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희망을 위한 찬가 - 소년, 은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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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 고등학교의 운동장에는 서너 학급이 나와 체육 수업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은결의 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간단한 준비운동을 마치고 체육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유로이 움직여도 좋다고 말했다. 모두들 기뻐했다.
곧 남자들은 축구를 시작했고, 여자들은 작은 그룹 몇몇으로 나눠 운동을 하거나 잡담을 나눴다. 넓은 운동장은 이미 소란으로 가득했다. 봄의 햇살이 발랄한 젊은 생명들 위로 따스하게 쏟아졌다.
하지만 은결은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근처 파고라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쪽을 택했다. 파고라의 지붕을 덮고 있는 덩굴식물의 잎이 부드럽게 봄의 햇살을 거두며 독서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페이지를 조용히 넘겨가는 은결의 모습은 진중했다.
그때 뻥- 하고 공을 차는 소리가 멀게 들려왔다. 멈추듯이 허공을 날던 공은 곧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통! 작은 먼지구름이 일며 축구공이 기세 좋게 튀어 올랐다. 은결이 앉은 데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학생 한명이 공을 회수하러 부리나케 달려왔다.
“간다!”
기세 좋게 외친 학생은 공을 대지에 고정시키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더니 힘차게 공을 찼다. 다시금 뻥- 하는 소리가 났고 공은 시원하게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공을 찬 학생은 몸을 돌려 은결에게로 접근했다.
“뭘 그리 읽고 있냐?”
“아, 별거 아냐.”
하지만 은결은 페이지를 덮지 않았다. 학생은 은결이 읽고 있던 책을 살짝 덮어 표지를 확인했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라는 글이 회색 표지 위에 다이내믹하게 찍혀 있었다. 다시 은결이 읽던 페이지로 책을 넘긴 학생은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재밌어?”
“어, 뭐 그럭저럭.”
은결은 머쓱하니 답했다. 학생은 퍽이나. 라는 표정을 되돌리며 말을 이었다.
“흐음- 책도 좋지만 가끔은 같이 축구도 하자. 너도 샌님소리 듣기 좋을 리는 없잖아. 그리고 책만 파면 여자애들이 싫어한다고.”
은결은 피식 웃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요 한 달을 통해 그의 별명은 샌님으로 고착되어 있었다. 체육 시간 마다 책을 가지고 나와 읽는 것은 물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도 흔히 책을 읽는 은결의 모습에 반 친구들이 붙여준 아주 합당한 별명이었다.
“충고 고마워. 그... 이름이 정-”
“정 민성. 잘 기억해 두라고.”
민성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은결은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새 학기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감이 남아 있다. 이렇게 먼저 말을 걸고 상대를 유도해 허물을 트는 이들의 존재는 어느 집단에서나 소중한 법이다.
“그래. 나는 박-”
“아아, 알고 있어. 박 은결이지?”
길게 설명할 필요 없다는 듯이 손을 들어 은결의 말을 막으며 민성이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학교 최고의 미녀인 1학년 박미래 양의 오빠니, 남성 제군의 대부분은 네 이름을 알고 있을 거란 말야.”
“아, 그래?”
물론, 은결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어이- 민성!” 그때 멀리서 민성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성은 고개를 돌렸다. 축구를 하던 학생들이 손짓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축구하는데 갑자기 한 명이 빠지면 역시 곤란할 수밖에 없다. 민성은 머리를 긁으며 은결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럼 좀 있다 보자.”
“응.”
민성이 운동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봄바람이 세게 물었다. 요 며칠 일대에 바람이 세게 불었지만 이것은 유독 강했다. “꺄악!” 먼 곳에서 모여 놀고 있던 여학생들 사이로 비명이 일었다. 공을 차려던 남학생의 눈에 모래가 들어갔고, 그는 발목을 접질렀다. 학생들이 걱정하며 주저 않은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희미한 황색 먼지 구름이 멀리까지 퍼졌고, 은결이 읽고 있던 책으로도 그 모래가루가 스며들었다. 은결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눈을 좁히며 시선을 던졌다. 모래가루가 날아와 그의 안경을 희미하게 더럽혔지만 은결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느긋한 황혼으로 세상은 혼곤했다. 황혼에 젖은 은결은 피곤한 어깨를 두들기며 다른 학생들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복도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한 시간 전까지 느껴지던 피로한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진지 보이지 않았고, 새로운 활력으로 기쁜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며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무수한 대화와 웃음으로 복도에 가득했다. 그 시장바닥에 비길만한 소란이 혼곤한 황혼의 느긋함을 새로이 채색했다.
“여, 샌님!”
그리고 은결은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단정치 못하게 옷을 챙겨 입은 세 명의 남자가 조소하는 것 같은 미소를 띄며 은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더처럼 보이는 가운데 학생은 특히 거구였다. 아직 대화를 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같은 반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은결이 기억하기에 다른 학생들이 말하길 그 세 명은 중학교 때 싸움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차례대로 여우, 고릴라, 들개가 별명이었다. 누가 지은 건지 센스의 ‘센’자도 못 찾을 별명이었다.
‘뭐 샌님보다는 낫겠지만.’
은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면 저 세 명에게는 상대를 때려눕혀 불구로 만들었다느니, 마약을 했다니 하는 소문도 따라붙어 있었다. 물론 은결은 믿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삥 정도는 뜯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야?”
은결이 묻자 세 사람 가운데 중간에 있던 학생이, 그러니까 ‘고릴라’가 다가와 은결의 목에 팔을 둘렀다. 옷과 입김에서 담배냄새가 났다.
“별건 아니고 혹시 너 괴롭히는 놈이 있다던가 하지 않아?”
