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모든 것이 없던 일로(1)
비서가 가고나자 겨우 분이 풀린 이 차장이, 내게 물었다.
“그래, 고마워. 혹시 내게 뭐 바라는 것이 있나?”
“아뇨, 뭐가 있으려고요.”
“오, 그럼 자네 동생의 소원을 들어줘야겠네.”
“네? 제 동생이 무슨 소원이 있을까요?”
준희는 더 이상 소원이 없을 텐데, 뭘까?
“오재훈과 엮어달라고 성화거든. 난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반대지만, 걘 오재훈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이야. 다만 준수 씨가 반대하면 안할게.”
“아, 그렇군요. 딱히 반대하진 않습니다. 걔가 뭐하나 꽂히면 막무가내라서요.”
“그래? 알았어. 그럼 둘이 최대한 밀착시켜주지.”
“네, 하하.”
그렇게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이 붙어 지내게 된다. 오재훈에게 김설아 다음 인연이 내 동생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끔 두 사람이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얼마가 지났을까? 재준의 회사에서 실리콘 샴푸와 관련된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M사와 S방송국, K방송국까지 따로따로 불러서 실리콘에 관해 제보했다. 그 제보 영상을 틀어주면 방송국의 드라마에 협찬 해주고, 드라마 제작까지 지원하겠다고 하니 쌍수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쏙 들어갔다.
이 차장이 그 방송에 관련된 모든 일들을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정치인을 이기지 못한다. 이 차장은 웬만한 재벌들보다 한 수 위로 올라간 듯 했다.
거기다 얼마 뒤, 업계 1위를 달리는 그 기업에서 태클이 걸려왔다. (희망 화장품은 이제 1위가 아니다). 재준의 회사에서 만들고 있는 제품이 자신들의 제품을 표절했다는 것이 골자였다. 사실 그 제품과 비슷한 것은 우리도 만들고 있었다. 저들은 재준이 자기들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고 덤빈 것이다. 순전히 복수를 위해 만들어진 송사였다. 그건 검찰 측에서도 웬만하면 그냥 받아주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저들 중에는 이 차장의 수하가 많다. 이런 건수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재준의 회사는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한번 조사를 시작하니 휴지통까지 싹 다 조사하였다. 없는 죄를 있는 것으로 만들 정도의 강도 높은 조사였다. 결국 회계 자료에서 아주 작은 실수가 걸려들었다. 웬만하면 봐줄 수 있는 정도였지만, 그냥 놔둘 놈들이 아니다. 이 차장이 앞으로 대통령이 될 거라는 말이 도는 와중이라 충성도가 대단했다. 그래서 결국 재준의 회사는 쫄딱 망했다. 아버지에 이어 자기까지 이 차장에게 당한 것을 안 재준은, 거의 미친놈처럼 변해갔다.
저들이 서로 물고 뜯는 동안, 우리 회사가 업계 1위를 탈환했다. 어부지리다.
* * * * *
“드디어! 드디어 나도 장가를 간다!”
노랑머리가 은미를 안고 뛰어다녔다. 그녀의 아버지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 어지러워!”
“우리 이번 주에 당장 합시다. 우리 사실 준비 다 해두었어요. 결혼식장만 잡으면 된다니까?”
노랑머리는 은미랑 같이 살 요량으로 집을 마련해 두었다. 모든 가전제품도 이미 다 사두었다.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 거나 다름없었다. 살림만 합치면 되는 것이다. 거기다 은미의 지인이 웨딩샵을 하고 있다. 은미가 원한다면 결혼식장은 그냥 빌려준다고 했다.
“세상에, 얼마나 결혼이 하고 싶었으면 미리 다 준비해뒀을까?”
“그렇스무니다. 정말 눈물 나는 사랑이무니다.”
두 대머리 이사가 은미의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은미의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둘이 이미 결혼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더 방해한 것이다. 둘이 그러고 있는 것이 너무 꼴보기 싫었기 때문에.
“아우, 빨리 해치워버려. 자네 부모님도 안계시니 상견례는 안 해도 되겠지?”
그러자 내가 발끈했다. 아무리 무시해도 그렇지 상견례를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싶었다.
“상견례 해야지요. 제가 이 친구 친형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 가족이랑 상견례를 하시죠?”
“어? 아 그……그러던가요.”
내가 눈에 힘을 팍주고 이야기하자, 은미의 아버지가 꼬리를 내렸다. 내게 약점을 잡히고 있는 이상 내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정말 우리 준수 쌤이 최고입니다!”
노랑머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가 지금까지 나와 함께 했기 때문에, 그는 내 동생이다. 내게 가족과 다름없는 그런 동생이다. 사실 나도 회귀하지 않았다면 고아나 다름없다.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평생 가족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니까 잘 살아. 누구도 널 무시하지 못하게 말이야.”
“네, 정말 그럴 거예요.”
“근데, 준수상이 먼저 가야하는 거 아니무니까? 결혼 기사가 그토록 많이 뜨는데, 왜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으무니까?”
“설아 씨가 드라마에 들어가야 해서요. 그거 끝나면 할 생각입니다.”
“나도 먼저 프러포즈 했거든요? 어떻게 나보다 빨리 할 수가 있지? 새치기 아니냐고?”
조 이사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는 최근에 프러포즈를 마치고 결혼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무것도 안하는 줄만 알았던 노랑머리가, 대뜸 결혼을 한다고 하니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제일 급했던 건 아시잖아요 들?”
