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0화 (20/300)

#   20-희망을 위한 찬가 - 아오이키바(い牙)(4)

#

점심이 되어서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드물게 천둥번개가 내려쳤다.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은결이 식사를 끝마치고 쉬고 있자니 교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집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할아버지의 전화였다. 집으로 어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직접적인 말은 없었지만 영적존재에 관련한 연락임은 분명했다. 은결은 선생님께 조퇴신고를 했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학교 밖으로 나와 바닥을 박찼다. 은결의 발이 비에 젖은 운동장의 흙 위에 신발자국을 내기에 앞서, 그의 발치로부터 진법이 일렁이며 순식간에 역장의 도약대를 형성했고, 막대한 반동 에너지를 타고 은결의 몸은 까마득한 허공으로 치솟았다.

최면으로 주변의 눈을 속인다고는 하지만, 지난번 만났던 세연이라는 아가씨처럼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를 비롯한 여러 이유 때문에 가급적 낮에는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나 상황이 급하다면 어쩔 수 없다. 은결이 이 방법을 사용하면 바퀴달린 대부분의 운송수단을 압도하는 속력을 낼 수 있다. 그의 발밑에서 세상은 한 줄기 거짓말처럼 무의미하게 흘렀다. 빗방울과 대기의 장막을 뚫고 은결이 집에 도착했을 때, 대문 옆에는 지난번에도 보았던 차가 주차해 있었다. 세연의 오빠라는 사람이 집에 와 있는 듯싶었다.

내가 전화 받은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은결은 기를 운용해 옷을 말리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할아버지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지난번 만났던 진경이라는 사람이 침중한 안색으로 정좌해 앉아 있었고, 은결의 아버지 수행도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한 소녀가 괴로운 얼굴로 누워 있었다.

“앗!”

은결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가운데 괴로운 얼굴로 누워있는 소녀는 세연이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신열이다.”

할아버지가 답했다. 은결은 순식간에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새파란 얼굴을 하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강신(降神)...! 그녀의 체질이 드물게 깨끗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바다 건너의 신을 유혹할 정도이진 않을 텐데요?”

“나도 그 점이 의문이라 여러 번 검사해 봤다. 세연 양은 틀림없이 강신을 위한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 있구나.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지금 그녀의 몸은 막 태어난 아기처럼 깨끗하다는 점이지. 곡기를 끊고 수행만을 하며 살아온 인간의 몸인 마냥. 이렇게 되면 신이 끌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결국, 그녀의 체질이 신을 불러들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카미가 이곳으로 오려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은결의 할아버지가 지적했듯, 세연이 카미를 끌어들일만한 체질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은 범용한 체질의 인간에게 신이 빙의한다는 현상 보다 더 설명하기 곤란하다. 사치스럽고 결벽스런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에서라면 누추한 오두막에서 잠을 잘 수 있겠지만 그 오두막이 하루아침에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체질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습니까?”

답은 묻는 은결도 잘 알고 있다. 현자의 돌이라도 개입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수행의 의미가 없다.

“나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그녀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종류의 아주 특별한 인간인지도 모르지.”

“호신부는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그녀에게 건내 줬던 것까지 생각하면 그녀를 감추는 영적자장은 최소한 이중입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체질을 간파하는 것은 숭앙의 대상이 아닌 이상 아무리 카미라 해도...”

