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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위한 찬가-19화 (19/300)

#   19-희망을 위한 찬가 - 아오이키바(い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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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끝낸 뒤 설거지를 하고 은결은 아버지의 방으로 갔다. 산화되어 가는 책 내음으로 가득한 방은 어딘가의 시간을 뚝 떼어내어 고요하게 숙성시키고 있는 것 같다. 앎이 시간과 더불어 오랜 시간 쌓여 마침내 완성된 숭고함의 편린이 떠도는 대기.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은결의 아버지는, 은결이 방으로 들어오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은결도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미래는?”

“방에요. 오늘 성적이 잘 나와 기분이 좋은 모양인데요. 하기야, 저도 깜짝 놀랐을 정도인걸요. 본인은 오죽할까요.”

“지난주에는 내도록 표정이 좋지 않더니.”

수행은 피식 웃었다.

“아, 그게, 그럴 일이 조금 있었어요. 제 탓도... 조금은 있죠.”

은결이 머쓱하게 말했다. 수행은 고요한 미소를 되돌렸다. 그는 이렇다할 정성을 보여준 적도 없는데 두 자식이 이렇게 대견하게 커 준 것에 대해 큰 고마움을 품고 있었다.

“앞으로도 잘 돌봐 주거라. 엄마가 없는 탓인지, 미래가 네게 많이 기대고 있구나.”

약간 머뭇거리는 어조로 수행이 말했다. 그는 두 자식 중에서도 특히 은결에 대해 미안함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은결의 답은 간결했다. 아버지의 부탁이 새삼스럽다고 되돌리는 것 같은 단촐함이었다. 수행은 은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던 방안의 분위기가 서서히 경직됐다.

“그래, 무슨 일로 네게 할 말이 있는 것인지 알겠느냐?”

은결의 아버지는 말의 서두를 그렇게 시작했다.

“도원 스님이 오늘 찾아오신 것과 연관이 있겠지요.”

“그래. 네가 생각한 대로다. 이번에 ‘이세(伊勢)’에서 연락이 왔구나.”

“에? 이세라면... 일본의 이세 신궁을 말하시는 겁니까?”

수행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곳에서 엊그제 우리네와 중국을 향해 긴급한 연락을 보냈다. 도원 스님이 오늘 여기 들린 것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단다. 듣자니, ‘푸른 이빨(青い牙)’의 봉인이 풀렸음으로 각별해 주의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더구나.”

“푸른... 이빨? 정령입니까?”

“그보다 질이 나쁘다. 봉신(封神)의 잔재다.”

은결의 표정이 한 순간에 굳었다. 그는 안정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엄지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카미(神)’라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카미’는 ‘신’으로 번역되지만 실재적인 의미에 있어 한국어의 신과는 상당한 의미차이를 가진다. 무엇보다, 일본의 ‘카미’가 한국어의 ‘신’이 함의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에 대한 칭호로 쓰이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존재이든 ‘카미’로 분류될 정도라면 인간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영적존재를 통틀어 최고위일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을 능가하는 전투력을 지닌 존재는 극히 예외적이고, 한국에서도 지난 십년을 통틀어 한 번 등장했던 적이 있을 뿐이다. 저도 모르게 은결이 손톱을 물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라. 아무도 네게 그런 강대한 존재를 혼자 처리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아직 한중일 삼국 중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네게 부탁하고 싶은 건 주변에 대한 경계를 한결 세심히 해 두라는 정도겠구나.”

은결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긴장을 눈치 채고 수행이 말했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엄지손톱을 물어뜯는 행위는 여전히 그만두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푸른 이빨이라면, 어떤 종류의 카미입니까?”

“듣자니 고대에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사악한 신을 유랑하던 검사가 봉인 했던 모양이다. 정확한 특성은 아는 바가 없지만 이빨이 이름에 붙은 것을 보자면 물리공격에 능숙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구나. 그리고 사악했던 건지, 단순히 영토를 지키려 들었던 것인지는 그 지역의 전승문헌을 살펴야 하겠지만, 성급한 성격이라는 것만큼은 별다른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싶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인간에 대한 원한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한데 봉신이 풀려 일본 내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보다 봉신이 풀리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봉신, 혹은 악령에 대한 봉인의 처리는 그 나라에서 제마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다. 이세는 일본의 세계대전 패배 이후에 찾아온 극심한 혼란기에도 이 작업에 허점을 드러낸 일이 없었다.