노랑머리가 말하자,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심지어 은미의 아버지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동의하는 걸로 알고 이번 주에 날짜 잡습니다?”
다들 그렇게 하라는 말을 하였다.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
* * * * *
딴딴따단. 딴딴따단.
노랑머리와 이은미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자리에 나와 김설아가 참석하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취재를 하러왔다. 기자들은 예의도 없이 우리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이런 곳까지 기자들이 찾아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두 분 결혼식은 언제 치르실 예정이신가요?”
“오늘 부케는 누가 받습니까?”
“두 분이 결혼을 하기는 하는 거지요?”
저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주고 욕까지 날려주고 싶었지만, 그저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더 예쁘게 하고 온 김설아는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너무 이쁘기 때문에 신부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정말 눈이 부시게 이뻐요.”
“왜 그래요. 부끄럽게.”
김설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그때였다.
“설아 씨! 설아 씨! 결혼하면 가만 안 둬!”
“아아악!”
웬 남자가 설아에게 꽃다발을 집어 던졌다. 설아는 놀라서 주저앉았다.
“뭐야?”
나는 순간 놀랐지만, 놈을 잡기 위해 뛰어갔다. 하지만 놈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저 새끼 뭐야?”
내 말에 설아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놈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기자들이 우리의 당황하는 모습들을 카메라로 찍어댔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괜찮아요, 설아 씨? 그만 찍어요! 그만들 하라구!”
설아는 놀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앉아 있었다. 나는 김설아를 번쩍 들어 올려서 웨딩샵 폐백실로 향했다. 다행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설아 씨 괜찮으신가요? 저 사람은 스토커인가요?”
“김설아 씨, 병원으로 가는 게 낫지 않나요?” “조용, 조용! 당신들이 더 스토커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결국 놈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말았다. 놈들은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라 붙었다. 놈들을 겨우 따돌리고 폐백실에 김설아를 눕혔다.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저 자식 누구죠? 경찰에는 신고 했어요?”
“네. 하긴 했는데, 딱히 방법이 없다네요.”
“네? 그런 게 어딨어요?”
그때는 스토커 관련법이 제대로 없었다. 스토커가 사람을 죽이거나 해를 입혀야 처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스토커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활개를 쳤다. 지금 당장 놈을 잡는다고 해도 처벌할 법이 없는 것이다.
“법이 그렇대요. 그냥 좋아서 그러는데 봐주라고 하네요.”
“아우, 무슨 법이 그래요? 우리 준희한테 나중에 뜯어고치라고 해야겠네요.”
“그래요, 꼭 그렇게 해줘요.”
“결혼식 참석은 할 수 있겠어요?”
“죄송한데 그냥 가야할 것 같아요. 말 좀 전해주세요.”
“네, 이 사장님 오시면 그때 같이 가주라고 할 테니 기다려요.”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조심히 가요.”
김설아는 요새 스토커 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스토커가 모든 스케줄을 따라다니며 결혼하면 가만 안두겠다고 하는 통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있었다. 이때, 놈을 잡아서 어떻게든 죽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그렇게 결혼식을 마친 노랑머리와 이은미는 매일매일 뜨거운 밤을 보냈다고 한다. 노랑머리는 코피까지 쏟아가며 신혼을 즐겼다. 그가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가슴이 아프게도.
* * * * *
이 차장의 간사한 계략에 넘어가 모든 재산을 날린 재준은, 거의 미친놈이 되었다. 이 차장을 죽이겠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하였다. 그레이스는 그때마다 모든 것을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사실 겉으로 봐서는 재준이나 그레이스나 둘 다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레이스는 진짜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미친 인간이었다.
재준은 이 차장을 손봐줄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이 차장을 죽여야 한다는 결심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견고해지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회귀의 반지를 얻으려고 하였고, 재준은 이 차장을 죽이려고 하였다. 둘이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마침, 이 차장의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김주원에게서 반지를 얻어낸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반지를 돌려 끼워가며 인생을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잘못된 선택을 하면 늘 인생을 되돌려서 바꾸곤 했다.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수란 1도 허락되지 않았다.
재준과 그레이스는 이 차장이 살고 있는 집을 알아내고, 그의 집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하지만 이 차장이 어찌 알았는지 집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저 그의 아내와 아이들만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납치할까? 했지만 그건 원하는바가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아이들에게 반지가 없기 때문이었고, 재준은 이 차장을 직접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매일 이 차장의 집 앞에서 잠복을 하던 중, 드디어 이 차장이 집에 도착했다. 얼마 전까지 업무를 수행하느라고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을 했었다. 그는 지금 매우 중요한 준비를 하는 중이라 집에 잘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다 겨우 집에 돌아왔으니 피곤은 극에 달해 있었다.
“왔어. 곧 집에 들어갈 때를 노릴 거야.”
“할 거면 제대로 해.”
재준이 말하자 그레이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독이 제대로 올라 있었다. 그런데 이 차장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차에 있었다. 집에서 아내가 나와서 이 차장에게 이것저것을 건네줄 뿐이었다. 옆에 있던 비서는 이 차장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를 떨구어 내고 이 차장을 죽이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거기다 그의 차 바로 뒤에는 다른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 차장이 차에서 나왔다. 비서는 따라 나오지 않고 차에서 대기했다. 이때다! 재준은 이 차장에게 뛰어갔다. 한 손엔 시퍼런 칼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