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안녕, 설아 씨(2)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오재훈에게 반지를 넘겨야 한다. 나는 물을 들이켰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이제부터 해야 하니까.
꿀꺽 꿀꺽.
내가 갑자기 물을 들이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오재훈, 그도 지금 중대한 순간인 것을 깨달은 듯 했다.
휴우.
한숨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한다. 김설아를 보내주는 한이 있어도 이 차장을 막아야 하니까.
그때, 병실 문이 조금 열려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 뒤로 누군가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회귀의 반지를 주면 다 돌릴 수 있다고 믿어?”
내 말에 오재훈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살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죠! 주세요. 제가 다 돌려놓겠습니다.”
오재훈은 절실했다. 자기의 죽은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데, 마다할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잘 들어. 회귀의 반지는 있어.”
꿀꺽.
오재훈이 침을 삼켰다. 생각은 했지만, 정말 그렇다고 하니 뭔가 긴장이 된 듯 했다.
나는 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뭐냐면, 이 차장에게도 반지가 있다는 거야. 우리가 이 차장의 짓을 바꾸어 놓으면 그는 또 자기의 반지를 이용해서 바꿀 거라고.”
이 차장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런 짓을 해왔다.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 차장, 그놈에게도 그 반지가 있다고요? 그러면 그자식도 회귀인지 뭔지를 한 겁니까?”
“그래, 나도 회귀를 하였고, 그래서 내 인생을 바꾸었어.”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내가 바꾸어놓은 그의 인생에 관해서 지금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1997년으로 회귀를 했고, 그때부터 한 모든 일들은 전부 미래를 알고 한 이야기였지.”
“그랬군요. 형님이 갑자기 너무 잘 나가기는 했었죠.”
오재훈은 그때 일들을 생각하며 이야기했다. 그때, 오재훈과 나 사이엔 김설아가 있었다. 오재훈은 김설아와의 일이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그때, 김설아 씨 아니었으면 우리 인연도 없었을지도요. 아니지 준희 때문에 다시 만났겠군요. 준희와 나는 운명이니까.”
오재훈은 준희와 자신이 운명의 짝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아직 미래의 일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네.”
“미래의 일? 그게 뭐죠?”
“자네는 대통령이 될 거야.”
“그렇군요? 그럼 준희가 퍼스트레이디인가요?”
오재훈은 자신의 미래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지금 아이 때문에 겪은 고통은 잠시 잊은 듯했다.
나는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회귀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해리가 나까지 기억해내었다고 하니, 아마 그럴 것이다. 지금 속여 놓고 나중에 알게 된다면, 그건 정말 안 될 일이었다.
내가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자, 오재훈은 뭔가 눈치 챈 듯했다.
“설마, 김설아가 내 아내입니까? 아니죠?” “그건…….”
나는 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김설아를 빼앗은 격이니, 매우 미안한 까닭이었다.
“준희가 내 진짜 연분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아닌데? 그건 정말 아닌데요? 나는 준희를 사랑하는데?”
그러자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라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도 김설아를 사랑해. 진심으로.”
“믿을 수가 없어. 그럼 김설아도 형님의 천생연분이 아니군요?”
“그런 셈이지.”
후우.
이번에는 오재훈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오재훈은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병실을 왔다 갔다 했다. 정말 힘든 결정을 하는 듯 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그럼 내가 회귀의 반지를 받고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차장을 막을 방법은 뭐죠?”
“이 차장이 회귀를 한 것 자체는 이미 기정사실이야. 그가 회귀하기 전, 그니까 98년도에 갔으니까 89년도로 회귀를 했을 거고, 그 전으로 돌아가서 그를 막아야 하겠지. 그래서 그가 반지를 얻지 못하도록 해야 해.”
“결국 반지만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이 다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 생각이 맞죠?” “그런 셈이지.”
오재훈은 다시 한 시간 동안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가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야죠. 가긴 해야 합니다. 이 차장 그 미친놈은 내 손으로 처단할 생각이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그래, 고마워. 자네만 믿을게.”
오재훈은 나를 잠시 동안 쳐다보았다. 어제 하루사이 겪었던 고통이 내 얼굴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힘들었군요? 김설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 아니라는 말은 못하겠어.”
오재훈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도 준희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반지는 어딨습니까?” “내일 가져올게.”
“좀 더 빨리 가고 싶은데요.”
오재훈은 하루라도 빨리 이 차장을 손봐줄 생각에 바빴다.
하지만 나는 하루라도 늦게 그를 보내고 싶었다.
“나 헤어지는데 하루만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
“아, 그죠. 그럼 언제든지 말씀하시면 바로 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고마워.”
오재훈과 긴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시밭 위를 걷는 것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내딛어야 한다. 모두를 위해서 그리해야 한다.
* * * * *
“뭐하다 이제 와요? 우리 애들이 이제 엄마랑 아빠를 얼마나 잘하는지 알아요?”
김설아가 우리 애들을 보여주며 방긋 웃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같이 웃어주는데, 그게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너무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고통스러웠다. 간직하고 싶었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나마.
“우리 가족사진 찍을까요? 당장 가자. 가족사진 찍자.” “지금? 지금 당장요?”
