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가자 1988! (3)
“저요?”
오재훈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이 차장이 자길 알아보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 차장은 오재훈에게 다가왔다. 회귀 전의 그 건방짐과 오만함은 없었지만, 미세하게 그 느낌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 너. 너 오늘 사법고시 처음이지?”
이 차장은 오재훈이 어리고, 시험장 앞에서 조금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그가 이곳에 처음 온 것을 알아챘다.
오재훈은 몇 년 뒤에나 사법고시를 보기 때문에, 지금 위치에 관해서는 잘 몰랐다. 그래서 처음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 것인데, 그게 이 차장의 눈에는 많이 어벙벙해 보였던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좋아, 오늘 내가 너의 1일 스승이 되어주겠어.”
이 차장은 사실 그때까지 고학생이나 다름없었다. 여러 해 동안 사법고시를 치르면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하고, 많은 고생을 해 왔다. 그래서 오늘 처음 시험을 보는 사람을 골라서 그를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을 생각이었다.
“네?”
“오늘 끝나고 밥값만 내면 내가 시험을 잘 보게 에스코트 해줄 테니까.”
오재훈은 이 차장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됐습니다.”
“뭐?”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본인 앞가림이나 잘 하시죠.”
오재훈은 단칼에 거절하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차장은 오재훈의 오만함에 순간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이 새끼가? 니가 잘 모르나본데? 여기 사람들 다 여러 번 만난 사이야. 우리 모두 두 번씩은 봐야 시험에 합격하고 그런다고! 너 내 얼굴 또 안볼 것 같지? 다음에 시험장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고, 또 법원에서 보게 될지도 몰라.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네네, 그건 그때 할 일이고요. 저는 그쪽이 제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말고 이만 가주시죠.”
이 차장은 오재훈의 말에 기가차서 소리 질렀다.
“너 두고 보자! 너 이번에 합격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너같이 싸가지가 없는 새끼는 이 바닥에서 혼을 좀 나봐야 해! 넌 십년은 고생할거다! 오만한 새끼.” “그러는 이창…… 당신이나 잘 하시죠.” “뭐? 너 지금 내 이름 말한 거냐?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이창민은 오재훈이 자신의 이름 앞 글자까지 이야기하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오재훈은 자기가 실수한 것에 놀라 당황하였지만, 이 차장의 수험표가 가방에 삐져나온 것을 보고 얼른 그걸 끄집어내며 말했다.
“여기 이창까지 써 있어서 그랬습니다. 됐죠?”
이 차장은 얼른 오재훈이 가져간 수험표를 빼앗아 들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건방진 새끼. 넌 오늘 꼭 떨어질 거다. 난 오늘 꼭 붙을 거고.”
이 차장은 오재훈에게 실컷 욕을 해주려다가 참고 돌아섰다.
오재훈은 이 차장이 오늘 시험에 떨어지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 놈을 자극해서 더 집중하게 만든 셈이다. 그럼 안 될 일이다. 그를 떨어지도록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이 차장이 방송에서 한 말이 기억났다.
이 차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물건을 땅에 떨어트리면, 시험에서도 떨어지는 징크스가 있다고 했다. 사법고시는 물론이고, 면허시험까지 그런 징크스를 이겨내지 못했다고 웃었던 그 장면이 생각났다.
“그래, 징크스!”
오재훈은 얼른 이 차장을 쫓아갔다. 이 차장은 마침 가방에서 커피를 꺼내서 마시고 있었다. 그걸 떨어트리면 될 것 같았다.
“이것 보세요! 어떻게 시험 보는 자에게 막말을 하십니까?”
오재훈은 쏜살같이 달려가서 이 차장의 오른손을 잡았다.
덥썩.
턱.
아아앗!
이차장은 갖고 있던 캔 커피를 바닥에 떨구었다.
“야!”
“앗.”
“으아아악!”
이 차장은 바닥에 떨군 캔 커피를 보며 고함을 질렀다. 징크스가 발현된 것이다. 그는 오재훈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죄송합니다. 커피는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너 내 징크스를…….”
이 차장은 말을 하려다 말고 생각했다. 이 자가 자기의 징크스를 대체 어찌 안단 말인가? 화는 나지만 이자에게 그런 말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꾹꾹 눌러서 참는 이 차장.
“제가 밥을 사 드리겠습니다.”
“됐어. 꺼져 빨리!”
“죄송합니다. 정말.”
이 차장은 오재훈의 등을 떠밀고는 도망치듯 갔다.
“오지 마, 너!”
오재훈은 이 차장이 당황하며 도망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넌 오늘 끝이야.”
오재훈은 상쾌한 기분으로 시험을 보았다.
이 차장은 아주 찜찜한 기분으로 시험에 임했다.
오재훈은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이 차장은 떨어졌다.
이 차장은 이날의 수치를 끝까지 기억하였다. 둘은 이번에도 원수로 남을 것이다.
후에 오재훈이 수석 합격자로 인터뷰를 한 것을 본 이 차장은, 그의 이름과 생김새 등을 깊이 새겨두었다. 언젠가 만나면 반드시 혼내주리라고 생각하면서.
* * * * *
준희는 열심히 학원에 다니는 척을 하면서 이 차장이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오재훈이 다 알아서 하겠지만, 박준수가 이 차장의 존재에 대해 극도로 안 좋게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전에 이 차장의 부모님이 시골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그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앞서 몇 군데 가게에 가긴 했는데, 그곳에는 아들이 여럿이거나 딸만 있거나 했다. 이 차장은 외동아들이기 때문에 그 근방에서 가게하면서 외동아들인 사람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그날도 준희는 학원에 가지 않고 오산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찾아야 할 텐데.”
