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한류 드라마의 헤어(2)
“그거 우리 류사희씨에게 먼저 배정된 드라마잖아요!”
“답변이 없으셔서 먼저 답변해주신 다른 분으로 넘어갔습니다. 저도 위에서 결정한 것을 전달하는 입장이라서요.”
“그럼 저희 팀에서 제시하는 스타일을 먼저 보고 말씀하시죠.” “죄송합니다. 제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서 나중에 다른 드라마를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여보세요!”
방송국에서 온 전화는 더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아우 씨, 이게 대체.”
“어떻게 해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다른 드라마를 하면 되지 뭐.”
조 원장과 류사희는 이번 드라마가 아니라도 괜찮다는 입장이었지만, 나는 다르다. 그 드라마만이 아시아권에 우리 미용실을 홍보하는 큰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류 붐을 일으키는 다른 드라마가 있긴 하지만, 스타일을 유행시키는데 있어서 이번 드라마가 가장 독보적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방송국에 가죠.”
“네? 방송국에 왜요? 구걸하러? 우리가 왜?”
조 원장은 자존심이 강해서 구걸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긴 나도 구걸을 하려는 건 아니다. 앞서 회귀를 여러 번 하면서 얻어낸 교훈이 있다. 인간이나 모든 세상사에서 정해진 운명이란 것이 있고, 그걸 아무리 바꿔도 원 운명대로 가려는 성질이 있다는 걸 말이다. 내가 그 운명을 조금씩 바꾸긴 했지만, 그 운명이라는 것이 자꾸만 원 운명대로 돌아가려고 꿈틀거린다.
이 드라마도 그렇다. 다른 스타일팀이 이 드라마를 맡게 되는 것이 운명이라면 굳이 말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원래 유행하는 스타일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겨울연정이라는 드라마에 가장 찰떡같이 맞았던 그 스타일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막을 것이다. 그러니 가서 저들이 제대로 스타일링을 하는지 알아봐야 한다.
“일단 한번은 확인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우리 두 사람이 심혈을 들여서 완성한 배우들의 스타일인데, 저들도 한번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구걸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뭐 그렇다면 나도 갈 의향이 있어요. 나도 이번 스타일링을 위해서 열심히였거든.”
“그럼 한번만 가요. 나도 조금 억울하긴 해요. 이거 주면서 나한테 꼭 해달라고 했었거든요.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놓고 나한테 어떻게 그래요? 기분이 좋지 않아요. 가서 따져볼 거예요.”
류사희는 그레이스가 사망하고 가장 잘 나가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이 기분 나쁠 것이다.
“그럼 배우들은 대기시켜놓고 일단 우리 셋이서 먼저 가봅시다.”
“그러죠.”
우리는 일단 방송국으로 향했다.
* * * * *
“어?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방송국 입구에서 오아영을 만났다. 한동안 오아영과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던 터라 반가운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지요?”
“그러엄, 나는 잘 지냈는데 누구는 잘 못 지냈더라고?”
오아영은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는지 한숨을 쉬었다.
오아영이 지칭하는 누구는 바로 그레이스를 말하는 것이다.
“그레이스 말씀이신가요? 그건 저도 참 황당했습니다.”
오아영은 내가 말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피하였다. 그녀는 내가 뭔가 알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더 부담스러운 눈길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으실 것 같은데?”
“무슨 할 말이요?”
“죄송하지만 저희 바빠서 그만 가봐야 하는데요.”
조 원장이 오아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조 원장이나 류사희나 회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우리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할 것이다.
특히 조 원장은 오아영과 연배가 비슷해서 더 오아영을 싫어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 원장이 오아영을 호감 있게 보아서 더욱 그랬다. 일종의 질투다.
오아영은 이 두 사람이 옆에 있으면 대화에 방해가 될 것을 깨닫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도 들었는데, 겨울연정에서 하차할거라고? 자기네 팀이 가장 잘 하는데 왜 그런 거야? 뭐 궁금하다면 내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오아영은 눈치 빠르게 우리의 필요한 것을 알아챘다. 그러자 조 원장도, 류사희도 오아영의 말에 집중하였다.
“정말 뭔가 알고 계신가요?”
“우리가 그것 때문에 온 거 맞아요. 우리 편이 되어주실 건가요?”
“네, 그럼요. 대신 박 원장이랑 단 둘이 이야기 했으면 좋겠는데?”
오아영의 말에 조 원장이 류사희의 팔짱을 끼며 끌고 갔다.
“네, 말씀하시고 연락 주세요. 우리는 어디 가서 밥이나 먹고 올게요. 여기 앞 돈까스 집이 맛있어. 거기 가자.”
“네, 원장님. 배우 분들도 데리고 가죠.”
“우리도 어디 좀 가서 이야기 할까?”
“네, 그러시죠.”
두 사람이 가고, 우리는 조용한 카페로 향했다.
* * *
“그레이스의 죽음이 뭔가 이상해서 말이야. 아는 거 없어?”
오아영도 이번 그레이스의 죽음에 대해 수상히 여기고 있었다. 그 여자가 난데없이 사고 현장에 간 것도 웃기고, 거기서 총기 사고가 난 것도 웃기고, 그 총에 하필이면 그레이스가 맞은 것도 웃긴 일이다. 누가 봐도 이상한 죽음임에는 틀림없다.
“그걸 안다고 한들 뭐가 바뀔 수 있을까요?”
사실이 그랬다. 그레이스가 그렇게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그레이스의 복수를 해줄 것도 아니고, 그걸 해준다고 해도 저들이 당할 사람도 아니다. 이래저래 끼어들어봤자 좋을 것 없는 일이란 뜻이다.