“당장 가요.”
나는 김설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관으로 향했다.
동네 작은 사진관에 우리 가족이 들어서자, 사진관 주인이 자다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에에엥? 김설아 씨?” “안녕하세요.”
김설아가 멋쩍게 웃으며 인사하자, 주인의 눈이 하트로 바뀌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주인은 너무 놀라서 자신의 얼굴을 꼬집었다. 아픈지 눈이 휘둥그레진 주인.
나는 그를 배려할 여유가 없기에 살짝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생시입니다. 얼른 사진 좀 찍어주세요.”
“지금? 아 네네 지금 찍어야죠.”
김설아는 여전히 친절한 얼굴로 주인을 보며 말했다. “우리 첫 가족사진이에요. 잘 좀 찍어주세요.”
“아 당연하죠! 영광입니다.”
찰칵, 찰칵.
“아이고, 이거 가족이 다 배우입니다. 아무렇게나 찍어도 예술이야!”
사진사는 신이 나서 셔터를 눌러댔다. 아이들도 다행히 울지 않고 사진을 잘 찍었다. 배우의 딸들이라 그런가 싶었다.
“감사해요.”
“저 근데 이거 언제 뽑을 수 있을까요?”
나는 한시라도 빨리 가족사진을 얻고 싶었다. 오재훈이 과거를 변경해도 사진은 그대로 있길 바랬다. “큰 사진이라 대략 일주일은 걸릴 것 같은데요?”
“내일 안 될까요? 작은 사진으로 내일 미리 좀 뽑아주시고 큰 사진은 천천히 해주시고요.”
“아, 그럽시다. 김설아 씨 가족인데 신속하게!”
사진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바로 허락하였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돈을 실컷 주고서라도 뽑을 생각이었다.
“그럼 내일 되는대로 연락주세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내일 당장 죽을 사람도 아닌데.”
김설아가 농담을 하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애써 누르고 그녀에게 웃어주었다.
“그냥 빨리 우리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려고요.”
“나도 그러고 싶긴 해요. 우리 애들이 좀 이뻐야지.”
찰칵, 찰칵.
우리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겼다.
그리고 다음날 사진사에게 연락이 왔고, 사진을 받자마자 지갑에 끼워 넣었다. 이제 다시는 이 조합을 실물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지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사진사는 내가 사진을 보고 울자 어쩔 줄 몰라 하며 휴지를 가져다주었다.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시겠어요?”
“네…….”
사진사는 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이 말라 없어질 때까지 울었다.
* * * * *
집에 간 나는 서둘러 가방을 쌌다.
“우리 여행 갑시다. 제주도로요.”
“네? 갑자기?” “빨리 갑시다. 아이들은 당신 어머니가 봐준다고 했으니까 빨리 가요.”
“준희 아가씨 아이가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래요.”
김설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그냥 하루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해요. 우리 1박2일만 신혼생활로 돌아갑시다.”
“그럼 아가씨도 같이 가요.”
“제발, 하루만 우리 맘대로 살아봐요.”
내 간절한 눈빛을 본 김설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나는 그 뒤로 김설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서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절경을 뽐내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김설아는 오랜만에 숨을 깊게 쉬었다. 그녀도 사실 힘들었겠지. 육아, 그것도 한꺼번에 둘을 키우는 일이 만만하지 않을 터였다.
“공기가 정말 좋네요.”
“실컷 맡아요. 우리 오늘 하루 종일 자지 말아요. 박카스 계속 먹으면서 참았다가 해 뜨는 거 봐요.”
“네? 아니 무슨 그런 여행이 다 있어요? 스파르타야?”
나는 김설아와 있는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잠을 자는 것 따위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한 김설아는 내 마음도 모르고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는 자는 것도 정말 예쁘다. 잊고 싶지 않게끔.
나는 자는 김설아를 몰래 안고서 해변으로 향했다. 김설아는 내게 안겨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해가 떠올랐다.
“해가 뜨네요.”
“어맛, 여기가 어디야? 나 안고 왔어요?”
“네, 저기 봐요. 해가 막 뜨네요.”
“우와, 정말.”
김설아는 내 품에 안겨서 해가 뜨는 걸 보며 기뻐했다.
나는 행복하면서 슬픈,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미칠 것 같았다.
“오빠라고 한번 해봐.”
“엥? 갑자기?” “우리 한번만 말 트자. 오빠라고도 한번만 해줘봐.” “아우, 정말 왜 그래요.” “한번만, 한번만 해줘.”
“오빠아!”
“고마워.”
그렇게 잠시 동안 그녀와 나는 아주 행복했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만큼.
* * * * *
“오빠!”
공항에 막 도착했는데, 준희가 내게 달려왔다.
“아가씨?”
“어 여긴 왜 왔어? 너 괜찮아?”
“언니, 잠시만 여기 있어요.”
준희는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구석으로 끌고 갔다.
김설아는 당황해하며 그대로 서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나도 가고 싶어.”
“무슨 말이야? 어딜 간다고?” “회귀의 반지! 그거 나도 달라고!”
“뭐?”
준희도 알아버렸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