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희망을 위한 찬가 - 읽지 않을 수 없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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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내려가던 세연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알지 못하는 산길로 들어가 있었다. 사람도, 길도 보이지 않았다. 봄날의 햇살을 듬뿍 머금어 무성한 잎을 자랑하는 수목만이 주변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산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간단히 산 정상이나 둘러보고 올 생각이었기에 그녀에겐 비상식량은 물론이고 나침반도 없었다. 십년 전이라면 꽤나 위험했을 상황이다. 세연은 당황하지 않고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빅브라더의 위험도 있지만, 정보통신시대의 위업이다. 그녀는 외부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잠시 휴대폰을 조작해본 그녀의 얼굴로 짙은 당혹이 떠올랐다. 전파가 통하지 않았다. 조난이었다. 평화로운 국가에서 살아온 18세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아...”
한숨이라고 하기에는 애절하고 비명이라고 하기엔 약한,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 절절한 감정을 담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내렸다. 거기에 맞추듯, 검은, 안개 같은, 괴이한, 악한 무언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세연의 동공이 커졌다. 그것은 산의 정상에서 보았던 거무스름한 안개였다.
그 검은 안개 같은 것은 춤추는 것처럼 모습을 바꾸며 그녀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마치, 기뻐하는 것 같았다. 공포가 이성을 지배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심지어는 공포가 감각을 지배한 듯 세연의 귓가로는 환청까지 들렸다. ‘더, 더, 더- 더 덜덜 떨어라- 추악한 인간아-’ 그런 환청이었다. 그 환청을 돕듯 웅- 하는 세상의 떨림이 느껴졌다. 검은 연기 같은 것의 활발한 움직임이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그럴 리 없지만, 마치 겁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등에 로켓이라도 달고 있는 것처럼 빠르고, 충격적으로 등장했다. 여기서 ‘충격적’은 관념적인 표현이 아니다. 폭풍 같은 바람이 정말로 주변을 훑었고, 귀가 먹먹해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세연은 반사적으로 “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등장한 사람은 고개를 돌려 세연을 바라봤다. 세연도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세연은 그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라는데 놀랬지만, 상대측의 놀라움은 어째선지 훨씬 더 큰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엇!”하고 그는 헛숨 들이키는 소리를 냈다. 그의 표정이 짧은 시간 가운데 복잡하게 변했다.
“젠장!”
소년은 그 말만을 남기고 발을 박찼다. 날렵한 동체가 화살처럼 날아 공간을 좁히며 검은 안개 같은 것을 향했다. 사람 같지도 않은 속도였다. 이어, 또 한 사람이 허공에서 내려앉았다. 풍채 좋은 노인이었다. 세연은 그와도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그도 놀란 듯 표정을 복잡하게 변모시켰다.
“아가씨는 우리가 보입니까?”
노인이 물었다. 거무스레한 괴물이나 그와 싸우고 있는 소년보다도 오히려 자신 쪽에 훨씬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세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그야...”
“흠.”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며 노인은 고개를 젖고는 세연에게 다가갔다. 세연은 무서움을 느끼며 뒤로 몸을 뺐다. 노인인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겁먹지 말아요.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세연은 그 노인의 미소를 믿어도 좋을 것 같다고 느꼈다. 곧 노인의 손길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 세연은 눈앞의 세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녀는 잠들었다.
한편, 소년, 그러니까 은결과 사념체와의 싸움도 한결 격해졌다. 은결에게 당했을 때보다 한결 강해진 듯, 그것의 움직임은 영활하고 신속했다. 명확한 실체가 없이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몸을 바꾼다는 것도 싸움에 임해 피곤한 요소 중 하나였다.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대지의 모든 것을 빨아올리려는 듯 춤췄다. 빨려 들어간 모래는 거대한 황색 폭풍이 되어 시야를 가렸다. 자갈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범위내의 사물을 짓이겼다. 무거운 바위가 주춤주춤 허공으로 올라섰다 내리꽂히며 주변의 수목을 우지끈 부러뜨렸다. 은결의 할아버지는 거기 말려들지 않도록 소녀를 안고 주변으로 물러섰다.
그렇지만 은결은 대지에 뿌리가 박힌 것처럼 꼿꼿하게 선 채 그 폭풍 가운데서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운동에너지를 품은 자갈과 바위가 그의 전신을 강타했지만 그때마다 빛의 광막 같은 것이 생겨나며 그 공격을 막아냈다.
-죽어죽어죽어
세상을 흔드는 대기의 요동 가운데 그런 사념이 강렬하게 뒤섞여 있었다. 은결은 싱긋 웃었다. 역시 자아가 발생한지 얼마 안 되는 탓인지 그 제어에도 미숙했다. 좀더 노련했다면 감정을 발함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은결은 쉽사리 공격하지 않았다. 지난번 같은 실수는 피해야 했다. 그는 이 사념체를 확실하게 소멸시킬 생각이었다.
갑자기, 대기의 흐름이 멈췄다. 후두둑- 돌비가 쏟아졌다. 황색 대기가 점차 스러졌다. 은결은 호흡을 조절하며 사념체의 기운을 읽었다. 이것으로 끝일 리는 없었다. 여차하면 자신쪽에서 추적할 수 있도록 힘의 배분도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죽어라!
