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되는 놈은 트렁크에서도 세상을 움직인다(3)
“세상에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그 분장을 하고.”
회장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미용 사업 쪽에서 내가 꽤 유명세를 달리고 있어서 눈여겨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숨겨 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김주원과 각별한 사이였잖아요. 내 그 정도는 알지. 아버지가 김주원 밑에 있었잖아요.”
회장님은 나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고맙게도.
어릴 때부터 노력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간 회장님. 뼈를 깎는 노력을 거듭하며 그의 인격도 많이 다듬어져 있었다. 회귀로 온갖 수를 거듭하여 올라간 누구와는 달리.
“우선 감사드립니다.”
나는 앞서 나를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귀 때문에 그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감사는 꼭 하고 싶었다.
“뭘?”
“저를 믿고 나와 주셔서요.” “아, 동자님이 내게 해준 일이 얼마인데요? 이제 동자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거예요.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요.”
회장님은 그간 내가 맞추었던 일들을 세세히 다 기억하고 있었다.
회장님과 좀 더 편한 관계가 되려면 일단 말부터 놓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저 정식 무속인도 아니고, 존대 받을 이유가 없으니 말 놓으시죠.”
“아, 그게 쉽게 안 되네……요. 하하 천천히 할게요.”
“네, 그동안 답장을 해드리지 않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바빴습니다.”
“그래요. 알아요. 그럼 신당도 없을 텐데. 그쪽이 모신 신이 안 좋아하지 않나요?”
“아, 저는 하늘에 계신 신이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하.”
회귀자라고 말 할 수도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오호, 그렇군요. 어쨌든 내가 알고 싶은 것들만 알려주면 되니까.”
“그럼 제게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요?”
“아, 요즘엔 그런 게 없어요. 아주 잘 풀리고 있는 중이라서.”
“네.”
회장님은 잠시 내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신중한 모습이랄까?
“그것보다 내가 그쪽을 보면서 항상 생각해왔던 것을 말할까 해요.”
“네? 저 박준수 말씀이시죠?”
“그래, 박준수 회장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죠.”
“아이구, 회장님이라뇨. 그냥 박군이라고 해주세요.”
회장님은 내가 생각보다 훨씬 예의 있는 분이었다. 앞서 내게 알아낸 정보 덕분인지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미용 사업은 요새 잘 되고 있으시니 걱정 없겠네요?”
“네, 제가 인도를 받고 있어서 잘 됩니다. 하하.”
“거기서 멈출 겁니까?”
회장님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는 그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뭘 멈춘다는 말씀이시죠?”
“그 미용 재료만으로 끝낼 거냔 말이죠.”
“아.”
회장님은 여러 개의 계열사를 갖고 있는 분으로 재계 10위 안에 드는 재력을 갖고 있다. 김주원이 회장님을 경계하는 것도 그의 뛰어난 사업적인 수완 때문이었다. 비록 무당에게 의지하여 빈축을 사긴 했지만, 덕분에(?) 성공적인 그의 사업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었다.
“내가 회장님을 보며 느낀 것이에요. 사업이 미용에 국한되어 있어요. 재능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왜 그 하나만 가지고 있느냔 말이지. 이제 좀 더 뻗어나가야 하지 않나요?”
회장님의 말은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가 미용 말고 무엇으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는 미용 아니면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 말 잘했어요. 그 말은 미용은 무조건 남보다 많이 안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미용으로 사업을 확장해야지.”
“어떤 걸로 해야 할까요?”
“미용 기구 사업! 미용인에 국한되지 않은,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하는 미용 기계를 만들어야죠. 필립스처럼.”
“아, 그렇겠네요.”
“우리 회사에 이미 여러 기술력이 있고, 자네는 미용 관련해서 많은 지식이 있으니 같이 조인하면 더 큰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어때요?”
“아, 그럼?”
“네, 나와 박준수 군이 합작하여 한국형 필립스를 만들어 봅시다.”
“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사실 나는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미용 기구는 매직기와 드라이기, 고대기, 미스트기, 에어롤 등에서 그친다. 미용을 보조하는 가전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야의 발전이 늦는 것도 있었다. 시장이 작고 한정되어 있으니 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보기엔 그 드라이기 시장이 아주 매력적이거든요. 집에서 드라이 안 쓰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죠. 선풍기처럼 다들 드라이기 하나쯤은 갖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럼 내 뭐 하나만 물읍시다. 드라이로 집에서 멋진 머리를 완성해 낼 수 있을까요?”
“네, 그죠. 대신 기술력이 필요하긴 합니다.”
맞는 말이다. 드라이 하나만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머리를 잘 만지는 것은 아니다.
“아 질문이 잘못 되었나? 그럼 드라이로 헤어스타일을 만들기 전, 머리를 말리는 작업은 누구나 하잖아요?”
“그렇죠. 드라이를 집에 다 놓게 된 이유가 바로 그거죠.”
“그럼 그 기능을 좀 더 업그레이드 시켜서 상용화하면 어떨까요? 좀 더 빨리 마르는 기구 말이죠.”
“네, 좋네요.”
다이*이 그런 기능이 업그레이드 되어 나왔다. 거기에 상하지 않게 하는 능력도 겸비되어 있다.
