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희망을 위한 찬가 - 읽지 않을 수 없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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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격조했습니다.”
세연의 오빠는 몸을 정리하더니 은결의 할아버지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손대면 베일 듯이 각이 잘 잡힌 인사였다. 거기서는 깊은 존경이 느껴졌다. 은결의 할아버지는 푸근한 미소를 보이며 그 인사를 받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던 은결은 당혹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너는 이만 들어가 있거라.”
은결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의문을 억누르고 할아버지의 말에 순종했다. 은결이 문 안으로 들어가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 할아버지와 세연 오빠의 눈길이 마주했다. 적의 없는 친숙한 눈길의 교환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인이었다.
“이렇게 직접 진경 군과 만나는 게... 8년 만이군.”
“예.”
말을 나누는 두 사람의 표정으로 언듯 슬픔이 번져보였다. 은결의 할아버지는 이내 그늘을 지우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가씨가 자네 동생이었단 말이지... 그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자네를 다시 만나 되새겨 보니 확실히 닮았군.”
“저도 여기 찾아오기 전 까진 할아버님의 댁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미숙함으로 위기에 빠졌던 동생을 구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해야 할 일은 한 것일 뿐이지. 만일 감사를 하고자 한다면 나보다는 도리어 은결 녀석에게 해야지. 나야 지켜보는 것 밖에 한 일이 없는걸.”
은결의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오늘 일로 직접 그 감사를 전하는 일은 요원해진 듯 하니, 대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은결의 할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실컷 질책해 놓고 감사의 뜻이라고 해 봐야 얼마나 전해질지... 그보다, 자네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우리 은결만 했는데, 어느새 이런 늠름한 청년이 다 됐다니, 시간의 흐름이란 역시 빠르군. 자네 아버님과 조부는 건재하신가?”
진경은 머쓱하니 뒷머리를 긁었다.
“두 분이야 뭐... 저보다 오래사시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두 사람이 건강하다니 다행이군. 그래, 괜히 듣기 싫은 소리까지 해 가며 시험해본 우리 은결의 성적은 어떤지, 할애비로서 어디 들어보고 싶군.”
진경은 은결의 공격을 막았던 손을 들어 쥐락펴락해봤다. 뼛속 깊이 스며든 충격에 아직도 손은 잉잉거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못 믿을 만큼 강합니다. 저 나이 때 이런 성취라니 역시 선배님의 자식이라고 밖엔, 아니 선배님이라도 무리가 아닐까 싶군요. 저것도 전력이 아닐 테니 기의 덩어리 같은 존재라고 밖에는... 어디서 공청석유 내지는 만년설삼이라도 구해다 먹이셨습니까? 결계가 힘을 못 버텨 바닥을 부순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못 믿었을 겁니다.”
“껄껄 기업비밀이라고 해 두지.”
“...그리고 한심합니다. 감정 제어도 서투르고,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할아버님이 계시는 도천시에 길바닥이나 부수고 다니는 얼빠진 제마사가 있다 길래 반신반의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면 알만하군요.”
진경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직 미숙한 아이네. 하지만 조금은 이해해 주게. 아직 어림에도 무거운 짐을 등에 메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옛날부터 제 아버지를 유독 따르던 아이다 보니 8년 전의 사건도 그만큼 큰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네. 가혹한 일이지.”
진경은 잠깐 침묵했다. 할아버지도 침묵했다. 쉽사리 입을 열기 어려운 무거운 분위기가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머물렀다. 겨우 진경이 입을 열었다.
“수행 선배는 요즘 어떻습니까?”
“은결 아비라면 건강하진 않네만 그렇다고 위독한 것도 아니네. 그런데 선배라니, 자네들 같은 학교 출신이었나?”
“아, 5년 전에 K대에 입학했습니다.”
진경은 쑥스러운 듯 답했다.
“그랬군.”
“그런데, 정말로 협회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자네 할아버지 대부터 몇 번이고 권유해 준 것은 고맙네만... 미안하네. 더구나 성장해나가는 협회에 우리가 참여해 소요를 부르고 싶진 않네.”
“혹시 서양 연금술의 방법론을 기존 도학에 결합시킨 때문에 정통성 문제로 시비가 있을까봐 그러시는 거라면...”
은결의 할아버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배려는 고맙네만 굳이 우리를 위해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괜찮네. 지금도 자네가 기독교 계열 회원들과 불교, 무속 계열 회원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머리아파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네. 거기다 우리까지 끼면 상황은 한층 복잡해지겠지.”
노인의 대답에 진경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그는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땅바닥으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후, 창피할 뿐입니다.”
은결의 할아버지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에 조금 답답함을 느끼면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창피해 할 것 없네. 도리어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여겨야지. 엉망진창이던 우리나라의 제마사 조직 체계가 이 나마라도 정리된 게 자네 집안의 노력 덕분이니.”
“...마음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진경은 묵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지.”
“아, 그러고 보니 개집이 부산스럽다고 합니다.”
갑자기 생각난 듯 진경이 말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애매해졌다.
“개집? ‘이세 신궁(伊勢 神宮)’ 말하는 건가?”
“달리 어디가 있겠습니까? 구한말 당시만 해도 그래도 체계가 잘 잡혀있던 국내 제마사 조직이 철저하게 박살난 게 그 놈들 때문인걸 생각하면 개집이란 이름도 개한테 미안할 지경입니다. 덕분에 오늘날 까지 제대로 조직이 세워지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경은 이를 갈았다. 삭지 않은 감정의 불꽃이 멀리까지 튀어나갈 양 싶다.