은결의 질문은 끊어질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도 많이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일반적인 사념체나 악령 따위가 아니라 무려 ‘카미’다. 적게나마 자연 그 자체의 본질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존재- 세상에 편재한 신성(神性)의 한 현현이다. 그것을 앞에 두고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나도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진 못하구나. 직접 가서 그녀의 기혈을 짚어 보거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버지 옆에 정좌했다. 수행은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은결의 손길은 세연의 목덜미로 향했다. 그의 검지와 중지가 뇌와 육체를 잇는 신경 집결점을 세심하게 읽었다. 무수한 기의 흐름이 지문의 틈 하나하나에까지 박히며 읽혔다. 은결의 표정이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눈을 뜬 은결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달리 형용할 말이 없었다. 주변의 모든 기가 그녀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녀의 내부에서는 그 기의 흐름이 아무런 장애 없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녀를 그녀로서 기능하게 하는 모든 개체적인 특징을 잠재우고, 압도적인 힘으로 그녀를 잠식했다. 드넓은 숲의 나무도, 풀도, 강물도, 바다도, 지금의 세연 보다는 자연에 가까운 존재가 아니다. 이미 그녀는 한 인간이라기보다 신을 위한 그릇에 가까웠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최면이 통하지 않는 민감한 체질의 소유자이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 이상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신을 위해 그 몸을 바치기 위해 준비해온 순결한 무녀와 같은 육체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은결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가 있었다. 이대로 강신이 완료되면 세연은 ‘사라진다.’

지금의 세연은 가장 순결한 무녀보다도 순결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개체적인 모든 특성이 죽어 있었고, 자아의 편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깨끗한 기의 그릇과 같다. 거기 강대한 신의 자아가 들어온다면 세연 그녀 본인의 자아가 남아날 도리가 없다. 신체강탈. 빙의(憑依)따위가 아니다. 이것은 가장 완벽한 인신공양이다.

‘그리고, 푸른 이빨은 인간을 증오하지.’

은결은 이를 물었다. 인간의 육체를 얻어 세상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신적 존재의 폐혜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릇 상태의 세연의 내부를 떠돌고 있는 기의 흐름만 해도 오싹할 정도다. 그런데 본체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때 은결의 아버지가 눈을 떴다. 그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진경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표정을 풀지 않고 수행이 답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는 나 역시 알지 못하네. 하지만, 막아야 하겠지.”

그리고 수행은 세연의 교복 윗도리와 블라우스를 벗겼다. 열기에 상기되어 있는 하얀 그녀의 속살이 드러났다. 브라자에 감춰진 그녀의 가슴은 소담스럽게 솟아올라 있었다. 은결은 긴급시라는 것도 잊고 창피함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어 수행은 매직을 쥐고 그녀의 배꼽을 중심으로 무언가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 선이 이어지고 이어지며 금세 질서정연한 기호의 집합이 이루어졌다. 약식의 마법진이었다.

“은결아.”

“아, 예.”

시선을 돌리고 있던 은결은 아버지의 부름에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진의 중앙에 손을 대고 네 기를 유통시켜라.”

“아, 제가-”

진경이 나섰다. 은결이 한다는 것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오라비로서 당연한 처사다. 하지만 수행이 나서서 말렸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생각하는지는 알겠네만, 은결의 기가 내 진과 가장 상성이 잘 맞기 때문이니 걱정 말고 맡기게.”

진경은 머쓱하니 뒤로 물러났다. 다시 수행의 눈길이 은결을 향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이 그려진 세연의 배에 손을 댔다.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감쌌지만 은결의 수양은 낮지 않다. 그는 흔들림 없이 아버지의 지시처럼 기를 유통시켰다. 손바닥에서 빨려나가는 기의 흐름의 완전한 이어짐에 은결은 약한 황홀감을 느꼈다.

완벽한 진이 기를 빨아들여 그것으로 이루는 힘의 흐름은 예술적인 측면을 지닌다. 진을 구성하는 모든 기호와 법칙을 통달하고 그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수준이다. 은결은 새삼 아버지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배 위에 그려진 진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진이 발동한 것이다. 괴로움에 젖어 있던 세연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주변 기의 흐름으로부터 그녀를 단절시켰네. 이것으로 어느 정도 시간을 벌겠지.”

수행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진경이 물었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진행된 강신을 막는다는 것은, ‘카미코로시(神殺し-신 죽이기)’와 동등한 일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상대가 ‘카미(神)’인 이상 당연하다. 수행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팔년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군.”

*쩝. 쉽지가 않습니다.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