사념체가 은결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지난번과 같은 생각 없이 저돌적인 돌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덟 방향으로 갈라지며 은결의 전신을 장악하듯 날아들었다. 은결은 짧게 숨을 들이키며 입술을 세게 닫았다. 그의 눈이 매섭게 빛났고, 사념체의 공격이 닿기 바로 앞서 그의 어깨가 움직였다.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은결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공격을 피해냈다.
이어 그는 왼손을 들어 다른 곳에서 짖쳐드는 공격을 막았다. 콰앙-! 대포 터지는 소리가 나며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은결의 몸은 거대한 충격에도 튕겨나가지 않았다. 그의 발이 움직였다. 날아들던 사념체의 일부와 맞닥뜨렸다. 퍼엉! 폭발이 일며 사념체의 조각이 산산히 흩어졌다. 그제야 사념체는 눈앞의 인간이 처음부터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도망만이 살길이었다.
-으, 으, 으우아...
공포가 대기를 메웠다. 사념체는 허둥지둥 도망치려 했다. 은결이 짧게 외쳤다. “늦었어!” 그의 발이 대지를 박찼다. 한줄기 빛 마냥 은결의 몸이 날았다. 허공에서 그는 영활하게 몸을 움직여 사념체의 정 중앙에 자신의 발을 박아 넣었다. 접촉면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포위하듯 사념체의 양 옆과 뒤, 아래와 위로도 보라색 마법진이 출현했다. 사념체는 마법진의 감옥 가운데로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출현했던 모든 진이 반응했다. 막대한 에너지의 장막과 그 반응으로 그것은 존재의 근저부터 소멸되어 나갔다.
-끄아아!
발성기관이 없는 그것의 비명은 대기를 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의 한 구석을 할퀴는 것 같은 높은 관념의 비명이 길게 이어지다가, 결국 스러졌다. 허망한 비명이었다. 또다시 이국의 흙냄새가 났다. 깨끗하게 정리했지만, 마음은 유쾌하지 못했다. 은결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은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 했다. 이것으로 끝이구나.”
은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답했다.
“할아버지, 이 녀석들 아무래도 준정령이었던 것 같아요. 자아형성이 완료된 녀석과 싸워보니 읽을 수 있었어요.”
“사념의 핵이 말이냐?”
“예. 단지 사념의 양이 많다고 해서 언제나 이런 녀석들이 발생하는 건 아니니까요. 오래도록 묵어, 정령에 준하는 존재가 되려던 것이 되지 못하고 스러진 조각 같은 것들에, 사람의 사념이 무수히 접합되어 이루어졌던 존재인 듯해요.”
“그러냐.”
“...깊은 증오를 느꼈어요. 단지 사념에 묻은 사람들의 증오가 핵을 통해 구체화 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핵심은 아니었어요. 사념을 통해 배운 증오라는 감정을 자신의 체험에 덧붙여 스스로의 감정을 구체화 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 인간에 의해 파괴당한 데 대해 맹렬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어요.”
은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부러진 수목들 사이로 넓게 뚫린 구멍으로는 넓은 하늘의 모습이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마도, 중국이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벌목당한 숲 가운데 한 곳의 종합적인 기운이나 의지 정도 되는 것이었겠죠. 1998년부터 중국정부는 벌목을 금했다고 하지만, 역시 급격한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가 자연을 생각하긴 힘든 법이니까요. 그것이 벌목의 결과 중 하나인 황사를 타고, 사념을 접해 힘을 품게 됨으로서 인간에게 복수를 하려 했다니, 인과응보라면 인과응보인걸요.”
“...인간에 대해 증오를 품은 존재가 자아까지 가진다면 뒷일을 감당키 어려운 법이니, 오늘 네가 이 녀석들을 깨끗이 처리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은결은 할아버지의 대답이 말 돌리기라는 것을 안다. 그것이 자신을 생각해서라는 것도. 은결은 슬프고 희미한 미소를 입가로 띠며 마지막 문장을 말했다.
“할아버지 말이 맞아요. 그때 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쉽게 수그러들지도 않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것보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사고 사이로 끼어들며 성큼 은결 앞으로 걸었다. 은결이 당혹감을 표시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자, 받아라.”하고 간단히 말하고는 안고 있던 소녀를 떨어뜨렸다. 착한 학생인 은결은 반사적으로 소녀를 받아들었다. 녹아들듯 부드러운 동체의 감촉이 손으로 전해져 왔다.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가벼웠다.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기분 좋은 향기를 풍겼다.
“어, 어어-”
은결은 당황한 표정으로 소녀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나 은결의 할아버지는 벌써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런 일에 능숙히 대처하는 것도 다 수행의 일환이니라. 그럼 마지막까지 깔끔히 처리하고 돌아오너라.”
“하, 할아-”
은결의 애절한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발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은결은 멍청히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다 문득 깨달은 듯이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잠든 소녀의 모습이 눈 안에 들어왔다. 미래와 같이 살며 미녀에는 꽤 익숙해 져 있지만,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은결은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착하고 성실한 학생 은결로서는, 이러나저러나 고뇌의 시간이었다.
*‘블루 보이’ 은결!
*어떻게 어떻게 4일이란 기한에는 맞췄습니다. 음, 역시 힘드네요. 한 한권정도 비축을 마련하고 연재할걸 그랬나.(-_-;) 빠른 연재가 가능하도록 여러분의 응원을!
*이 글이 퇴마물이냐 하면, 미묘합니다. 저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 뿐, 그 글의 장르적 분할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제가 그런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독자의 반응을 고려한 글쓰기 전략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냥 속편하게 판타지라고 생각해 주세요.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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