“글쎄다... 그 점은 이세 쪽에서도 함구하고 있구나.”

수행은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경로든지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치부를 외부로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같다.

“그리고, 별로 생각하고 싶진 않다만,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나도 참여하기로 했다.”

“예?!”

은결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8년 전 쓰러진 이후로 은결의 아버지는 전투는커녕 일상적인 거동에도 큰 불편을 느낄 만큼 허약한 몸이 되었다. 은결로서는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하거라. 도천시에 그런 카미의 이목을 끌만한 기의 흐름이나 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내가 전투에는 참여하는 일은 없을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기껏해야 진을 그리는 작업을 하는 정도일 테니.”

“그, 그래도-”

“사실은 도리어 그런 일이 생기고 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네게도 오랜만에 자랑스런 아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

은결의 이어질 말을 막으며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수행의 얼굴로 걸려 있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어딘가 슬픈 미소였다. 어린 자식에게 무거운 짐을 떠맡긴데 대한 회한은 짙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어렵사리 담은, 그런 미소. 그것을 바라보는 은결의 얼굴은 어둡게 굳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왜 그러느냐?”

“...제게 있어, 아버지는 언제나 자랑스러운 아버지입니다.”

일억장의 철벽을 한 줄로 늘어세운 굴강한 단호함을 담은 목소리로 은결은 선언했다.

“...고맙다.”

은결의 아버지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그 미소에는 방금 전과 같은 쓸쓸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어제 밤부터 오고 있던 모양이었다. 미래와 은결은 자전거 등교를 그만두고 별 수 없이 우산을 쓰고 함께 등교하게 됐다. 구름 아래 세상은 회색빛으로 젖어 있었다. 우르르- 먼 곳에서 구름이 울었다. 은결은 발걸음을 멈추고 우산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상을 적시는 회색빛과 같은 회색빛 구름으로 틈 없이 메워져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뭐해?”

갑자기 걸음을 멈춘 은결을 향해 미래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은결은 고개를 젓고 다시 걸었다. 이상하게 친밀한 기운이 느껴진 것 같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도천시에 자기 일가 이외에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설혹 있다 해도 기의 운용이 이질적인 은결 일가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할 만한 기의 소유자란 생각하기 어려웠다. 미래는 잠시 기다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학교에 도착한 세연은 얼른 자신의 자리에 앉아 쓰러지듯 상체를 책상 위에 누였다. 오늘 아침, 아니 어제 밤부터다. 가슴 속이 못 견디게 뜨거웠다. 이유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속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는 것 같다고 할까, 혹은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은 이물질이 덜덜 떨리며 속을 헤집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그녀의 전신을 헤집고 있었다.

“후... 하...”

길게 숨을 쉬며 세연은 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나 점심때까지 버텨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조퇴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저녁 가슴이 아릿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장악하고 있는 이 이질적인 고통은 일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강해졌을 뿐, 완화된 적이 없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오른 손으로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문질렀다. 얼마 전 은결에게서 받은 바로 그 호신부다. 은결의 말은 거짓이 아니어서, 그 팔찌를 하고 난 뒤 세연은 매일을 한결 상쾌하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효능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아픔은 저물지 않았다.

*요즘 연재가 빠릅니다.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습니다. 연료없이 달리는 기분이랄까요. 일종의 자포자기일지도? 그러니 응원을 합시다~

*은결의 성적은 문제는 나중에 왜 그런지 드러나겠죠.

*신도 관련 내용이 나왔으니 불교와 신도가 일본에서 어떻게 융합했는지, 라던가 훗코 신도라던가, 뭐 그런 정돈 다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깊게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지적하고 넘어가는 정도만.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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