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11화 (11/300)

#   11-희망을 위한 찬가 - 읽지 않을 수 없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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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은결은 밝은 기색으로 문을 열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오는 길에 서점에서 산 책 몇 권이 끼워져 있었다. 기분 좋게 집안으로 들어선 은결은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안이 썰렁했다. 집이 넓은 편인데 비해 4인 가족이니 물리적으로 썰렁한 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분위기까지 가라앉는 일은 별로 없다.

"어서 오너라."

곧 아버지가 나와 은결을 맞이했다. 수척한 모습이지만 그에게는 품위가 느껴진다. 수령이 다 되어 가는 거목이 세상을 향해 노래하는 차분한 시간의 흐름 같은 품위. 하지만 그 품위는 고결함을 느끼게 할지언정 집안의 썰렁함을 어쩔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은결은 거실로 들어서며 물었다.

"미래가 안 보이는데 어디 나갔나요?"

은결네의 남자들은 모두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기에 물리적으로 썰렁한 공간을 따스하게 데우는 것은 언제나 미래의 역할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가족들을 맞이했고, 그 활달함은 자칫 고독감에 잠식되기 쉬운 너른 집안을 기분 좋게 감쌌다. 오늘은 그것이 결락되어 있었다.

"아니. 제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런데 네가 왔는데 얼굴도 내밀지 않다니, 녀석치고는 드문 일이구나. 아마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있겠지."

"뭐 다음주가 전국 모의고사니까 열심히 한다고 그런 거겠죠. 그런데 저녁 식사 하셨어요? 아직 안 하셨으면 지금부터 만들려는데."

"그럼 간단히 된장찌개라도 부탁한다."

"예." 은결은 흔쾌히 답하고 미래의 방에 노크했다. "있어." 대답이 돌아왔다. 은결은 방문을 열었다. 공부에 열중해 있던 듯 책상에 앉아 있는 미래의 모습이 보였다. 단정하게 정리된 모습이 자고 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은결은 약한 의문을 품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부터 저녁 준비하려는데,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며칠 뒤면 모의고사고 하니, 이 오빠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께."

"됐어. 아빠가 드시는 거하고 같은 거면 돼."

"그, 그래."

되돌아오는 미래의 대답이 석연치 않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던 걸까? 은결 가슴 속의 의혹이 커졌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이야 원래 변화막측한 것이지만, 미래는 평소에 훨씬 적극적으로 대답해 왔다. 의문의 중앙을 관통하는 다트를 던지듯, 미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빠, 오늘 전화가 한 통 왔던데-"

"에? 전화가?"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은결의 가슴을 스쳤다.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은결이기에 집으로 그를 찾는 전화가 오는 일은 흔치 않다. 전화가 걸려오는 것 자체가 예외적인 일이다.

"-세연이란 여자한테서 온 전화였는데, 오늘 산에서 고마웠다고 꼭 좀 전해달라더라."

"그-"

'역시나.'였다.

"흐응. 산이란 말이지. 주초에 내가 같이 벚꽃 축제에 가자고 할 때는 바빠서 안 된다더니 말야. 바쁘다 길래 뭐가 바쁜가 했더니, 이런 게 바빴단 말이지."

미래의 말은 따끔따끔했다. 음절 하나하나에 예리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일주일 짜리다.' 은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미래만 놔두고 놀러갔던 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사념체니 수련이니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에게도 비밀이었다. 그냥 그녀의 오해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세연이란 아가씨에게 자기 동생에게도 비밀이란 이야기를 했던지도 가물가물했다. 호신부에 대해서도 상담해야 할 것이 남아 있고, 아무래도 그녀와는 되도록 빨리 한번 더 연락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어쩌면 한동안은 휴대폰을 자주 사용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결은 한숨을 쉬었다.

은결은 세상에 선명한 악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가령 8년 전,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던 날의 아침과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의 자기 교실로 들어간 은결은, 자신의 책상이 악의에 가득 찬 낙서로 메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은결을 조롱하고 모멸하기 위해 공을 들인 무질서한 기호의 집합이었다. 그 선명한 악의의 모습 앞에, 당시의 은결은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3년만인가.'

은결은 피식 웃으며 오랜만에 만난 그 악의의 모습에 가벼운 인사를 보냈다. 오늘 아침, 여전히 삐져있는 미래와 헤어져 교실로 들어와 보니,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8년 전을 재현해 놓은 듯한, 악의에 찬 낙서의 집합체로 화한 책걸상이었다. 발로 그린 듯한 섹스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들로 인해 당시보다 한 결 더 저열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당시와 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악의의 덩어리였다.

은결은 찬찬히 그 낙서를 살폈다. 무질서했지만, 그 낙서의 집합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읽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뭐하나 할 줄 아는 게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책이랍시고 붙잡고 잘난 척 하는 꼬락서니가 도무지 마음에 안 든다는, 기분이 상쾌해질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악의였다.

'3년이면, 슬슬 시작될 때도 됐지.'