“내가 그 여자를 끌어들였잖아. 그 여자를 내가 회귀자로 만들었잖아. 그런데 그 여자가 죽었어. 내가 신경 쓰이겠어, 안 쓰이겠어?”
회귀의 반지를 준 사람이 받은 사람을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다. 오아영 아니었으면 그레이스란 이름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치만 안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아시잖아요.”
“내가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그레이스가 남편에게 반지를 줘도 될까를 고민했었어. 그리고 두 사람의 인생이 조금 바뀐 것 같았어. 맞지?”
“네, 고재준도 회귀를 하였어요.”
“그랬구만, 근데 그레이스는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어. 맞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너도 아는데 나는 모를까? 그레이스는 내게 동생 같은 아이야.”
“아, 그렇군요.”
그레이스와 오아영이 친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오아영이 그레이스를 그렇게 아끼는 줄은 몰랐다. 그레이스가 너무 악독한 짓만 하고 다녀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편으론 오아영의 취향도 참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김주원과 스캔들이 나질 않나, 그레이스를 동생처럼 아끼질 않나.
“전에 남편의 여자를 죽였다고 했는데 다시 살아났다고 하더라고. 그때 남편도 회귀를 하였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야. 그레이스를 죽이고도 남을 만큼 말이야. 그치?”
오아영은 이미 다 추리를 해놓고 내게 물어보는 듯 했다. 그녀가 생각한 것이 다 맞다고 하더라도 해줄건 없다. 그저 눈물을 더 흘리는 수밖에.
“네, 그레이스가 좀 안쓰럽기 합니다.”
그레이스가 그렇게 된건 해리를 만나게 해줘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시킨 것은 김주원과 이 차장이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한 셈이니 도의적인 책임감이 든다.
“다시 한 번 물을게, 그레이스의 죽음에 반지가 개입된 건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대답은 충분하니까.
“그래, 그럼 죽게 만든 사람이 누구야? 남편이지?”
“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부정을 하지 않았으니, 긍정이라고 생각하는 오아영.
“이런 쓰레기 같은 새끼를 봤나. 지가 그레이스 없이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레이스가 어떻게 했는데!”
오아영은 재준이 원래 그쪽 분야의 탑이 되는 것을 모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 사실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다.
“다시 살릴 수도 없으니, 너무 개입하지는 마시죠. 고재준이나 이 차장은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반지를 이용해서 못할 것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저들에게 발목 잡히지 마셔야죠.”
“그것들에게 발목 잡혀도 뭐가 문제인데? 나는 성공할 만큼 성공했고, 회귀도 할 만큼 했어. 다만 그레이스가 너무 불쌍하잖아. 어쩌면 나 아니었으면 평범하게 잘 살았을지도 모르잖아.”
오아영은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회귀하면서 강해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시려구요? 혼내주실 겁니까?”
“박 원장이 혼내줘야지. 나는 거들고.”
오아영은 직접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김주원과 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네?”
“고재준이가 이번 겨울연정이라는 드라마에 협찬을 한 모양이야. 드라마 제작자로 합류했다고.”
고재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드라마에 합류하려고 했다. 드라마 제작비를 대는 것은 그 수 중 하나라고 해야겠다.
“아, 그래서?”
“그래, 박 원장도 돈은 많잖아? 고재준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고?”
“아마 비슷할 겁니다.”
여러 사업과 주식, 땅 투자로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제 재벌이 부럽지 않을 정도이다.
“그럼 뭐가 문제야? 당장 협찬을 해주면 될 일이지. 고재준보다 많이.”
“그게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일인가요? 제작사로서는 안정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데요?”
“박 원장 자금도 안정적이잖아. 뭐가 문제지?”
“아니, 드라마 제작을 하려면 제작비를 대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 가야 하니까. 처음 정한 사람으로 끝까지 가겠죠. 중간에 자기들 마음대로 바꾸거나 하면 나중에 다른 드라마 협찬이 안 들어올지도 모르니까요.”
드라마 제작에 앞서서 협찬사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저들이 함부로 바꾸거나 할 수 없다. 저들이 드라마 한편만 제작하고 끝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협찬사와 다음에도 함께 할 수 있으니 누구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 그럼 아까는 뭘로 들이대려고 한 건데? 박 원장이 준비해 온 것이 있을 거 아냐?”
“그거야 스타일을 제시하려고…….”
오아영의 갑작스러운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우리야말로 무작정 온 것이기 때문이다.
“뭐? 그럼 내가 더욱 필요하겠네. 나 그 드라마에 합류했거든.”
회귀 전 원래 드라마에서는 오아영이 합류하지 않았었다. 오아영이 그 드라마에 들어갔다면 내 쪽에 유리한 일이다.
“그럼 저희를 도와주실 겁니까?”
“그래, 그래야 그 고재준이라는 놈을 좀 혼내줄 거 아냐? 놈의 밥그릇이라도 뭉개놔야 내 속이 편해질 것 같아.”
오아영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 없다. 그래도 그게 우리 쪽에 유리하게 작용을 하니 서로 도와주는 수밖에 없다.
“그럼 가서 우리 측에서 제시하는 헤어를 봐달라고 해주세요. 마음에 들면 우리가 고재준보다 많은 돈을 협찬해 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오아영을 앞세워서 제작사로 향했다.
* * * * *
제작사 앞, 오아영이 앞서가고 있었다. 그 뒤를 당당하게 따르던 중 눈앞에 고재준이 나타났다. 그 뒤에는 그가 운영하는 미용실의 원장이 따르고, 그 뒤에 따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가 최지수의 머리랑 똑같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