 조금만 더 힘을 줬으면 침대가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아...!”

조금 겁먹은 듯이 놀란 목소리가 은결의 병실 문에서 났다. 은결은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문을 살짝 열고 있던 세연이 겁먹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우연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은결은 서둘러 변명했다. 뭘 사과해야 하는지는 스스로도 모르겠다 싶었지만, 그녀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연은 여전히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조금 느린 표정으로 천천히 병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이번에도 과일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지난번 그녀가 사온 과일 바구니도 실은 다 먹지 못했다.

“저, 무슨 일 있으세요?”

조신하게 근처의 의자에 앉은 세연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은결에게 물었다. 은결은 쓴 미소를 보이며, 그러나 평화로움을 가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조금 초조할 뿐입니다.”

“초조, 요?”

“예. 초조합니다.”

“혹, 방금 전까지 손바닥을 쭉 쳐다보시던 것과 관련이 있나요?”

“아, 보고 계셨습니까? 그럼 왜 들어오시지 않고.”

은결은 조금 놀란 표정을 보였다. ‘하필이면 그 장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그건-”

세연이 바로 답변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은결은 그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여간 지적하신 대로입니다. 보이지 않으셨겠지만 실은 기를 운용해 진을 구현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잘 따라주질 않네요. 굳이 비유하자면 내일 당장 시험인데 하나도 공부를 해놓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은결의 비유에 세연이 조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작게 손바닥을 부딪쳤다.

“아, 그 기분 저도 알 것 같아요. 지난번 모의고사 전날도 비슷한 기분이었거든요.”

평화로운 비유에 평화로운 공감이었다. 은결은, 멀기에 그리운, 고향의 정경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세계는 은결 역시 공유하고 있지만, 그가 그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였던 적은 거의 없었던 때문이다. 은결의 입가로 조용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러십니까.”

은결의 부드러운 시선을 받은 세연이 갑자기 고개를 확 숙이더니 그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뭐가요?”

도리어 은결이 당혹스러웠다. 세연이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저기- 위험한 일 하시느라 초조하신 건데, 기껏 시험 같은 걸로 그 기분을 안다고 한 거, 혹시 불쾌하시지나 않으셨을지-”

은결은 다소 쓰게 웃었다.

“아니요. 도리어 기뻤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감정은 주관적인 것인데, 객관적인 것을 들이대 주관적인 것을 억압하려 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되기 쉽겠지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제3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에 비하면 객관적인 상황은 대단히 좋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이들의 주관적인 고통을, 그들의 객관적인 상황에 대비시켜 모두 한심한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고 말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런게 유효한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특별히 나쁜 의도로 한 말도 아닌 데서야. 저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시군요... 저, 그럼 한 마디 더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저, 너무 초조해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예?”

그녀의 말에 은결은 가슴 한 구석이, 푸욱, 찔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희노애락, 그 무엇도 일구지 않지만, 지워지기 힘든 선명함을 남길, 그런 상흔. 세연은 말을 이었다.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딘가에 쫒기고 계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하시는 일이 일이니만큼 바쁜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왕 병원에 누워 계시는데, 지금만이라도 마음 편히 쉬시는 게 어떨까 하고...”

“그렇습니까...”

“저, 주제넘었나요?”

아주 조심스러운, 일견 겁먹은 듯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세연이 은결에게 물었다. 은결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고마운 충고였습니다.”

“다행이네요. 혹시 불쾌해 하시면 어쩌나 하고 좀 걱정하고 있었는데.”

세연은 활짝 웃었다. 피어난 꽃망울의 그윽한 향기 같은 목소리였다. 은결은 심술맞게 웃으며 응대했다.

“아, 저를 선의의 충고조차 악의로 받아들여 삐질 옹졸한 인간으로 봤단 말입니까. 그거, 유감스러운데요.”

“아, 아뇨!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세연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양새가 우스워서 은결은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웃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너무 그렇게 당황하지 마세요.”

은결의 말에 세연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삐진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표정을 풀고,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봤다.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각인 모양이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발걸음을 떼기에 앞서 은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 폐가 되지 않는다면 다시 찾아와도 괜찮을까요?”

“그야 물론입니다. 되레 제가 감사히 여겨야 하겠지요.”

“그, 그럼.”

긍정적인 은결의 대답에 다시금 환한 미소를 보이고, 세연은 은결의 병실을 나섰다.

고요가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은결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제약된 자신이 느껴졌다. 다급함에 가슴이 뛰었다. ‘너무 초조해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세연의 목소리가 뇌리 가운데서 떠올랐다. 은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말은 옳았고, 그녀의 선의는 고마웠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기에는, 초조해 하지 않기에는, 역시 자신은 미숙했고, 세상은 악의로 충만했다.

“후-”

은결은 심호흡을 했다. 뛰던 가슴이 조금 진정됐다. 그래도, 그녀의 충고 덕분인지, 이 병실의 시간과 공간이 조금은 살갑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다량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아주 기쁩니다. 불행은 겹쳐오는 모양인지라, 신변에 안 좋은 일만 생기다가, 어제 아침에는 MP3플레이어가 갑자기 맛이 가는 사태까지 겹쳐 저를 좌절상태로 몰아갔었는데,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추천해 주신 아란설님과 우리지마, 미친남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꾸벅) 좋은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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