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망을 위한 찬가-2화 (2/300)

#   2-희망을 위한 찬가 - 소년, 은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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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전 푸른 어스름이 들어선 소년의 방은 어지러웠다. 쓰레기나 옷가지가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옷은 옷걸이에,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 대신에 책이 책장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책상 옆에, 컴퓨터 모니터 위에, 방바닥에, 침대 머리맡에, 책은 소년의 방 곳곳에 있었고, 그래서 알록달록한 디자인의 책들은 소년의 방을 어지럽게 채색하고 있었다.

“후-”

그 어지러운 방 한 가운데서, 갑작스럽게, 기지개도 펴지 않고 소년은 일어났다. 밝지 않은 빛 가운데서도 그의 오관은 단정했고, 눈은 맑았다. 준수하고 편안한 인상이었다. 시계는 정각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졸린 눈을 조금 매만진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는 옷을 챙겨 입었다. 가슴 주머니에 챙겨 넣은 하드 타입의 MP3 플레이어가 조금 묵직했다.

그리고 소년은 밖으로 나섰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 선 동네의 풍경은 고요와 활기가 뒤섞여 어쩐지 두근두근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서울이 멀지 않은 도시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새벽의 공기는 달았다. 소년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튼 다음 조깅을 시작했다.

이마에 땀방울을 달고 집으로 소년이 돌아온 것은 두 시간 뒤였다. 집안은 소년이 집을 나설 때처럼 고요했다. 그는 자신의 옆방에 노크를 했다. 대답은 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 취향의 방이었다. 멋진 연예인 포스터가 붙어있지는 않았지만, 인형이라던가, 옷이라던가 화사하고 부드러운 색의 물건이 많았다. 여동생의 방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소년은 침대로 가 자고 있는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미래야. 일곱 시다. 일어나.”

“우웅-”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소녀는 소년이 계속 깨우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불을 내렸다. 검고 긴 머리의, 어리지만 굉장히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겨우 뜬 눈으로 졸린 기운을 가득 담고 소녀는 예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빠, 좋은 아침.”

그게 무척 귀여워서 소년은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 아침 준비할 테니 얼른 씻고 준비해. 학교 지각하겠다.”

“후아아함. 어차피 오빠랑 같이 갈건데 뭐.”

“말해 두지만, 같이 지각해줄 생각은 없어.”

소년이 단호하게 말하자 여동생이 볼을 부풀리며 반론했다.

“쳇쳇! 자기는 맨날 5시에 일어난다고 내가 무슨 게으름뱅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데 말야, 만날 12시에 자서 5시에 일어나는 오빠가 이상한 거라고! 정각 일곱 시에 딱딱 맞춰 일어나는 미래는 충분히 부지런하다고!”

“예예. 알겠습니다. 하여간 어서 준비해.”

벌써 소년은 부엌에 서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있었다. 오래도록 해온 듯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미래는 계속 볼을 부풀렸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고, 그 도중에 불평 한 마디를 흘렸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또 아빠도 편찮으시기 전엔 그랬으니, 우리 집 남자들은 다 왜 이리 괴짠지 몰라. 정상은 나 밖에 없는 것 같다니까.”

“누가 괴짜라고?”

벌컥, 화장실 문을 열고 풍채 좋은 노인이 등장했다. 개량 한복을 입은, 호호 백발의 도인 같은 노인이었다. 미래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녀의 머리가 짧았더라면 위로 삐쭉 올라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뭐예요! 간 떨어질 뻔 했잖아요!”

“껄껄. 그러기에 하늘에 부끄러울 짓은 해서는 안 되는 거란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라는 말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지.”

‘천망회회 소이불루’란 하늘의 그물은 크고 커서, 성긴 듯 하여도 놓치는 바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한때 악인이 성한 듯 보여도 결국에는 다 패망함이 세상의 섭리라는 뜻으로 도덕경 73장에 기원을 둔다. 하지만 도덕경 73장이든 덕도경 36장에 나오든 그런 말 따위,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그런 재미없는 책 붙잡는 건 자기 집 괴짜들로 충분했다.

