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희망을 위한 찬가 - 읽지 않을 수 없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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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세연을 맞이한 것은 석양에 물든 세상과, 윗도리를 벗어 얼굴을 둘둘 말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소년을 소년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미리 봐뒀기 때문이다. 앞이 안 보일거란 점을 제외하면 가끔 영화에서 보이는 스타킹을 뒤집어쓴 강도들의 차림과도 비슷했다. 물론 옷 틈 사이로 어느 정도 시야는 확보했을 것이다. 하여간 감수성 풍부한 여고생이 맞이하기엔, 심장과 감성 양방에 안 좋은 광경이다. 세연은 반사적으로 숨을 삼키며 몸을 뒤로 뺐다.
“아, 저기, 피하지 마세요. 그- 이상해 보일 거란 건 알지만 그냥 얼굴을 가리려는 것뿐이니까요. 최면이 안 통하는데다 이야기 드릴게 좀 있어서 부득이 하게 이런 괴상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윗도리로 얼굴을 둘러싼 소년의 목소리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 있지만 평화로워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는 물론 은결이다. 세연은 눈망울을 크게 하고 되물었다.
“에?”
“제가 사념체와 싸우는 걸 보셨지요? 저는,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정체를 드러내면 곤란하거든요.”
사념체? 아마 그 거무스레한 안개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깨어난 지금 그 안개는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해치운 모양이다.
“수, 슈퍼맨처럼?”
“에- 뭐 그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저, 그- 아, 아무 한 테도 말 안할 테니까 그냥 보내주세요.”
보통이라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이냐며 화를 내거나 배를 잡고 뒹굴텐데, 세연은 서슴없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반사적으로 말했다. 심지어 꿈이 아닌지조차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영화나 만화를 꽤 많이 봤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무의식은 힘이 세다. 아니면 너무 황당한 상황에 접해 현실감각이 아직 회복되지 않는 걸까?
“아, 물론 그것도 부탁하고 싶은 부분이었습니다만, 굳이 이렇게 대화하려고 한 것은 좀더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라니요?”
“그러니까, 댁의-”
거기서 은결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댁’이라는 표현이 아무래도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기, 김 세연이라고 해요.”
세연은 말하고 후회했다. 상대가 ‘악의 비밀결사’라던가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수상쩍인 인물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신원을 밝히는 것은 현명한 것 같지 않았다. 더해서 세연은 남자를 안 좋아한다. 그녀는 ‘남자는 다 늑대!’라는 여성들 사이로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지혜로운 격언에 많은 신뢰를 보내는 현명한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마뜩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세연양의 체질 문제로 이야기를 좀 드릴게 있어서 이렇게 남은 겁니다.”
“제 체질요?”
“예. 이게 좀 복잡한데,-”
그리고 소년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해볼 겸 머리를 긁으려 했다. 물론 옷으로 둘러싼 머리를 긁기란 힘들다. 버릇처럼 올라간 그의 손은 아쉬움을 담고 다시 내려왔다. 세연은 좀 미안하긴 한데, 그 엉거주춤한 모습을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냥 간단히 설명하면 세연양의 몸과 마음은 방금 전의 사념체 같은 것들이 노리기 좋은 것입니다. 뭐랄까- 그런 것들에 대한 교감력이 아주 높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녀석들에게 자연스럽게 보고, 또 이끌리신 거죠. 반대로 저희가 사용하는 간섭에 대해서는 저항력이 높아서 최면도 안 먹히고.”
“그거...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은결은 길어야 될 이야기를 간결이 요약해 주길 원하는 소녀의 응답에 아득함을 느끼며, 중국의 선사 조주가 무엇이 불법인지 묻는 신참 중에게 왜 ‘밥 먹었니?’라고 답했는지, 거기에 신참 중이 ‘예’라고 답하자 왜 ‘그럼 가서 그릇이나 씻어라.’고 답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라도 A4 10장짜리 글을 한 줄로 요약해 달라고 하면 암담한 법이다.