주변과 융화하려는 노력을 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 적도 없었다. 얕잡히면 얕잡히는 대로, 존중받으면 존중받는 대로, 그냥 물이 흐르듯이 내키는 대로 생활했다. 그런 것들까지 고려할 만큼 은결은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니 3년이면 차라리 길었다.

그는 가방을 책상에 걸고 교단으로 나갔다. 수십 쌍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은결은 그 모든 눈빛에 하나하나 응답하듯, 아무 말 없이 뚜렷한 시선을 쭉 앞으로 보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학교 끝마치고 학교 뒤에서 보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찾아와. 올 마음이 없다면 앞으로 이런 저열한 짓은 그만두고."

그리고 은결은 교단에서 내려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더럽혀진 책상 위에 책을 꺼내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어제 사왔던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은결은 그들의 평가에 관심이 없었다. 올 것이 왔고, 왔다면 치울 뿐이었다. 세상에는 선명한 악의가 있다. 먼 자리의 민성이 걱정스레 은결을 바라봤고, 곰은 얼굴로 기쁜 기색을 띄었다.

"얘. 저거 너희 오빠 아냐?"

"응?"

미래는 문제집 풀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정혜가 창문 너머로 손가락질 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래는 자습 시간이긴 하지만 좀더 조용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종종걸음으로 그녀 곁에 다가가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학생의 모습이 있었다. 절로 미래의 입이 "아-" 하고 벌어졌다.

"오빠다."

"그렇지? 한 눈에 알아봤어."

정혜는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미래는 자신이 매일같이 오빠와 같이 등교하는데 그녀가 은결을 알아봤다는 것이 별다른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 응."

그렇지만 그걸 지적하기도 껄끄러워서, 미래는 정혜의 말을 그저 곤혹스레 긍정하며 창문에서 멀어졌다. 정혜는 의외인 듯 눈을 동그랗게 하고 물었다.

"어, 인사 안 해?"

"얘는. 남들 보기 안 좋게 인사는 무슨 인사니."

더구나 자기를 속이고 산으로 놀러간 데 대한 화도 아직 다 안 풀렸다.

"그런데 나는 체육 시간에 나와서 책 읽는 사람 처음 봐. 아파서 쉰다던가, 시험 공부한답시고 문제집 들고 나오는 애들은 좀 봤지만, 너희 오빠는 그런 것도 아니잖아. 책이 뭐가 그리 재밌을까?"

정혜가 미래와 걸음을 같이하며 물었다. 말이 자습시간이지 이쯤 되면 노는 시간이다. 대게의 자습시간이란 것이 그렇긴 하지만.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엔 오빠도 책을 좋아하긴 했어도 저런 방식으로 좋아하진 않았는데."

"저런 방식?"

"으음, 그러니까- 좀더 여유가 있었다고 할까... 지금 오빠가 책 읽는 걸 보면 조급해 보이거든. 지금은 책을 즐기는 게 아닌 것 같아. 그것 때문에 문제도 몇 번 있었다고 하고..."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 은결의 모습은 지금 보다 한결 밝고, 씩씩한 것이다. 그때 은결은 가슴 깊은 곳에서 웃을 줄 알았다. 당시 은결의 독서는 그 웃음의 한 부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한 순간을 기점으로 뒤바뀌었다. 어쩌면 당시의 해맑음을 앞으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며 미래는 감한 옥죄임을 느꼈다. 안타까웠다.

"문제? '샌님'이라는 별명 때문에 그래?"

정혜의 물음이 미래를 옥죄임에서 꺼냈다. 미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의문에 답했다.

"얼간이라던가, 책벌레라던가, 그런 별명을 자주 얻은 것도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본인이 거의 신경을 안 쓰니 그런 건 별로 문제가 아냐. 그 보다는 또래의 남학생들한테 밉보인다거나 얕잡히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아. 그게 문제겠지."

"흐응- 하기야 네 오빠는 사람이 착해 보이니 짓궂은 아이들한테는 놀림감으로 딱 좋겠다."

"그렇지?"

미래는 '착해 보이는 게 아니라 원래 착해.'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맥락상 그게 칭찬인지 애매했기 때문에 간단히 긍정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런데, 그럼 큰일 아냐? 혹시 왕따 같은 거라도 당하면-"

"아, 그런데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 신기하지? 우리 오빠는 운이 좋은가봐."

미래는 가볍게 웃으며 정혜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 결론은 정혜의 체험상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의혹을 덧붙이기에는 미래의 미소가 너무 해맑아서, 정혜는 다른 말을 더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꼽사리이긴 해도 추천을 받았습니다. 분발하겠습니다. 그런데 추천해 주시는 분들은 대게 이 글의 플롯보다는 문장에 점수를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시, 아직은 초반인가 봅니다.

*지난 화의 확률 문제는 사망자만 따져도 확률이 높은데 자질구래한 교통사고 전부를 끼워 넣은 확률이라면 얼마나 크겠냐는 말입니다. 은결은 교통 사고 당할 확률이라고 했지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이라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클라우스 학원 이야기 완결된 이야기입니다. 2부 계획은 없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 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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