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8화 (18/300)

#   18-희망을 위한 찬가 - 아오이키바(い牙)(2)

#

점심시간에 앞서 모의고사 성적이 발표됐다. 전교는 일대 소동에 휩싸였다. 주로 점수 비교한다고 밥도 안 먹고 설치는 덕분이다. 은결의 반도 예외가 아니다.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싸돌아다니며 서로의 점수를 비교하고 있다. 은결은 무관심하게 책을 읽고 있었지만 결국 말려들게 됐다. 민성이 찾아와서 비교해 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뭐... 상관없겠지.”

은결은 순순히 자신의 모의고사 성적표를 내밀었다. 성적표에는 각 과목 성적의 전국 백분율과 전체 평균의 전국 백분율이 상세한 등수와 함께 나와 있었다. 민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은결에게 깨진 모양이다.

“흥. 자본의 충실한 노예로서의 자격 증명 따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에겐 어쨌든 상관없는 거야.”

“아, 그러세요.”

은결이 피식 웃으며 민성의 말을 맞받았다. 그때 두 사람 사이를 동물원 삼총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지난 일 이후로 은결, 그리고 민성과 약간 서먹하긴 해도 가끔씩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민성은 그 중 고릴라의 어깨를 턱, 잡더니 성적표를 비교해보자고 강요했다.

‘자본의 노예가 어쩌고 저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은결의 단촐하고도 진솔한 감상이다. 고릴라는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공부를 어차피 자신의 장점으로 삼은 적은 없었기에 성적이 나빠도 별로 쪽팔리지 않았다. 그는 성적표를 내밀었다. 민성은 얼른 비교하고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말했다.

“푸하하. 그러니 니가 고릴라지!”

고릴라의 쌍심지가 올라갔다. 성적 나쁜 걸 별 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별개로 그것 때문에 조롱당하면 열 받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는 여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 안다는 듯이 여우가 성적표를 내밀었다. 민결은 얼른 비교했다. 그의 표정은 차분해졌고, 냉소로 이어졌다. 여우는 설마, 하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건달 무리에 끼여 있긴 해도 여우는 기본적으로 우등생 급의 성적을 내고 있다.

“후, 여기도 자신이 뛰어난 노예임을 증명하는 서류 한 장 가졌다고 기뻐하는 바보가 있군. 슬픈 현실이라니까.”

이어진 민성의 대답에 은결과 동물원 삼총사의 눈길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네 사람은 눈길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음과 한심함이 절반씩 잘 버무려 만들어낸 네 사람의 눈빛이 민성을 향했다. 물론 본인은 신경 안 쓰고 가슴을 펴고 있었다. 은결은 민성의 어깨를 툭툭 쳤다. 민성은 뻐기는 얼굴로 은결을 돌아봤다.

“혹시, 아Q 장전 읽어봤냐?”

“이름은 알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했어.”

“언제 한 번 읽어봐라. 주인공이 너 같은 혁명전사거든.”

은결이 말했다. 너무나 환한 표정이라 주변이 함께 반짝이는 것 같았다. 민성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교실 뒷문 쪽에서 “오빠-!”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대의 시선이 그 쪽으로 집중됐다. 그곳에는 긴 생머리를 찰랑이며 손을 흔드는 소녀가 있었다. 교복이 잘 어울리는 앳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고릴라의 표정이 전자레인지에 3분 데운 인절미처럼 무너졌다. 민성은 자기도 모르게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말이야 많이 들었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을 명불허전보다 신뢰하던 민성에게는 상당한 충격이다. 은결은 떨떠름한 인상을 지으며 미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래는 총총 걸음으로 다가와 두 팔로 은결의 목을 감싸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은결은 당황하며 그녀를 말렸다.

“미래야, 사람들도 많은데-”

“뭐 어때, 동생인데, 그보다, 이번 시험에 동생 성적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까놓고 말해서,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미래는 아빠를 닮은 덕분인지 혹은 책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커온 덕분인지 성적이 나빴던 적이 없다.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왔으니 전국 단위의 시험을 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래봐야 그 나물에 그 밥 아니겠는가. 하물며 이렇게 달라붙어 자랑하려 든다면 결과야 불을 보듯 뻔하니 더욱 궁금하지 않은 법이다.

“구, 궁금해.”

하지만 처세의 기본은 능숙하게 속내를 감추는데 있다. 당장 지난주 까지만 해도 삐져 있던 동생이 상대라면 더욱 그러하다. 미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짠- 하고 성적표를 은결에게 내밀었다. 은결의 것과 같은 구성의 성적표는 은결보다 훨씬 높은 곳에 그래프를 그리며 그녀의 성적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성적은 전국을 따져 상위 0.3%이내였다.

뒤에서 그녀의 성적을 구경하던 민성과 동물원 삼총사가 얼어붙었다. 고릴라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민성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민성이 바라보자 그는 느끼하게 쪼개면서 말했다.

“또 노예 증명서라 해 보시지?”

“...크흠.”

민성은 고릴라가 했던 것처럼 말없이 헛기침만 했다. 성적 차이가 너무 심해 반발할 의지도 일지 않은 탓에 물러선 건지 미래와는 친하지 않은 탓에 양보한 건지는 알기 어려웠다.

“어때, 굉장하지?”

미래는 에헤헤, 웃으면서 다시 은결에게 말했다. 칭찬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결도 미래의 성적이 잘 나오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정도 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순수하게 그녀를 칭찬했다.

“그래. 이건 굉장한데.”

“에헤헤.”

칭찬 받아서 무척 기쁜 것 같았다. 초등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은결의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며 몸을 휙, 돌리고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로 해 줘야 돼!”