“몰라요!”

미래는 버럭 화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 닫을 때 일어난 쾅, 소리가 강렬했다. 노인은 그것을 보고 다시 한 번 껄껄 웃고는 시선을 소년에게로 돌렸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오늘 저녁이나 돼서 오실 줄 알았는데.”

“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단다.”

답하는 노인의 말투는 방금 전의 호탕함과 어울리지 않게 어딘지 아련했다. 소년은 그 아련함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표정을 더 밝게 하며 말했다.

“아침 안 드셨지요? 지금 만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럼 오랜만에 우리 은결이가 만든 식사나 한끼 해 볼까.”

‘은결’ 그것이 소년의 이름이었다. 은결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저기, 어제 저녁에도 드셨는데.”

“...은결아, 그럴 땐 그냥 넘어가는 거란다.”

은결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쟁반을 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죽과 간장, 김치가 들려 있었다. 산화되어 가는 책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방의 사면은 입구와 창문을 제외하면 책장으로 메워져 있었고, 그 메워진 책장은 다시 책으로 메워져 있었다. 낡은 책들의 윗면으로는 곳곳에 포스트 지가 삐죽이 달려 있었다. 그 외에는 책상 하나와 옷걸이가 있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무수한 책으로 고결했고, 무수한 책으로 쓸쓸한 방이었다. 방 가운데의 이부자리에 한 중년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정돈된 선의 수척한 얼굴로는 병색이 완연했다.

“아버지.”

그가 은결의 아버지였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아아, 은결이구나.”

“죽 만들어 왔어요. 드셔야죠.”

“그러마.”

은결의 아버지는 차분하게 몸을 정돈하고 은결이 가져온 죽을 들기 시작했다. 그가 다 먹을 때까지 은결은 조용히 옆에서 기다렸다. 곧 은결의 아버지는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은결은 쟁반에 비워진 그릇을 담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은결인 나가고 문이 닫혔다. 은결의 아버지는 은결이 나간 방문을 한동안 바라보다 다시 몸을 누였다. 그는 슬펐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 은결과 1학년인 미래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다. 동네에서 자전거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성천 고등학교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게 같이 등교를 하고, 그 등교 수단은 자전거다.

“와아-”

미래는 은결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기분 좋은 듯 입을 벌리며 주변의 풍광을 살폈다. 벚꽃의 분홍빛 만개가 아침 햇살을 타고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시야의 뒤로 느긋하게 밀려가는 그 아름다움의 향연은 미래의 소녀다운 감수성을 깊게 자극했다.

“저기 오빠.”

“응?”

“이번 주말에 같이 놀러가지 않을래? 근처에서 벚꽃 축제 한다던데.”

“음, 미안. 이번 주는 일이 있어서 곤란해.”

미래의 볼이 부루퉁해졌다.

“뭐야, 이런 귀여운 여동생이 놀러가자는데, 여자 친구도 없는 주제에! 영광으로 알아야지! 흥! 핏! 쳇!”

“...너 오빠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다?”

“뭐, 뭐야 그럼 있다는 거야?”

당황한 듯, 미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은결은 오른쪽 볼을 긁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뭐 그야 없지만서도, 그-”

“흥. 당연하지! 누가 오빠처럼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랑 사귈까봐!”

다시 자신감을 회복한 미래가 기세 좋게 외쳤다. 은결은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반론했다.

“웃, 나, 나는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안 사귀는 거란 말야. 그 차이는 중요해.”

하지만 은결이 반론이랍시고 내놓은 말은 솔로 백 명에게 물으면 구십 다섯 명은 변명이랍시고 내놓을 대답이었다. 다시 말해 반론이 안 된다. 결정적인 승기에 미래의 표정은 한결 유유자적해졌다.

“예예. 어련하실까요.”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은결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의 승리가 마음에 들었음인지, 싱그러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로 피어 있었다. 은결은 툴툴대며 말했다.