“그걸 쓰면 머리가 상하는 것이죠? 그럼 안상하게 하는 제품은 없나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머리가 빨리 마르고 상하지 않게 하는 제품.”
“하하, 말은 쉽네요. 그런 제품을 과연 만들 수 있느냐가 문제에요. 그게 만들어진다는 확신이 있어야 내가 그 분야에 손을 대거든요. 우리도 기술력을 좀 더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니까요.”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아이디어도 제가 갖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와우. 어쩌면 준수 씨가 그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준수 씨는 미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 같아요.”
회장님이야말로 감이 좋은 사람이다. 내게 진짜 그런 지식이 있는데, 그걸 감으로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전자제품 분야는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서 쉽게 뛰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요. 이제 동자님, 아니 준수 씨랑 같이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나는 나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를 트렁크에 가둔 놈은 재준은 물론이고 이 차장도 관련되어 있을 텐데, 그들에게 감사를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나와 그 회장님의 회사가 합병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났다. 순수한 합병은 아니지만, 둘이 합한 브랜드가 탄생하는 셈이다. 나름 성공적인 비즈니스가 시작되었다.
* * * * *
기사가 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김주원에게 전화가 왔다.
“이것 봐! 내 뒤통수를 이렇게 쳐?”
김주원은 나를 보자마자 화를 내며 말했다. 옆에는 이 차장이 앉아 있는데, 거만한 모습이 역겨울 정도였다.
“원래 그런 놈이잖아요. 은근히 그런 면이 있어.”
이 차장은 보자마자 내 손가락부터 확인하였다. 내가 반지를 갖고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한 이 차장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그는 분명 내 트렁크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회귀의 반지를 돌린 것이겠지. 반지를 재준이 갖고 있지 않으니 이 차장이 관련되어있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해놓고 뻔뻔하게 내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그는 이제 인간성을 완전히 포기한 듯 했다.
“말씀이 좀 과하십니다?” “뭐? 이 새끼가 머리 좀 컸다고 개기네? 너 같은 새끼 죽이는 건 이제 일도 아니야.”
“네, 알고 있죠. 충분히 알고 있어요.”
나는 트렁크 사건을 떠올리며 말했다. 내 말의 숨은 뜻을 알아챈 이 차장이 뜨끔한 듯 눈을 깔았다.
김주원은 그 틈에 용각산을 집어 들고 먹었다. 그리고는 잔기침을 해댔다. 왜일까? 그 기침이 내게 반지를 주고 간 그 신사와 닮아있다. 그도 죽어가는 걸까? 이 차장은 밉지만, 김주원은 싫지 않다. 내게 도움도 주었던 양반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다시 한 번 경고의 메시지를 날려줘야 할 것 같았다.
“회장님은 회귀의 반지를 더 사용하시면 안 될 것 같네요. 정말 큰일 납니다. 반지는 스스로 사람을 조종하고 있어요. 반지는 주인을 죽이는 반지입니다. 어떻게든 주인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반지에요. 그러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김주원은 용각산을 놓고서 껄껄대며 웃었다. 내 말을 곱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허허. 그래, 그렇다고 쳐도 이미 나는 반지에게 많은 걸 받았어. 반지와 나는 결혼을 한 셈이야. 자네도 결혼을 해서 알잖나? 결혼하려면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말이야.”
김주원은 진심으로 반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의 정도로 치면 내 사랑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그렇군요. 정말 지독한 사랑입니다.”
“아무튼 자네가 하는 사업 말이야. 그거 나랑 했으면 좋겠어. 그자랑 할 거면 나랑 먼저 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분이 먼저 제안한 것입니다. 저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분이 낸 아이디어니 저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정말 후회 안 해? 자네가 후회하게 해줄 수도 있어. 자네 말고 대안도 있고 말이야.”
김주원은 재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어쩌면 저들에게는 재준이 파트너로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저들과 재준이 손을 잡는 것이 불안하고 싫었는데, 이제는 저들과 재준이 한 몸처럼 느껴진다. 처음부터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그 대안을 실행하셔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김주원은 내 말에 화가 나는지 인상을 구겼다. 그러다 또 기침이 나는지 콜록거렸다. 불안하다. 김주원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 자네 나중에 후회하지 말게나.”
“네, 후회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이 차장이 박수를 쳐댔다. 이 차장의 박수소리조차 재수 없게 느껴졌다.
“그래, 이만 끝내. 저놈이랑은 이제 완전히 끝이야.”
“이 차장님은 저랑 약속한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뭐? 갑자기 무슨 소리지?”
나는 그가 앞서 내 가족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것을 생각하였다. 이 차장이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그 약속에 대해 책임지라고 할 생각이었다.
“제 가족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아, 그거?”
이 차장이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이 매우 언짢게 느껴졌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십니까? 제 아내를 건드리려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김주원이 끼어들자 이 차장이 김주원에게 손을 들며 말했다.
“나중에 설명하죠. 그건 그 약속을 할 당시에 가족을 말하는 거야. 김설아는 나중에 가족이 되었잖아?”
“네?”
기가 막힌 발상이다. 그를 당장 패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였다. 이 차장의 전화가 울렸다. 이 차장은 그 전화를 받았는데, 뭔가를 잘못 눌렀는지 스피커폰이 잠시 되었다가 꺼졌다.
“자기야.”
전화 상대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