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희망을 위한 찬가 - 읽지 않을 수 없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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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결은 멍한 시선으로 서울역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책을 쥐고 있었다. 책 중간에 끼워진 검지가 방금 전까지 그가 시선을 주던 페이지를 설명했다. 주말 봄의 밝은 햇살 아래 높은 건물들이 폭력적으로 번뜩이고, 개성적인 많은 차와 사람들이 무개성한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세상의 소란에 은결은 약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흔들렸던 감각이 정리됐다. 시계를 바라봤다. 태양이 세상의 그림자를 거두고 백광을 채우기까지 30분이 남은, 11시 30분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까끌까끌하고 온화한 감촉이 손끝으로 느긋하게 전해졌다. 지난 며칠간 고생해서 만든 호신부다.
“-저,”
조금쯤 긴장에 뒤섞인 목소리였다. 은결은 고개를 들었다. 얼른 시선을 땅으로 떨궈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머리칼이 아래로 늘어지며 태양빛을 빨아들였고, 다시 토해냈다. 깨끗한 검은 빛 위로 백색 빛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은결은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고 말 것 같았다. 만개산에서도 느꼈지만 세연은 아름다운 소녀였다. 미래도 미소녀지만 역시 동생과 이성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아, 반갑습니다.”
은결은 당황을 숨기고 얼른 공손하게 인사했다. 세연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저도 다시 뵙게 돼서 반가워요.”
두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같이 시선을 피했다. 은결은 속으로 심한 부담을 느꼈다. 좋게 말해 고독하고 나쁘게 말해 왕따다 보니 사람과 접촉이 많지 않다. 거기에 이성이라는 조건이 따라붙으면 결과는 한결 참혹하다. 마지못해 나왔지만 스스로도 이런 결과는 예견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세연이라는 아가씨 역시 그다지 낯가림이 좋지 않은 듯한데, 이래선 둘 다 고통스럽다.
은결은 이곳에 오기까지 어쩔까 하고 망설이던 선택을 결국 굳히고 주머니를 뒤져 호신부를 꺼냈다. 손가락 사이로 신선한 황갈색 나무 조각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세연의 눈이 커졌다.
“약속드렸던 호신부입니다.”
그리고 은결은 호신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그마한 정사각형의 나무조각 여럿에 십자가를 조각해 넣고, 캐슈를 칠해 광택을 낸 다음 고무로 연결해 만든 팔찌였다. 세연은 조심스럽게 그 팔찌를 받았다. 기분 탓인지, 그렇지 않으면 팔찌가 막 만들어진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인지, 팔찌에서는 황갈색 나무의 호흡이 상쾌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가, 감사해요. 직접 만드신 건가요?”
“에, 뭐 예. 제가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는 처음 해 보는 거라 좀 투박합니다. 할아버지만큼 잘 했다면 좀 더 나은 걸로 만들어 드릴 수 있었겠습니다만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세연의 물음에 은결은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답했다. 장래 이 일을 계속해 나가려면 이런 상황에도 대처해야 된다는 이유에서 팔자에도 없을 것 같던 목공예를 틈틈이 한지도 대충 3년이다. 상당한 실력이란게 할아버지의 평이었지만 그 성과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래도 창피했다.
“아, 아녜요. 이거만 해도 충분히 멋진걸요.”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세연은 고개를 흔들며 은결의 걱정을 부정했다. 그는 가슴 속 깊이 안심하며, 또 세연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으며 말했다.
“예?”
“이만 가보려고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은결로서는 나름대로 감사의 뜻을 표시할 겸 굳혔던 결심을 꺼낸 거였다. 해설하자면 둘 다 뻘쭘하니 그냥 헤어지잔 말이다. 훌륭하게 왕따 티를 내고 있다.
“저, 제가 무슨 실례라도?”
세연의 얼굴이 슬픔에 물들었다. 아무리 미소녀가 슬퍼한다고 기세 좋은 태양이 눈 하나 끔뻑할까 마는, 그 슬픈 용모를 눈앞에 두어야 하는 사람이 남자일 경우 태양이 갑자기 지는 것 만한 효과를 기대해도 좋다. 은결 같은 경우는 아주 크리티컬이다.
“아닙니다! 하지만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대접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일전 말씀드렸듯이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기에 부담감을 느끼실 필요도 없고, 그러니...”
