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열애설(2)
“그게 뭔데요? 말이나 좀 해주고 가지?”
노랑머리가 따라 나오다가 신경질을 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무조건 나오라고 하니 궁금한 모양이었다.
“공개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야.”
공개적으로 프러포즈를 하는 모습을 (한밤의 연예인)에 내보내면 된다. 양 기자에게 부탁하면 무리 없이 방송 될 것이다. 그럼 놈은 한발 늦는 셈이다. 독점 공개라는 메리트를 빼앗기는 걸 놈이 알고 흥분하여 소리치는 모습을 생각하니 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공개 프러포즈? 형수님한테?”
공개 프러포즈를 하려면 당장 알아볼 것이 많지만, 마침맞게 조 이사님이 오늘 그 준비를 해두었다고 한 기억이 났다. 오늘이 2000년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렇다. 조 이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상황을 설명한다면 양보해 줄 것이다.
“어, 놈의 신문은 주간지라서 내일 신문이 나오거든. 그니까 오늘 결혼 발표를 해버리면, 놈의 신문은 엿 먹는 거지.”
“아니, 그걸 하면 받아는 주고? 안 받아주면 어쩌려고요?”
“글쎄, 그걸 생각하지 못했네.”
김설아가 프러포즈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걱정이 밀려왔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라고 미뤄두었다.
그러자 노랑머리가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이고, 안 받아주면 그냥 놈만 좋은 거 아닙니까?”
“안 받아주면 그냥 열애기사를 다른 신문사에 제보해야지. 설아씨한테 양해를 구하고 말이야.
아,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요?”
노랑머리가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애기사를 내는 것은, 그의 말대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프러포즈를 해서 성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프러포즈를 성공해야겠지. 그게 확실하잖아.”
“그렇죠. 프러포즈 성공만이 가장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그럼 빨리 가야지.”
“어딜요?”
“양 기자부터 만나자고.”
“넵!”
* * * * *
“김설아가… 뭐라고유?”
양 기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내가 김설아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 놀란 것은 당연하다. 양 기자가 김설아를 매우 좋아했었으니까, 충격도 클 것이다.
그러자 노랑머리가 깔깔깔 웃어댔다.
“그니까 형님, 내가 김설아 씨 좋아하면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요.”
“아니, 니도 알고 있었단 말유? 왜 진작 말햐주지 않았슈?”
“어쩔 수 없었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양 기자가 김설아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미 사귀고 있던 것을 어쩌겠는가?
“한참 되었어요. 막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죠?”
“어, 그랬지.”
“하, 내 무례를 용서하슈. 제수씨에게 흑심을 품은 나를 용서해.”
양 기자는 거의 울 것 같았다. 첫사랑을 떠나보내는 남자의 모습이랄까?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요. (한밤의 연예인)에 내보낼 수 있겠죠?”
“당연하지.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탑배우 아니유?”
“일단 누구인진 비밀로 하셔야해요.”
어쩌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으니,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한다.
“그럼, 나만 믿으슈. 그게 안 되더라도 내보낼 기삿거리는 많으니까.”
양 기자는 내심 프러포즈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형님, 왠지 프러포즈가 실패할거란 말투로 들리네요?”
“아유 무슨 소리유? 성공해야지이.”
양 기자는 양손을 저으면서 부인했지만, 실패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하, 그래야죠. 걱정 마세요.”
“걱정은 안하는데, 김설아 촬영 모음 영상 틀어준다며? 우리 측에서 그 영상 편집은 힘들 것 같슈. 그 영상은 다른 사람이 해줘야 하는데?”
“아, 그래요? 어쩌죠 형님?”
“아니, 괜찮아요. 저 아는 감독님이 도와주신다고 해서요.”
마침, 류 감독님이랑 다음 영화 투자 건으로 연락을 하던 중이라, 쉽게 부탁할 수 있었다. 지금 열심히 김설아의 영상을 만드는 중이다.
“음, 그렇구만? 암튼 성공을 빌어. 방송 시작 세 시간 전에는 프러포즈를 마쳐야 할 거유. 우리도 따로 편집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방송 약속을 받고, 류 감독이 주는 영상까지 받아냈다.
조 이사가 빌렸다는 영화관에서 영상을 틀어주고, 거기에 내 나레이션이 펼쳐지면서 자연스럽게 프러포즈를 하면 된다. 그런데 의외의 문제가 터졌다.
* * * * *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이사니임.”
조 이사가 발까지 동동거리며 반대하고 나섰다.
“제가 평생 노총각으로 죽느냐, 마느냐가 달린 일입니다. 나도 살아야 해요.”
조 이사의 간절한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아프다 못해 시렸다. 그의 인생을 건 프러포즈를 내가 망치는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함도 들었다. 우선 그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가 급하긴 하지만, 그를 제대로 설득해야 했기에 조심스러웠다. 우선 그의 계획부터 알아보자.
“네, 그럼 우선 프러포즈 계획부터 들어보죠.”
“들어놓고 막으려고요?”
“아뇨.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사님 결혼을 누구보다 원하는 게 저인데요?”
조 이사가 결혼을 해야 변태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다. 재준이 늘 조 이사가 변태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게 결혼을 못해서 그런 건데, 내가 그걸 막을 이유는 없다.
“휴, 그럴 리가 없죠.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냥 불안해서 막말을 했네요. 미안합니다.”
“뭐가 불안하신데요?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닙니까?”
“프러포즈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죠.”
“이사님, 제가 앞서 그분께 결혼 의사를 물었는데,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걱정은 마세요.
