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사랑했네, 했어(4)
“뭐 죽일 것까지야. 그냥 혼이나 내줘.”
이 차장은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아주 즐거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사람처럼.
“괘씸한 놈, 꼭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습니다.”
“자네 마누라는 정말 그냥 둘 거야? 괘씸하잖아.”
이 차장은 안통할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해리에 대해 물었다. 재준은 더 확실하게 말했다.
“절대 해리와 헤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 차장은 아쉬운 마음에 짧은 한숨을 쉬었다. 재준이 그걸 듣긴 했지만, 그게 다른 의미를 내포한 것은 전혀 몰랐다. “응, 그래 너무 대단한 사랑이야.”
“조만간 계획을 세우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 말만 하게.”
“근데 박준수도 회귀자인 겁니까?”
“응, 그자식도 회귀자야. 지금까지 감쪽같이 속여 왔지 뭔가.”
재준은 그제야 박준수의 정체를 안 것이 너무 화가 났다. 박준수가 회귀자라면 자기가 지금까지 놀아난 셈이다. 지금까지 박준수에게 속절없이 당해 온 것이 그가 회귀자라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자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개*은 자식. 잘도 나를 속였겠다.” “그런 놈은 빨리 밟아줘야 해.”
“네, 그래야죠.”
재준은 박준수에 대한 복수를 굳게 결심하였다.
이 차장은 둘이 싸우는 동안 해리를 꼬실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 * * * *
같은 시각 나는 김설아의 임신소식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기자들이 몰려오는 것은 물론, 아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축하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휴, 정말 행복한데 미치겠네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줄 줄은 몰랐어요.”
그동안, 우리 아버지는 치킨 업계에서 큰 성장을 이루었고, 피자 사업까지 조인하여 더 큰 성장을 하였다. 물론 내가 그 아이디어를 주긴 했지만, 아버지는 전에 하던 사업 밑천을 바탕으로 더 전진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내 도움이 아닌 아버지 스스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아버지는 성공을 거듭하면서 아내를 아끼는 남자로 변해갔다. 회귀 전에는 사업에 실패하여 어머니를 폭력적으로 대하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주는 남편이 되었다.
준희는 오재훈과의 사이에서 예쁜 딸을 하나 얻고, 현재 검사로 재직 중이다. 오재훈의 어드바이스를 받긴 하지만, 그 쪽에서 알아주는 검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오재훈은 변호사가 되어서 인권 쪽 문제에 앞장섰고, 그 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비록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얻는 일에 힘썼고, 그 노력은 하나의 표심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갈 채비를 마친 셈이다. 오재훈은 큰 이변이 없는 한 서울 시장에 당선되고 세 번을 연달이 당선 될 운명이다. 이 차장만 견제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가족 구성원들이 전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으니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런 가족으로 바뀐 것이다. 모든 것이 회귀의 반지 덕분이었다.
우리 집 한쪽에는 반지를 낀 그 강아지가 살고 있다. 강아지는 가끔씩 내게 애교를 부리고 하지만 절대 힘들게 하지 않았다. 노인 강아지의 뇌를 가진 것이라서 그런지 능글맞기까지 했다. 맛있는 간식을 주면 꼭 집구석에 숨어서 다 먹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똥오줌을 너무 잘 가려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김설아는 강아지가 너무 예쁘다며 좋아하였다. 강아지마저 너무 완벽한 집이라고 해야 하겠다. 하지만 행복이 과했다. 비극이 너무 크게 느껴질 정도로.
* * * * *
재준은 해리가 신문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다가갔다. 해리는 신문은커녕 글자 알러지가 있는 여자다. 신문을 보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신문을 보는 거야?”
“몰라도 돼.”
재준이 다가가자 해리가 급히 신문을 치웠다. 재준은 해리가 신문을 가리는 것을 보고 수상함을 느꼈지만 애써 티내지 않았다. 해리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재준은 해리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차분히 기다렸다. 해리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소변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재준은 해리가 가고 없는 것을 확인하고 신문을 들었다. 신문에는 나와 김설아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해리는 아직도 박준수의 인연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 치밀었다. 재준은 신문을 다시 숨겨놓고 그 자리를 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재준이 찾아간 곳은 이 차장의 집무실이었다.
“그래, 무슨 복수를 할지 생각은 했나? 어느 시점으로 회귀할 생각인가?”
이 차장은 재미있는 구경을 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자 재준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는 전과는 달랐다. 자비가 사라진 미소라고 해야 할까?
“회귀를 하면 안 되죠. 지금 녀석이 가장 행복한 시기 아닙니까?”
“오, 그렇지. 마누라가 애를 가져서 아주 신나있드만, 그때 고통 받을 일이 생기면 볼만하겠어.”
이 차장은 처음으로 재준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생각이 같았기 때문이다. 재준이 그동안 사랑 놀음에 빠져 멍청하게 굴었는데, 이제야 자기 색을 찾은 것 같았다. 그게 마음에 드는 것이다.
“아내를 잃는 슬픔을 느끼게 해줘야죠. 아이까지 임신했으니, 두 배로 고통스럽겠네요. 흐흐.”