“그-”
그래도, 요약 하려면 또 못할 내용은 아니라서, 턱, 하고 말문이 막히는 동안 은결은 대충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
“그게, 지금 같은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앞으로도 그런 녀석들이 꼬일 위험이 있는데다 교감력이 센 만큼 녀석들 쪽에서도 세연 양을 노릴 가능성도 높으니.”
“엣!”
당연히 사념첸지 뭔지 뵈여서 좋을 리가 없다. 실제적인 위협일뿐더러, 환각을 본다고 소동이라도 한번 피웠다간 언덕위의 하얀 집과 친해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상상만으로도 참혹한 일이다. 세연의 목소리가 높게 올라갔다.
“진정하세요. 그 문제 때문에 제가 남은 것이니까요.”
“예에...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조마조마한 눈길로 은결을 바라보며 세연이 말했다.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어째 미래가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한 며칠 있다가 제 쪽에서 호신부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뭐, 간단히 부적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걸 하고 계시면 세연 양의 교감력이 억눌려 그런 녀석들이 달라붙는 일도, 이런 싸움에 말려드는 일도 없으실 겁니다.”
“며칠이나요?”
“그- 도천시 내의 사념체는 일단 다 정리했습니다. 한동안을 조용 할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겁니다.”
“전 서울에 사는데.”
은결의 설명에 세연이 간결하게 말을 더했다.
“아, 그렇습니까... 아마 그래도 괜찮을 겁니다. 서울 쪽에서도 슬슬 다 정리했을 거고, 그쪽은 저보다 우수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또 아무리 세연양의 교감력이 높아도 매일 같이 이런 녀석들하고 조우할리는 없거든요. 확률로 따지면 교통사고 당할 확률보다 좀 높은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교통사고 보다 높은 조우율이면 충분히 걱정할만하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한해 칠천 정도이니, 그걸 가지고 따져도 일 년 내에 만날 확률은 1/6500 정도인데, 22만 건에 달하는 한해 교통사고라면 전부를 기준으로 하면 오죽할까. 이게 낮아보여도 사람들이 조류독감 당시 닭고기에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지나칠 정도로 높은 수치다. 세연의 얼굴이 백색으로 한층 아름답게 물들었다. 겁먹은 기색이 역력하다. 은결은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바보다.
“하, 하여간 며칠 내에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연락처나 주소를 좀 알려주세요. 되도록 빨리 전해 드리겠습니다. 세연 양 같은 분이 이런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하는 것도 저희 임무이고 또 저희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거든요.”
“그-”
세연의 동작이 ‘멈칫’했다. ‘믿어도 되나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사기꾼한테 사기꾼이냐고 물으면 그만한 바보짓이 없다. 군사독재시절 만화 속 세상도 아니고, 도둑보고 서라고 해서 서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아직 어디서도 발견된 적이 없다. 또, 당당히 사기꾼이라면 어쩔거고, 손을 흔들며 극력 아니라면 또 어쩔거란 말인가.
“예?”
“그- 보수 같은 건 안 받으세요?”
그래서, 이런 쓰잘데기 없는 말로 대체했다. 사정을 모르는 은결은 이런 상황에서도 돈 문제가 오가야 한다는 데,(어쩌면 그녀의 선의를 설명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슬픔을 느끼며 부드럽게 답했다.
“아아. 따로 보수는 받지 않습니다. 이건 저희에게도 필요한 일이라서 하는 거니. 만약 신경 쓰이신다면 그냥 저희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해주시면 됩니다. 그걸로 대신하겠습니다.”
“그, 그러세요.”
거기서 세연은 의혹을 조금 풀었다. 뭔가 요구했더라면 아무리 기괴한 광경을 직접 봤다지만 그녀는 은결을 일단 사이비 종교집단 관계자로 의심했을 것이다. 세상이 험하니 상식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수틀리면 언제든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딱 두 사람만 인적 없는 숲속에 있다는 상황을 생각하면 과도한 상식이다. 여전히 현실감각이 회복이 안 된 듯 했다.