의외였다.
“그런 사람 없어. 걱정 고마워.”
“그래? 그럼 다행이고. 혹시라도 그런 녀석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 아주 박살을 내줄 테니까. 나는 약해보인다고 누구 괴롭히고 하는 새끼들이 제일 싫어. 남자라면 정정당당해야지. 안 그래?”
그러면서 그는 주먹을 쥐고 손바닥을 쳤다. 빠악! 하는 소리가 박력 있게 퍼졌다. 은결은 피식 미소 지으며 “그래.”하고 답했다.
“그, 그런데 말야-”
“응?”
“저기, 네가 1학년에 미래 오빠라며?”
이로서 의외성의 뿌리가 드러났다.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는 이유 없는 선의란 없기 마련이다. 은결은 한숨을 쉬었다. 이번으로 다섯 번째였다. 새 학기 시작한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랬다. 앞으로 이년은 더 시달릴 걸 생각하면 좀 괴롭다.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미래는 한 번도 누구를 사귄 적이 없거든. 격침당한 녀석들 중에는 정말 굉장한 녀석들도 있었어.”
학생회장에 운동부 주장에 엘리트인데다 부잣집 아들내미에... 백마 탄 왕자님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녀석들도 많이 있었다. 이대로 가면 레드 바론을 넘어서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렇다고 남성 혐오증인 것 같지는 않으니 그 전적을 들으면서 은결은 미래의 ‘이상’이란 게 대체 뭔지 심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건 알고 있지만 오빠인 네가 다리를 놓아주면 말야, 어쩌면-”
“힘들걸.”
“뭐야!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네 동생이잖아!”
‘고릴라’는 버럭 화내며 말했다. 어느 정도는 위협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은결은 위축됨이 없이 말을 받았다.
“음, 그건 그렇지만 나도 몇 번 해 봤어. 결과는 너도 알 테고. 그리고 이게 문젠데, 그렇게 하고 나면 그 녀석 삐져선 한 사흘을 나하고 말 한 마디 안 하려 한단 말야.”
이유는 동생을 너무 쉽게 본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고심해서 소개해 줬을 때도 반응은 똑같았다. 그놈의 이상이 어디에 닿아 있는 것인지 은결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안드로메다 어디쯤으로 관광 나간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 틀림없이 개념도 같이 안드로메다로 관광 갔다고 봐야 한다. 눈도 이쯤 높으면 싸가지가 없단 소리 들어 마땅하다는 말이다. 어쩌면 외적인 기준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은결로서는 도저히 해결하거나 짐작할 방법이 없다.
“그, 그래도 말야, 일단 소개라도...”
은결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일단 담배부터 끊어. 네 몸에도 안 좋고, 미래도 무척 싫어하거든. 담배 피고 있는 한에는 네 기대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러니 끊고 나면 생각해볼께. 그럼 나는 이만.”
그리고 은결은 손을 흔들고 가볍게 세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고릴라는 얼떨떨한 인상으로 복도에 묵묵히 서 있었다. 뒤에 있던 두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야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건방지잖아.”
“벌벌 떨면서 알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잖아. 어쩔래? 그냥 조져버릴까? 말투 봐선 그 쪽이 편할 것 같은데?”
고릴라의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병신들아. 저런 건 건방진 게 아니라 근성이 있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툭하면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버릇은 좀 고쳐라. 조폭으로 먹고 살게 아니면 이제 고등학생인데 고쳐야지.”
“그럼 어떻게 할 건데? 포기할거야?”
“하기야 애당초 고원의 꽃이었으니-”
“닥쳐! 오늘부로 담배 끊는다!”
고릴라가 미간을 좁히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에엑?!”하고 비명 같은 감탄사를 올렸다. 고릴라가 다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뭐라 말하려 할 때 “어이, 거기 제군들.” 라는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거구의 중년 남자, 성천 고등학교의 체육교사이자 학생주임인 최용돈 선생이 서 있었다.
“자, 이쪽으로 와서 방금 전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던 주제에 대해 오붓한 대화를 나눠보실까.”
“아니, 그게-”
“나.눠.보.실.까.”
“예...”
그리고 세 사람은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처럼 최용돈 선생 쪽으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자전거 주차장에는 긴 그림자를 대지로 드리우며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은근히 붉은 태양 빛이 맑고도 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물들이며 이뤄내는 빛의 흐름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지루한 듯 하품을 했다가 다시금 시선을 운동장으로 돌렸다. 은결이 오고 있었다. 그는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며 “여- 기다렸어?”하고 물었다. 소녀, 미래는 버럭 화내며 답했다.
“늦잖아! 뭐하다가 이제 온 거야!”
물론 그녀가 원인이다. 하지만 그는 미래를 탓하기보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 그럴 일이 좀 있었지.”
그리고 은결은 미래의 머리에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꺅! 뭐하는 거야!”
“후, 소소한 복수라고나 할까.”
“씨이!”
툴툴거리는 그녀를 귀여운 듯이 바라보며 은결은 자전거에 올랐다. 미래는 기세 좋게 뒷좌석에 앉고는 은결의 허리춤을 잡았다. 은결은 느긋하게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가 쭉쭉 시원하게 앞으로 나갔다. 날이 따스했다.
*한 동안은 비축을 풀기로 했습니다. 양이 적으니 좀 그렇군요. 적당히 쌓인 뒤 4일 체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제목은 사실 여러분의 성원과 홍보가 있다면 좀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어도 별 문제없이 다른 독자분 들도 끌어들일 수 있겠지요. 여러분의 자발적인 도움을 이끌어 내도록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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