“그래.”

“그럼 방과 후에 봐!”

“응.”

그리고 미래는 왔을 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사라졌다. 고릴라가 은결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은결이 그를 돌아봤다. 고릴라는 은결을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스콘.”

뒤의 세 사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론을 하려던 은결은 세 사람의 표정을 보고 만 가지 변명이 다 무의미할 것임을 직감했다. 침묵 밖에 길이 없었다.

골목을 내달리는 자전거에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은결과 미래다. 자전거 앞의 철제함에는 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사온 오늘 저녁거리가 들어 있었다. 늦은 오후의 태양이 그들의 그림자를 뒤로 길게 늘였다.

“오빠, 오늘 점심때 오빠하고 있던 사람들 친구야?”

황혼의 봄바람을 쐬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미래가 물었다. 은결은 그냥 답하긴 조금 창피해서 조금 뒤로 돌려 우회적으로 답했다.

“아, 뭐- 그럼 적일까.”

“헤-”

미래가 감탄한 목소리를 냈다.

“뭐야 그 반응은? 은근히 기분 나쁜데.”

“그야, 오빠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 하고 같이 있었던 걸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렇지.”

미래의 기억 속에 은결은 대게 혼자였다. 한 손에 책을 들고, 느릿한 걸음을 걷는 그는 언제나 주변과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은결은 외로워하지 않았지만(혹은 그렇게 보였지만) 그의 주변은 고독의 기운을 물씬 풍기곤 했다. 오늘처럼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던 것을 본때가 언제였던지, 미래는 기억도 하기 어려웠다. 사람에 둘러싸여 웃고 있는 은결의 모습은 미래의 가슴에 안도감과 따스함과, 조그마한 심술 같은 것을 동시에 낳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응? 뭐가?”

“아, 아냐. 아무것도.”

곧 자전거는 집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자전거를 집안으로 들여놓고 저녁거리를 들고 집안 현관으로 들어갔다. 못 보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은결의 표정이 밝아졌다.

“도원(道遠) 스님이다.”

은결의 중얼거림에 대한 대답처럼 집 안에서 맑고 호탕한 목소리가 퍼졌다.

“하하하, 그래, 은결하고 미래가 돌아왔구나.”

곧 할아버지 방에서 가사를 걸쳐 입은 큰 체구의 중이 나왔다. 그림에서나 볼 법한 멋들어진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이어 은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나왔다. 할아버지만이라면 몰라도 아버지까지 함께 모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은결의 눈길로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은결은 먼저 미래와 함께 중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껄껄대며 두 사람의 인사를 받은 도원은 두 사람에게 공치사를 했다.

“껄껄. 못 보는 사이 은결은 한층 늠름해 졌구나. 우리 미래는 한결 더 예뻐졌고.”

미래는 에헴, 하며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하지만 미래만큼 뻔뻔, 혹은 천진난만 하지 못한 은결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었을 뿐이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표정이 부드럽다. 그런데 도원 스님은 이후 현관으로 나와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은결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벌써 가세요? 좀 더 있다 가시지 않고.”

“아니다. 저 늙은이도 이제 장사하러 나가야 하고, 해야 될 이야기는 다 했으니 나도 이만 가봐야 하겠구나. 실은 벌써 떠나야 할 것은 너희들 얼굴이나 보고 갈까 하여 기다리고 있던 거였단다. 그러니 이만 떠나야지. 세상에 부처님의 덕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지 있지 않겠느냐.”

“예...”

그리고 도원은 은결의 귓가로 입을 가져다 대고 미래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번 황사 때 네가 잘 대처해준 덕분에 나도 네 할아버지도 큰 짐을 덜었구나. 고맙다.”

“뭘요.”

은결은 얼굴을 조금 붉히고 답했다. 죽은 사람도 있었고 하니 피해가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지난번 황사를 타고 날아온 사념체가 불시에 등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척 적은 피해였다.

“그럼 가보마.”

푸근한 목소리로 도원이 말했다.

“안녕하가세요.”

“또 봬요!”

은결과 미래는 차례로 그에게 다시 인사했다. 그리고 도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성큼 문을 열고 집을 빠져 나갔다. 은결의 할아버지가 “거, 바쁘지도 않은 늙은이 주제에 성급하긴”이라 혀를 차며 그 뒤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아, 저녁 식사 끝내고 나서 가게에 찾아갈게요.”

은결이 서둘러 말했다.

“아니다. 너는 집에 있거라. 네 아비와 해야 될 이야기도 조금 있고.”

돌아온 할아버지의 대답에 은결은 눈을 크게 하고 아버지를 돌아봤다. 은결의 눈빛을 받은 수행은 고개를 끄덕여 할아버지의 말을 긍정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집을 뒤로 했다. 방금 전까지 왁자지껄했던 집안이 고요해졌다. 그 고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미래가 폴짝 뛰며 아버지에게 밝은 얼굴로 다가갔다.

“아, 아빠! 오늘 지난 모의고사 성적표 나왔어요!”

“그래? 우리 미래 성적은 어떻게 나왔지?”

“여기요!”

미래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성적표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그 성적표를 살피고는 환한 표정을 했다. 그는 미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래 성적이 이렇게 좋다면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

“물론이죠. 그래서 준비도 해 왔는걸요.”

은결이 그 말을 받으며 하교 길에 사 왔던 저녁거리가 든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세 사람의 얼굴로 개성적이지만 따스한 미소가 피었다. 언제 까지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지금의 웃음을 소중히 할 수 밖에 없다. 은결은, 그렇게 생각했다.

*잡담할 거리도 없네요. 그저 힘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