“......”
은결은 서둘러 변명했다. 하지만 세연의 풀죽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니...”
여전히 세연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니 가지 않겠습니다...”
은결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끝을 이었다. 풀죽었던 세연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저, 제가 안내 할께요.”
세연은 당연한 소리를 하며 은결 옆에 섰다. 그는 억지로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췄다.
서울의 황혼은 한결 붉다. 그것이 이 거대한 도시의 오염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해도, 아득한 허공에서 산란되는 빛의 굴절은 혼곤하고도 농염한 붉은색의, 부정할 길 없어 도리어 슬픈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 가운데 은결과 세연은 다시 서울역 근처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 뒤로 늘어선 그림자가 느긋하게 그들을 따랐다.
“저, 여기.”
걸음 도중에 세연이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가죽 백에서 책을 꺼내 은결에게 넘겼다. 오늘 은결이 오는 길에 가져왔던 책이다. 세연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은 아무리 은결이라도 책을 줄곧 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세연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은결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책을 받았다.
“그런데 책 좋아하시나보죠?”
“예. 그- 꽤 좋아합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세연 양은 책 좋아하세요?”
은결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책을 왼손으로 넘기고, 다시 오른손으로 책의 표지를 어루만지듯 손끝으로 쓸며 물었다.
“나, 남들만큼은 좋아해요.”
세연은 얼굴을 조금 붉히고 서둘러 답했다. 대한민국 일인당 평균독서량이 어느 정돈지 알았다면 결코 못할 소리다. 물론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을 별 흠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별개다. 하나, 입시에서 논술의 비중이 커진 덕분에 한결 책 읽으라 학생들을 압박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현역 고등학생이 책 잃기 싫다고 말하긴 힘든 법이다. 대화의 목적이 어느 정도 내숭에 가 있다면 더욱 그렇고.
“그렇군요.”
하지만 은결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세연은 그의 목소리가 언제나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지금의 대답은 한결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따스하게 감싸는 것 같으면서, 멀게 느껴지는, 남국의 평화로운 파도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는 사이 결국 두 사람은 은결이 타야할 버스 편이 있는 정류장 앞에 도착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저, 도요.”
세연이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를 괜히 머쓱하니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연 양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저를 만나게 된다 해도 모르는 척 하세요. 이런 세계와는 되도록 인연을 가지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은결이 선선한 얼굴로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아...”
세연의 말은 메인 것 같았다. 그늘 탓인지 그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 전해드린 호신부를 차고 지내시면 지난번 같은 일은 겪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약장수 같은 말이긴 합니다만, 건강에도 꽤 좋습니다. 그 팔찌에는 기를 잘 운용시켜 주는 기능도 있거든요.”
“예에...”
세연은 왼쪽 손목에 찬 팔찌의 매끈한 감촉을 오른손으로 느끼며 답했다.
“원래라면 제가 집에 바래다 드려야 할 텐데...”
미안한 듯 은결이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나온 다음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세연은 거절했다. 서울에서 헤어지기 때문에 서울 지리에 익숙한 자신이 그를 배웅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은결은 그녀의 말이 사리에 맞다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정말로 괜찮아요.”
고개를 저어 은결의 말을 부정한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표정을 강하게 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하지만 그녀의 말은 곧 이어진 은결의 말에 묻혀 이어지지 못했다.
“아, 저기 버스가 오는군요.”
“예?”
세연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버스가 도착했다. 은결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오르며 “오늘 감사했습니다.”하고 말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세연이 당황해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는 사이 버스는 바쁘게 떠나갔다. 남겨진 세연은 쓸쓸하게 버스의 뒤를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바보...”
세연은 슬픈 얼굴로 누군가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 대상이 하고자 했던 말을 못한 자신을 향한 건지, 마지막까지 쓸쓸하리만큼 공손해, 그녀에게 차가운 벽을 만들던 은결을 향한 것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팔목을 쓰다듬었다. 남겨진 호신부의 감촉이 새삼스럽다. 그러나 멀어져 가는 버스가 남겨놓은 쓸쓸함은 메워지지 않는다.
*굉장히 피곤합니다. 하여간 여러분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다음화나 다다음화 정도면 이번 챕터는 끝입니다.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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