“쳇. 그러는 너도 없잖아.”

“괜찮아. 나는 정말로 안 사귀는 것 뿐이니까.”

“흥, 말이야.”

“진짜야! 어제도 러브레터 받았는걸. 뭣하면 보여줄까?”

눈망울을 크게 하고 미래는 열변을 토했다.

“...됐네요.”

은결은 오빠로서의 존엄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느끼며 사양했다. 사실은 은결도 미래가 학교 내에서 굉장히 인기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녀가 인기가 있는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 부터의 일이다. 그녀가 인기가 있니 없니를 말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은결은 고등학교 2학년 올라와 미래를 소개시켜 달라며 접근하는 파리를 몇 번 만난 적이 있기도 하다. 불초한 오빠와는 달리 그녀는 정말로 ‘안’ 사귀고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녀는 교제 신청을 받아들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게 안 보이지만 고원의 꽃이다. 그것도 K2 꼭대기에 피어있다.

“그런데, 너무 비싸게 굴지 말고 한번쯤 교제해 보는 것도 좋지 않아? 너한테 격침당한 애들 이야기 들으면 내가 다 미안하더라.”

“싫어. 내 이상은 높단말야.”

입술을 삐죽거리며 미래는 볼멘소리로 답했다.

“쯧쯧.”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느긋하게 등교길에 오르던 두 사람은 한 골목을 스쳐 지나갔다. 학교 갈 때 흔히 지나치게 되는 곳으로 평범한 골목이다. 다만 오늘 아침은 평범하지 않았다. 콘크리트를 굳힌 골목길의 곳곳이 파괴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수도관 공사라도 하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그 파괴가 너무 불규칙적이었다.

“헤, 우리 동네에서도 진출했나보네.”

지나가는 말처럼 미래가 말했다. 은결이 그 말을 받았다.

“응? 뭐가?”

“그 산에서는 바위 부수고 도시에서는 길바닥 부수고 하는 거 말야. 가끔 씩 뉴스에도 나잖아. 우리 동네에도 나온 모양인데? 오는 길에 봤어. 처음 뉴스 들은 게 꽤 오래 됐던 것 같은데 그 치들은 질리지도 않나봐. 꾸준하네.”

“아아. 그 할 짓 없는 인간들 말이지? 길바닥 부숴먹어서 세금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만 산의 바위 부수는 건 정말 민폐지. 멋들어지게 늘어서 있던 바위가 보기 흉하게 박살난 채 치워지지도 않으면 산의 정취가 반은 죽어버리니까.”

은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미래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오빠는 굉장히 산을 좋아한다.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가장 자주 하는 것중 하나가 산행이니 오죽하겠는가.

“뉴스에서는 화약으로 그런 것 같다던데, 그런 것 치고는 잘도 안 걸리지? 그만한 소란인데 현장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화약 터지는 거 들은 사람도 없대. 왜 그러는 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이상해.”

“그러게 말야.”

“며칠 전에 우리 동네에서 좀 떨어진 데서 살인사건도 있었다고 하고, 요즘 이상하게 시끄러운 것 같애. 조심해야겠다.”

“잘 알면 학교 마치고 딴데로 세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야지.”

“흥. 그럴거면 자전거나 잘 태워 주시던가.”

“예예. 마님.”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교문 앞에 도착했다. 많은 학생들이 교문을 지나 학교로 들어가고 있었다. 청색 교복의 행렬은 싱그러웠고, 지어진지 얼마 안 되는 학교 벽의 페인트는 신선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카이첼입니다. 클라우스 학원을 끝내고 새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재는 클라우스 당시와 같이 4일에 한 화를 기본으로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성원에 따라 4일을 줄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후)

*제목은 희망을 위한 찬가인데, 가넷이 태클을 걸어 바꿀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쁘지만 고상한 제목은 사람들이 잘 안본다니. 나름대로 고민되는 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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