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회귀 반지의 주인(1)
대상 트로피를 손에 쥐고서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벨레레레레.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어, 준수야.”
“아, 이사장님. 저 대상 탔어요!”
“어, 축하하고. 지금 당장 좀 올 수 있겠어?”
이사장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내가 대상 축하 파티를 하고 있다면, 당장 달려와서 같이 축하를 해 줄 사람인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당장 가야할 것 같다.
“지금 갈게요.”
“어, 빨리 좀 와줘.”
“뭔데? 이사장이 와 이 시국에 오라카노?”
“모르겠어요. 지금 당장 오라네요.”
“그래, 가라 뭔 일이 있나보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사장에게 달려갔다.
* * * * *
“무슨 일이 있으세요?”
이사장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김설아와 관련된 일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니가 김설아씨랑 만나고 있다는 걸 이제 들었어.”
“아, 죄송해요. 제가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대회 준비 때문에 바빴어요.”
이사장은 또다시 죄인처럼 아래로 쳐다보았다. 그의 평상시 성격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김설아씨랑 관련된 일인가요?”
“어…, 그게 이번에 투입된 검사 드라마 말이야.”
“네, 그거 잘 될 거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 드라마 자문위원으로…….”
이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면 그건?
“설마, 오재훈 검사요?”
“어…… 그렇게 되었네.”
드라마에서 전문직을 다룰 때는 으레 자문위원이 붙기 마련인데, 그게 바로 오재훈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드라마를 찍는 내내 오재훈과 마주칠 일이 많을 텐데, 그걸 그냥 두고 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 그럼 어떻게 해요?”
“지금 대본 리딩하러 갔는데, 거기서 오재훈이랑 만날 가능성이 많아.”
“네? 지금요?”
“어, 미안해서 어쩌냐.”
“거기가 어딥니까?”
“야, 거서 싸우거나 그럼 곤란하다구. 니가 먼저 알려줬으면 막았을 건데 나중에 알게 되어서 이런 사단이 난거잖아.”
“싸우진 않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 믿을게. 오재훈이 뒷배가 어머어마하다는 이야기가 있어. 시비를 걸었다가는 큰 코 다칠 거야.”
“네, 알죠. 충분히 알죠.”
오재훈이 검사로 이름을 널리 알린 뒤에 서울시장에 도전해서 세 번이나 해먹고, 대통령 후보까지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뒷배가 대단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전에 오재훈을 만나러 간 것은 시비를 걸려고 간 것이 아니고, 내 존재를 알려주려는 것일 뿐이었다.
나는 이사장의 걱정을 뒤로 하고 대본 리딩이 이뤄지고 있는 방송국으로 향했다.
* * * * *
“김설아씨!”
오재훈은 김설아를 보자마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김설아도 사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원래 천생연분인 커플이니 당연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그렇게 연락을 드렸는데, 단 한 번도 답장을 안주시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한테 연락을 주셨어요?”
오재훈이 김설아측에 여러 번 연락을 하였지만, 매니저가 알아서 잘라냈었다. 김설아는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다.
“하하, 매니저가 잘라냈던 모양입니다. 뭐, 그럴 수 있지요.”
“전혀 듣지 못했던 사실이군요. 왜 연락을 주셨죠?”
“하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김설아씨에게 무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요.”
오재훈은 방송을 통해서 여러 번 김설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오죽하면 시민들이 둘이 결혼하라고 했을 정도로 말이다.
“농담이신 줄 알았어요. 남자들이 공개적으로 그러는 거, 저는 별로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오재훈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오재훈 말고도 김설아에게 공개적으로 관심을 표현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남자 연예인들의 10퍼센트 정도가 그녀를 사모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런 방식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시각 내가 그 곳에 도착하였고,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무심코 보게 되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뒤에 숨어서 대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김설아는 최대한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 고맙게도 말이다.
“혹시 남자친구 때문에 그런 건가요?”
김설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남자친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스타일 헤어의 미용사라는 것도 들었구요.”
나는 순간 뛰쳐나가서 놈의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참고 참았다. 지금 뛰어나가 봤자 나에게도, 김설아에게도, 오재훈에게도 좋지 않다.
“그걸 알고 계셨다면서 저한테 이러신다구요?”
“네, 저는 당신을 영부인으로 만들어 드릴 수 있거든요.”
오재훈은 그럴 수 있다. 그걸 알고 있기에 그동안 김설아를 쳐다보지 않은 것이다.
김설아는 그 소리를 듣고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했던 말, 영부인을 만들어 줄 사람을 만날 거라는 말.
“당신?”
“진심입니다. 나는 꼭 한국의 대통령이 될 거거든요.”
김설아는 순간 흔들렸다. 내가 예언이라도 하듯 했던 말을 기억해내고 난 뒤부터 말이다. 어쩌면 정말 저 남자가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날 더 사랑했다. 내가 목숨을 구해 준 그날부터, 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다.
“꿈이 대단하시군요. 하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것이죠. 설사 그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건 본인의 꿈이지, 내 꿈이 될 수 없어요. 현모양처가 되는 것보다는 멋진 배우로 남고 싶어요.”