재준은 박준수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자기가 해리 때문에 고통 받았던 순간을 놈도 겪게 해 줄 것을 생각하니, 그간 고통이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이 차장은 재준의 표정을 보며 흐뭇했다. 재준이 쓰게 웃을수록 놈을 혼내 줄 확률이 높아질 것 같아서였다. 이 차장은 사실 박준수보다 오재훈을 혼내주고 싶었지만, 오재훈의 뒤에는 영리한 박준수가 있으니, 그 뒤에 놈을 건드리고 나서 오재훈을 혼내 줄 생각이었다. 반지가 손에 있는 한 어떤 방식으로도 놈을 없앨 수 있다.
“그래서, 김설아를 납치해서 죽이겠다는 건가?”
“네, 사람을 시켜서 납치하려구요. 죽이는 건 제가 직접 해도 되고, 누굴 시켜도 됩니다.”
“그녀는 탑스타야. 잘못 건드리면 네가 다칠 수 있어.”
“그니까 위험한 순간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럽게 하되, 그 순간을 자꾸만 반복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김설아가 촬영을 하는데 그 곳에서 사고가 나게 하는 거죠. 그때 바로 죽으면 좋고, 안 죽으면 그 순간을 자꾸 반복해서 죽게끔 되었을 때 회귀를 멈추는 겁니다. 반복해서 하다보면 언젠가는 한 번 죽지 않겠어요?”
이 차장은 뜨끔했다. 자기가 해리를 그렇게 유린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역겨운 짓거리를 했었기에 더욱 해리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야. 김설아 스케줄을 알아내서 가장 위험한 순간을 캐치하자고.”
“네, 안 그래도 지금 사람을 시켜서 스케줄을 알아내라고 했습니다. 조만간 스케줄을 알아내면 맞추어서 시도하겠습니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이 차장은 재준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재준이 독이 오른 지금 해리를 만나야겠다고.
* * * * *
“무슨 일이시죠?”
해리는 그때 봤던 것보다 훨씬 수수하게 꾸미고 나왔다. 확실히 낮에 보니 덜 예뻤다. 하지만 지금 이 차장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단단히 빠진 것이다.
“너 연예인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지?”
“그래서요? 지금도 연예인이긴 해요. 확 뜨지 못해서 그렇지.”
“내가 널 확 뜨게 만들어줄 수 있는데 어때?”
해리는 이 차장의 말에 솔깃했다. 저 남자가 대체 자신의 마음을 어찌 아는지 궁금했다.
“그럼 대가가 있을 거 아닌가요? 그게 뭐죠?”
해리는 똑똑하진 않지만 눈치는 좀 있었다.
“너, 너를 원한다.”
이 차장은 아주 뜨끈한 눈빛을 하며 해리를 쳐다보았다. 해리는 그의 눈빛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 이 차장과 밤을 지냈던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분명 그런 적이 없는데 왜? 그래서 해리는 이 차장의 제안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한다. 머릿속에 스치는 이 차장의 몸과 특징들이 정말 맞는 걸까?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직접 봐서 확인해보면 알겠지.
“좋아요.”
이 차장은 해리가 시원하게 대답하지 진심으로 기뻤다. 아니 설렜다. 이 차장도 재준과 마찬가지로 해리에게 사로잡혔다. 스스로 파멸로 이르는 길목에 섰다.
해리와 이 차장은 바로 호텔로 향했다. 해리는 꿈에서 본 기억을 더듬었다. 이 차장에 몸에 난 사마귀 같은 것들이 정말 그 위치에 있는지, 그의 행동에 특징 같은 것들을 생각해 내었다. 이 차장은 아무 생각 없이 해리를 안았다.
해리는 깨달았다. 이 차장의 특징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앞서 재준의 장례식장 장면을 꿈에서 봤던 것처럼, 이 차장의 장면도 꿈에서 본 것이다. 회귀하고 사라진 기억들이 조금씩 해리의 꿈에서 발현되고 있었다. 해리가 회귀의 반지로 여러 번 소생하면서 그녀도 반지의 굴레에 갇힌 셈이다. 그래서 그녀의 꿈에 발현되는 것이다.
해리는 이 차장이 자기를 열심히 유린한 것을 알았다. 그걸 깨닫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차장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 * * * *
재준은 비밀리에 해결사를 소환했다. 해결사는 재준과 만나지 않고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였다. 서로 신원을 밝히지 말아야 하는 원칙으로 만난 것이다.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배우 김설아를 납치하여 주면 됩니다. 내가 보내준 주소로 김설아를 트렁크에 넣어서 데리고 오세요. 내가 적어 둔 경로로 와야 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해요.”
해결사는 놀라움에 잠시 말을 멈췄다. 김설아라면 대한민국의 탑스타가 아닌가?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렵겠지만, 납치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김설아라….”
해결사는 김설아의 오랜 팬이었다. 김설아를 자신의 손으로 납치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해결사를 하기 위해서 결혼도 포기한 그였다. 하지만 여자를 향한 마음은 쉽게 거두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만나기 어려운 김설아를 덕질한 것인데, 지금 그녀를 납치하라는 것이 아닌가?
“김설아를 왜 납치하려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해결사는 최대한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하긴 그는 그냥 말해도 건조한 말투이다.
“그의 남편에게 죽고 싶은 고통을 안겨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군요. 남편이 고통을 받으면 되는 것이네요.”
재준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이제 재준은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지금 이 시각 해리와 이 차장이 뒹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박준수에게 칼을 갈고 있는 꼬라지가 참으로 한심하였다.
해결사는 김설아가 현재 임신한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그녀를 납치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고재준의 제의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가 준 계약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해서 그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