준희는 오산역 근처에 있는 어느 가게에 들어갔다.
“어서 와. 혼자 왔어?”
국밥집, 가게를 지키고 있던 부부가 준희를 보며 반겨주었다. 준희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이 차장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네, 혼자 왔어요. 국밥 좀 주세요.”
준희는 의젓하게 앉아서 혼자 국밥을 먹었다. 부부는 어린 준희가 혼자 이곳까지 온 것이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정말 혼자 왔어? 이 근방 사는 거야?”
“아뇨, 서울서 왔습니다.” “뭐? 정말이야? 서울에 울 아들도 사는데.”
준희는 그 아들이 이 차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 이야기는 하덜 말어. 이번에도 또 떨어졌는데 여기는 안온다고 그 난리를 쳤잖여.”
시험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이 차장이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재훈이 이 차장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까지 듣게 된 셈이다.
“사법고사가 워디 쉬운감? 한번만 더 믿어달라고 하니까 그냥 믿고 기다려야지.”
두 부부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술술 풀었다. 준희가 국밥 한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 차장은 현재 노량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버티는 중이다. 이번 시험에 떨어졌으니 다음 시험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만큼 악으로 깡으로 시험을 칠 테니 이번에는 붙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부모님들은 장사를 접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들 때문에 접지 못하고 버티는 중이었다. 준희는 국밥을 다 비우고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어, 쪼만한게 밥도 잘 먹네? 똑똑해 보이네.” “네, 맛있어서 다 먹었습니다.”
“어이구, 말도 이쁘게 하네.”
“저 그럼 화장실에 갔다가 가볼게요.”
“어 그려, 이짝이여.”
아버님의 안내로 화장실에 간 준희는 몰래 그곳을 빠져나와서 주변을 살폈다. 이 집은 가게와 살림집이 붙어있는 형태였다. 즉 같은 건물의 우편함을 뒤지면 이 차장이 사는 곳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준희는 몰래 우편함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좀만 기다려봐야겠네.”
준희는 그 근방에 숨어서 기다렸다. 우편배달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 동안 학원에 가지 않고 매일 이곳에 온 준희.
“편지요. 아들 편지네.”
며칠을 드나든 끝에 드디어 이 차장이 보낸 편지를 보게 된 준희.
아줌마와 아저씨가 보기 전에 얼른 편지를 낚아챘다. 그곳에 주소를 스캔한 준희는 얼른 메모지에 옮겨 담았다.
그때, 우편배달부의 소리를 들은 아저씨가 얼른 가게를 나왔다. 준희는 가지고 있던 편지를 얼른 아저씨에게 전달했다.
“바닥에 떨어졌어요.”
“어, 고맙다. 너 또 왔니?”
“네, 국밥이 맛있어서 왔어요.”
“어이구, 그래? 어서 들어와.”
준희는 어쩔 수 없이 또 국밥을 먹게 되었다. 취향이 아니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아줌마와 아저씨는 여전히 투닥거리면서 아들의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에게는 정말 소중한 아들이겠지. 준희는 아줌마가 암에 걸려서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지금 살짝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밥을 다 먹고 나서 아줌마의 앞에 섰다.
“아줌마.” “어?”
“아줌마 나중에 암 조심하세요. 십년 뒤부터는 건강검진 꼭 받으셔야 해요.”
“뭐? 그게 무슨 말이니?” “애가 뭔 이상한 소릴 하는 거야?”
아줌마와 아저씨가 준희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준희는 무당인 척 하기로 마음먹고 아줌마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내 말이 맞으니까 명심하세요. 밥이 맛있어서 보답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준희는 아줌마와 아저씨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걸 알지만, 딱히 뭔 말을 한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89년도에 벌어질 가장 큰 사건이 생각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거예요. 그럼 제 말을 꼭 잊지 않고 실천하셔야 해요.”
“엥? 얘가 자꾸 이상한 소릴 하네?”
“밥 다 먹었으면 얼른 가서 잠이나 자렴. 잠을 못자서 이상한 소릴 하는 거야.”
부부는 준희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지만, 후에 진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암보험을 들었다. 그리고 준희의 말대로 십년 뒤부터 꾸준히 암 검진을 했다. 결국 이 차장에게 반지가 갈 확률을 조금 줄일 수 있었다.
* * * * *
오재훈은 사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마담뚜의 전화를 수차례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전화에 흔들리지 않았다. 향후 주식이 돌아가는 방향이나 땅값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돈 걱정이 없이 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는 김설아와 준희 사이에서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의 마음에 다른 여자가 들어올 공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한번은 만나주지 그러냐?”
동기 녀석이 오재훈을 구슬리며 말했다. 아마 마담뚜가 동기에게 오재훈을 꼬시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오재훈은 동기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난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요. 아직 어린데 벌써 결혼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냥 연애만 해도 되지. 꼭 결혼하라는 것은 아닌데.”
동기는 오재훈의 학교 선배이면서 동기이기 때문에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오재훈은 한 번만 만나기로 하고 대답했다.
“한 번만 만나보죠.”
“그래! 잘 생각했어.”
그렇게 억지로 선을 보러 간 오재훈은 선 자리에 나온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저 여자는?”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