사실 그녀도 배우로서의 꿈이 대단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꿈을 접고서 오재훈의 아내로 살게 된 것은 시청자로서 안타까운 일이었다. 영부인이 되는 것이 여자의 가장 큰 꿈이라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맡은 일에서 최고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 영부인의 가치만큼이나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는 그녀였다. 그걸 꺾은 것이 오재훈이고.
“전 어떻게든 당신을 내 여자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요.”
오재훈의 사랑도 대단했다. 김설아의 실물을 직접 본 이상,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의 여자를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건 일반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 없어요. 대통령이 가지는 가치관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건, 핀트가 어긋났다고 할 수 있죠. 저는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온전히 핀트를 맞추고 있어요. 기다리셔도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김설아는 오재훈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오재훈은 잘난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는 김설아에게 더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나는 김설아에게 한없는 사랑을 느꼈다. 그녀가 저 정도로 나를 사랑해주고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한편으로 지금 이 장면을 내가 보았다는 것을 들키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시 돌아갔다. 행복한 마음으로 말이다.
나는 가면서 생각했다. 어떻게든 오재훈에게 내 가치를 증명하겠다고 말이다. 그녀가 나를 선택하여 준 것이 미안하지 않게끔 꼭 증명해야겠다.
* * * * *
“어머 이게 누구야? 박준수씨?”
“아, 안녕하세요. 이상궁 마마님.”
방송국 앞에서 이상궁을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아디다승 팬츠를 입고 있었다. 윗도리는 부잣집 사모님이 즐겨 입는 옷을 입고서 말이다.
“요새 김설아씨 만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에요?”
“네? 아니 그걸 어떻게?”
이상궁은 상궁과 식모만 전문적으로 맡아서 하는 반 무명 탤런트로, 방송국에서 마당발로 통했다. 조연급 출연료가 억대가 넘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작을 하는 배우였다. 당연히 소문도 빠를 것이다.
“내가 발이 여의도를 다 덮고도 남거든. 대발이야 대발 호호.”
이상궁의 목소리가 방송국 로비에 울려 퍼지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이가 다가왔다. 그녀를 본 나는 순간적으로 발을 뒤로 물렸다.
“여기서 뭐해요? 이 잘생긴 분은 누구?”
그녀는 바로 오아영, 회귀자였다.
나는 그녀를 알아보고 손에 낀 회귀반지를 뒤로 숨겼다. 다행히 그녀가 반지를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반지를 넘겨 준 상태였다.
“내가 말했잖아요. 김설아를 차지한 나부랭이라고.”
오아영은 이상궁의 말을 듣자마자 나의 몸을 살폈다. 회귀 반지를 찾는 것이다.
“그쪽이 김설아님, 아니 김설아씨를 차지한 그 남자란 말이죠?”
“네, 저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봬요. 이상궁님.”
“아유으. 드라마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상궁이래? 암튼 담에 또 봐요!”
나는 오아영의 눈을 피해서 냅다 도망쳤다.
오아영은 영부인감인 김설아를 채간 남자라면, 분명 회귀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아영은 얼마 전 겪었던 일 때문에 회귀를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나타난 것이다. 반지를 갖고 있다면 또 회귀를 할 수 있을 것이기에 나를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망쳐야 했다. 조만간 반지를 써야 할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오아영이 우리 미용실에 쳐들어왔다.
“박준수씨.”
“엇, 네 안녕하세요.”
나는 순간 손에 낀 반지를 숨기지 못했다. 오아영은 내 손에 껴져있는 회귀반지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네.”
오아영에 반지를 보며 침을 흘리는 것을 보았지만, 딱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 하러 오신 거죠?”
“네, 머리도 하고 반지도 받아가려구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역시나 그녀는 반지를 받으러 온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일단 발뺌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오아영에 내게 다가와서 귓속말을 속삭였다.
“회귀반지 받으러 왔다구요. 당신 손가락에 껴져있는 그거.”
“아, 이건 임자가 있어서요.”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지. 이거 왜이러시나? 우리 프로 회귀자 아니었나?”
“안됩니다. 곧 줄 사람이 있다니까요?”
“이봐요. 대한민국 영부인이 될 사람을 꼬신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그거 설아씨한테 말할까?”
오아영이 회귀할 때는 2003년으로, 오재훈이 시장이 되었을 때다. 대통령감이라는 소리가 막 나올 무렵이었다.
“그래서요? 그걸 말하려면 당신이 회귀자라는 것을 말해야 하는데요?”
“아무튼 남의 여자를 빼앗은 거잖아!”
“회귀자들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우리 다 누군가가 올라갈 자리에 올라간 거 아니냐구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
오아영은 기분이 나쁜지 인상을 구기며 나를 째려보았다.
“아니, 난 그 반지만 잠깐 빌려주면 된다니까?”
“반지는 김주원씨에게 줄 겁니다.”
“아니, 김주원은 지금 우리보다 훠어얼씬 잘나가는데 왜?”
“김주원씨 막내딸이 죽는다고요! 기억 안 나십니까?”
“어머, 맞네. 맞아.”
우리가 그러고 있는 사이, 뉴스에서 김주원의 막내딸이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