“끌끌.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전후 이세 신궁은 과거의 악업으로부터 단절했네. 그곳의 위치를 생각할 때 개집이라 부르는 것은... 탐탁지 않군.”
“사언(私言)과 외교적 발언 정도는 구분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하여간 주의하세요. 개... 아니, 이세 신궁이 이렇게까지 부산스러운 것은 지난 93년 당시 식년천궁(式年遷宮 - 20년 마다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권족급 마물이라도 하나 튀어나온다면 이쪽까지 영향이 미쳐도 미상하지 않습니다.”
“알겠네.”
할아버지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경이 은결의 할아버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하고 등 돌리려는 진경을 향해 물었다.
“수행 녀석은 안 만나고 가나?”
“만나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선배님의 아드님과도 그리 좋은 첫 만남을 하진 못했으니, 지금은 뵙기가 좀 껄끄럽습니다.”
“자넨 여전히 그 녀석 팬이군.”
“K대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인걸요.”
진경은 검지로 코 밑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 순간 진경의 얼굴은,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맑았다.
“그런가.”
“그럼.”
“잘 가게.”
그리고 진경은 차안으로 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부릉, 하고 엔진 켜지는 소리가 일었다. 곧 황홀한 빛의 흐름을 이끄는 유려한 선의 자동차가 부드럽게 움직였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노인은 배웅이라도 하듯, 그 차가 사라질 때까지 골목에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자그마한 정원을 거쳐 집안으로 들어가니 식욕을 돋우는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부엌에는 은결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은결의 목소리가 티 없이 맑았다. 아무리 은결의 수양이 뛰어나다 해도, 방금 전과 같은 일을 겪은 18세 청년의 목소리가 이렇게 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그 옆에 가 섰다.
“뭐 도울 일은 없느냐?”
“아뇨. 이제 거의 다 했는걸요.”
“그러냐.”
뜨거운 가스불의 열기를 받는 냄비의 뚜껑이 딸깍였다. 드문드문 토해지는 흰 김이 대기 가운데서 불안정하게 흩어졌다. 그 모양새를 멍한 눈길로 지켜보던 은결은 느리고 슬프게 말했다.
“그 사람 말이 옳아요. 저는 한심해요. 왜 이렇게나... 한심한 걸까요.”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단다.”
은결은 이를 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그런 걸론, 안 돼요. 노력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저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어요. 아니, 아버지를 넘어서야만 했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무너뜨린 세상의 악의에 대항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노력했고, 이를 악물고 책을 읽었어요. 대체 무엇이 아버지를 무너뜨린 것인지 알아야만했어요. 그래서 세상의 악의를 이해해, 그 악의에 대항하려고 했어요.”
은결이 지금처럼 강박적으로 책을 잡기 시작한 것은 8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은결의 아버지는 대지에 쓰러졌고, 다시는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를 존경하고 있던 은결에게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로, 은결의 세계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은결도, 은결의 할아버지도, 은결의 아버지도 그 점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쫓아가지 못 했어요. 여전히 세상의 악의를 이해하지도 못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해요. 그 결과 말해선 안 될 것을 쉽사리 말해버리고, 말 몇 마디에 흥분해 상대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서 해선 안 될 짓을 했어요. 한심하죠. 따라잡기는커녕 도리어 멀어진 것 같아요...”
은결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봤다. 노인은 그것이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을 참아내기 위함임을 알고 있다. 그는 손을 들어 은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진경이 네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 더구나.”
“진경이라면 방금 전의 그 사람요?”
의아한 얼굴로 은결이 물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생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더구나.”
“그럴 리가-”
방금 전까지 그렇게 격렬하게 감정을 부딪쳤고, 자신을 질책했던 사람이 감사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할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자책하지 말거라. 너는 잘 하고 있다. 물론 너는 분명히 미숙하단다. 이 점은 숨길 수 없겠지. 그렇지만 그 미숙함에 화내던 사람도 네게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을 만큼, 너는 이 일을 성실하게 잘 해내고 있단다. 노력하는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말거라. 미숙함이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문제란다. 사람은 정지된 존재가 아니잖니?”
“...예.”
은결은 느리게 답했다. 안도와 납득과 부정 사이에 선, 아슬아슬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은결은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요란하던 냄비가 이내 조용해 졌다. 아침 준비가 끝났다. 이제 미래와 아버지를 깨워야 한다.
*각 잡힌 인사에서 알 수 있듯(?) 진경은 군대 갔다 왔습니다. 별로 나쁜 놈이 아닌데 싫어하는 분들이 적잖군요. 하여간 여러분 가운데 아직 군대 안간 분들은 훈련소 가면 우유팩으로 각 잡는 비법을 배우실겁니다. 음음.
*다음 화부터 슬슬 이 글도 궤도에 오릅니다. 중요 줄거리만 뽑아 전개하면 이 글도 상큼하게 끝날 수 있는데,(두 권?) 확장을 거치면 또 훌륭히 분량을 늘릴 수가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늘릴지 말지는 저도 모릅니다. 이후 반응을 봐서 결정할 문제.
*비축 만들려다 마는 건데, 글 쓰는 작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추천과 감상을 씁시다~(다아~(에코))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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