“그러면 연락처를 부탁드립니다. 그, 물론 집 주소는 꼭 필요하고, 휴대폰은 번호, 그게 아니라면 전자메일 주소라도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품에서 수첩을 꺼내 거기 연락처를 적어 은결에게 넘겼다. 그는 그것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떠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자, 잠깐만요!”
“예?”
“저, 댁의 연락처도 알 수 없을까요?”
“아,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어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다니,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말이었다. 은결은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 창피했다. 그래도 사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혹시 만일의 일이라도 있으면...”
머뭇거리는 어조로 이어진 세연의 말에 은결은 걸음을 멈췄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확률이 어쨌든 오늘 당장 그런 일을 겪은 소녀에게, 단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 던져두고 훌쩍 떠나는 것은 역시 너무 무정하다 싶었다.
“그리고 휴대폰이 고장난 것 같아요. 지금 다시 해 봐도 안 돼요.”
“고장-”
‘-난게 왜요?’ 하고 물으려던 은결은 겨우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났다는 거군요. 예.”
휴대폰이 고장났다는 말은 여전히 그녀의 조난 상태가 해결이 안 됐다는 말이다. 은결이 배웅해 줘야 한다. 그것을 이해한 은결은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좌절했다. 날도 어두워 졌으니 배웅하고자 하면 사람들 있는데 까지 안내해야 할 테고, 이 꼴로 거기까지 갈 수는 없다. 무엇을 위해 이 꼴사나운 짓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하는 회한이 아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은결은 순순히 포기하고 얼굴을 둘러싸던 옷을 벗었다.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세연은 조금 감탄했다. 투박한 안경이 좀 촌스러워 보이긴 해도 선이 부드럽고 굳은, 잘 정리된 오관이었다.
“저, 제가 앞장서 갈 테니 조심해서 따라오세요. 조금 있으면 어두워 질 텐데, 특히 발밑을 조심해 주세요.”
“예.”
세연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만개산 아래의 버스 정류장 앞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쯤 뒤였다. 사람의 활기가 가득 느껴지는 도심의 거리에서 세연은 깊은 안정감을 맛봤다. 발걸음이 당장이라도 통통 튈듯 가벼웠다. 하기야 기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라곤 해도 전혀 이질적인 세계에 발을 들이 내밀었다가 겨우 돌아온 것이니까.
그 모습을 보니 정체를 들키면서까지 이 일을 한 보람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되어 은결은 작게 웃었다. 그는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연락처를 적어 그녀에게 넘겼다. 세연은 내밀어진 종이를 반사적으로 받았다.
“저는 휴대폰을 거의 안 쓰기 때문에 전화보다는 메일 쪽을 이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정말로 정체가 들키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급용이 아니면 피해주셨으면 하고, 또 약속해 주신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공손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말하고, 은결을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교차하는 주말의 인파가 그의 몸을 묻어갔다.
“저-”
또다시, 세연은 은결을 불렀다. 은결은 반사적으로 멈춰서며 고개를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 시선을 접하고 세연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목이 매였던 까닭이다. 왜 그를 불러 세웠던 것인지도 모호했다.
“그, 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박은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은결은 정말로 세연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쭉 주며 세연은 잡았던 종이를 입술로 물었다. 목에 뭔가 걸린듯한 느낌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왜 그를 멈춰 세우고자 했던 것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그에게 아직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겨우 막혔던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추천을 받았습니다. 추천해 주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분발하겠습니다. 이번화도 분발의 증거...(양도 많다. 아까워라~) 으음, 제 목을 죄이는 노릇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에이, 뭐 기쁘게 조이겠습니다.
*미래가 친동생인지 아닌지는 지금 밝히면 재미없겠죠.
*일 년에 칠천 명은 최근 수치(2004년 까지)를 참조한 것입니다. 예전엔 만 명이었는데 선진 교통 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것인지, 무척 다행입니다. 그게 아니라 기름 값이 없어서(...유력)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인명손실은 적을수록 좋은 거죠.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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