정말이에요? 진작 말해주시지.”
앞서 꽃집에 갔던 날, 그분이 결혼 의사를 밝혔었는데, 이사님만 제대로 듣지 못했던 듯 했다.
“그건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거보다 오늘 계획부터 말씀해 주세요.”
“오늘 극장에서 노래를 할 겁니다. 그녀가 내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해서요.”
“네? 노래를요? 하, 그건 좀….”
“나도 내가 음치인건 알아요. 그래서 노래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그럼 들어나 봅시다.”
“그러죠.”
조 이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노래를 시작했다. SES의 (너를 사랑해)였다. 대머리 조 이사가 그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상상이상 이었다. 게다가 음정 박자 다 맞지 않다.
나는 첫마디를 듣고 조 이사가 결혼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랑머리는 인상을 구기다 못해 사람을 죽일 것처럼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노래가 너무 형편없는데다, 조 이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내 표정을 본 조 이사가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엉망입니까?”
“그게 뭔 노래에요? 아이돌 노래를 왜 불러요?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가사가 좋아서요. 연습 많이 했는데…….”
“그거 말고는 없어요?”
“네…….”
조 이사가 풀이 죽어있자, 노랑머리가 조 이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노래만 안 하면 프러포즈 성공이니, 걱정할 거 없네요.”
“노래를 꼭 해준다고 했거든요.”
“노래하지 말라니깐요? 안 돼!”
“아, 어쩌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프러포즈곡이 뭐가 있더라? 가장 좋은 프러포즈 곡은 유리과자의 (사랑해도 되나요)가 있는데, 그건 아직 발표되지 않은 곡이다.
“아! 굳이 발표된 곡으로 해야 하나?”
“네? 그게 무슨?”
“자작곡이요?”
“자작곡을요? 그건 더 어려운데…….”
“괜찮은 노래가 있어요. 그걸 연습하면 상대가 모르는 곡이니 노래를 못하는 걸 모를 거잖아요!”
(사랑해도 되나요)를 부르면 된다. 내가 그 노래 하나는 잘 하니까.
“오, 그럼 음치박치인 것도 모르겠네?”
“그렇네요! 당장 알려주십시오!”
“근데, 그러면 노래를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아, 그렇구만?”
노랑머리가 눈치를 채고 웃었다.
조 이사도 눈치를 챘는지 피식 웃었다.
“그럼?”
“네, 오늘은 제가 프러포즈를 해야겠네요. 하하하하하하.”
“노래를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죠!”
“그러시죠.”
나는 조 이사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쑥스러우니 노랑머리가 없는 곳에 가서 조용히. 하지만 노랑머리는 다 듣고 있었다. 심지어 녹음까지 했다.
노래를 들은 조 이사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하였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기타까지 배운다고 나섰다. 다행인 건 기타를 배우는 것은 음치랑 상관없다. 그렇게 노래를 마스터(?)한 조 이사가 후에 프러포즈를 하며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음정 박자가 많이 맞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노래가 좋아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후에 그들이 결혼을 하고나서 진짜 노래가 나왔는데, 그 노래가 그 노래인지 모르고 있었다. 가사만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 * * * *
우리는 조 이사를 설득하자마자 서둘러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에 류 감독이 전해 준 영상을 세팅하고, 엑스트라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이 사장에게 모든 것을 알리고, 열애설을 막을 길은 없다고 했다. 이 사장도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협조를 약속했다. 김설아에게는 영화 시사회라고 하고 스케줄을 잡았다. 다행히 오늘 스케줄이 많지 않아서 참석하겠다고 했다.
관객들 즉, 엑스트라들에게는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구해줄 것을 약속받았다. 그렇게 겨우 시간에 맞춰서 세팅이 완성되고, 김설아가 입장했다. 그녀를 본 나는 마음이 급해서 노랑머리를 찾았는데, 그는 갑자기 사라지고 없었다.
김설아는 시사회에 자신을 제외한 스타가 없다는 것이 의아했지만, 크게 마음을 쓰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영화를 가장한 영상이 시작되었다. 김설아는 자신의 모습이 영화관에 나오자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어머나!”
화면에서 김설아가 나오자, 사람들이 하나둘 김설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상을 보며 류 감독이 적어 준 대사를 읊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노랑머리가 뛰어들어 왔다.
“잠시만!”
“어? 왜?”
노랑머리는 기타를 들고 와서 내 앞에 내밀었다.
“아까 그 노래를 해요. 차라리!”
“아까 그 노래 들었어?”
“네, 너무 좋던데. 그거 해요. 내가 기타를 쳐줄 테니까.”
“진짜? 할 줄 알아?”
“오는 길에 택시에서 연습을 좀 했으니까 걱정 말고 시작해요.”
노랑머리는 그 사이에 자신의 집에서 택시를 타고 다녀왔다. 택시에서 내가 했던 노래를 기억해내어 연습까지 했다니, 너무 고마울 따름이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녹음을 했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 고마워.”
딩딩딩딩.
노랑머리가 기타를 치기 시작하고, 그게 영화관에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사람인 걸 알았죠.”
노래가 시작되고 자연스럽게 내 모습이 무대 위로 드러났다. 내가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본 김설아는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보았고,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이 사장이 보낸 사람이 영상을 찍고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사람이 오지 않았다.
노래를 하면서 김설아에게 다가갔다. 김설아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래를 마치고 김설아의 바로 앞에 선 나는 마지막 부분을 노래하였다.
“내가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김설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보내주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고백하였다.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그게…….”
김설아는 당황하며 내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거절인 건가?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