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두 번째 조력자를 사수하라(1)
좀 더 보니 승철이 웃으며 류사희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또다시 한발 늦은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승철이 다가왔다. 류사희도 같이.
“나, 아니 박 쌤. 여기서 뭐해?”
“어, 누가 오기로 해서.”
승철은 류사희를 오라고 손짓하였다. 그러자 류사희가 웃으며 다가왔다. 둘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친해질 수 있었을까? 나는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인사해, 우리 샵 최고 디자이너 박준수씨.”
“아,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두 사람은 이미 통성명까지 마친 듯 보였다. 거기다 반말까지 하는 걸 보니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진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친해진다는 말인가? 한 번 사귈 운명이라서 그런가?
“네, 근데 둘은 무슨 사이야?”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불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나와 버렸다. 나의 눈길을 본 승철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내가 하이텔에 우리 샵 홍보를 좀 했거든. 그랬더니 얘가 접속해서 대화를 좀 나눴어. 그게 다야.”
“아, 하이텔…….”
그 시절 가장 핫한 통신이었던 하이텔. 전에 나도 그곳에 다니고 있는 미용실을 홍보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내였던 선정이 조언을 해서 그러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남편이 승철이니, 선정이가 승철에게 그런 조언을 했겠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반가워요. 사…….”
나는 류사희의 이름을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름을 말한다면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류사희와 승철도 나가 사…… 라고 하는 걸 듣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사고가 났다고 해서 20분만 기다려주세요.”
“어머, 네네 알겠어요.”
“야, 무슨 사고?”
나는 아무 말이나 대충 말하고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버렸다. 하마터면 무슨 스토커같이 느껴질 뻔 했으니, 이렇게라도 나갔다가 오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방법이겠다.
* * * * *
류사희는 젊고 이쁘며, 세련되었고 상냥했다. 또래의 젊은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여성이었다.
회귀 전, 류사희가 인터뷰한 내용을 본적이 있는데, 둘이 사귈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류사희가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고 자연스럽게 헤어졌다고 했었는데, 아마도 둘이 사귀긴 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 류사희가 승철을 보는 눈을 보아하니 그랬다.
“오빠는 탤런트 하셔도 되겠다. 얼굴이 엄청 작아.”
“사희씨도 진짜 이쁜데, 누가 대쉬하고 그러겠어요.”
승철과 류사희는 누가 봐도 이쁘고 잘생긴 선남선녀다. 그런 두 사람이 눈이 맞은 것은 이상할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승철이 유부남이니, 그걸 알려주기는 해야 하겠다. 거기다 류사희도 아직 남자친구가 있으니, 둘이 불꽃을 피우기 전에 선을 그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승철에게 다가갔다.
“이거, 니 아기 줄라고 샀어.”
나는 승철에게 주려고 산, 아기 신발을 품에 갖고 다니다가 이제야 겨우 꺼내서 승철에게 건넸다. 선정이는 내 아이는 안 낳는다고 난리쳐놓고, 벌써 아이를 가졌다. 섭섭하게도.
아기 신발을 본 류사희의 눈이 커졌다. 승철은 바람이라도 피다 걸린 사람마냥 겸연쩍어하며 웃었다.
“어, 고맙다. 선정이가 좋아하겠네.”
“어머, 오빠 유부남이구나.”
원래 사귀는 걸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인연이, 이렇게 짧은 썸을 끝으로 끝나버렸다.
“나도 뭐.”
류사희는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남자친구인 윤호준이, 자신과 사귀는 것을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류사희는 다행히(?)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헤어스타일은 정하셨어요?”
“아, 맞다. 저 이런 스타일로 하고 싶거든요.”
나는 조력자인 류사희에게 최대한 잘 보이기 위해서는, 일단 가장 잘하는 미용으로 어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덕분에 류사희는 내 미용 기술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비즈니스적인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바로 옆자리에 탤런트 현민아가 앉게 되었는데, 그녀는 류사희와 안면이 있는 듯 인사를 하였다.
“어머 사희씨, 여기 다니나 봐요?”
“아, 현민아씨 안녕하세요.”
“어머, 정말 반갑다. 아직도 분장팀에 있죠?”
“네, 그렇죠.”
“흠, 그래 뭐 그것도 좋긴 하지.”
현민아는 헤어를 마치고 메이크업에 들어갔다. 류사희는 현민아의 옆에서 펌을 말고 있었다.
메이크업이 거의 완성될 무렵, 현민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놀라서 몰려들고, 류사희도 자다 깨서 현민아를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뭐야? 얼굴이 강시도 아니고 뭔 메이크업을 이따위로 해?”
“오늘 화사하게 해달라고 하셔서, 죄송합니다. 민아씨.”
“이게 화사한 거야? 그냥 귀신이지!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완전 망했잖아!”
“진정하세요. 좀만 더 봐드리면 될 거에요.”
“뭘 좀만 더 보냐고? 당신 실력이 이정도지!”
현민아는 화가 나서 날뛰다가 류사희를 쳐다보았다. 류사희는 현민아가 자길 왜 쳐다보는지 몰라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현민아가 갑자기 류사희에게 다가가서 류사희의 어깨를 잡았다. 류사희는 흠칫 놀라서 현민아를 쳐다보았다.
“사희씨가 좀 해줘. 나 오늘 중요한 약속 있단 말이야.”
“네? 아니 저는 메이크업이 주 업무가 아니라.”
“왜 이래? 저번에 고은희도 사희씨가 손봐줬다면서? 은희 걔가 얼마나 까탈스러운 앤데, 사희씨보고 천재라고 했다니까? 나 이렇게 못가. 제발 봐주라.”
“아…, 제가 무슨 천재라고. 저, 해드려도 되나요? 여기 분들에게 좀 그래서요.”
류사희는 나에게 해줘도 되느냐고 물었다. 류사희의 솜씨를 직접 보는 기회를 마다할 필요는 없다. 같은 시각, 승철도 이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요, 마음껏 해드리세요.”
나는 메이크업 담당자에게 미안하다고 하며 돈을 조금 더 쥐어 주었다. 담당자는 기분이 좀 상했지만 알겠다고 하고 물러섰다. 물론 류사희가 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려고 뒤에 앉아 있었다.
“그럼 조금만 봐드릴게요.”
류사희는 나에게 눈짓을 하고는 현민아의 얼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현민아의 얼굴은 정말 거짓말처럼 입체적으로 변하고 있었고, 류사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시술을 완성해 나갔다. 사람들도, 담당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모두 놀라고 있었다.
“와, 거의 사기 수준이야. 얼굴이 반쪽이 됐어.”
“콧대가 갑자기 살아났어. 없는 코도 만들어내겠다.”
사람들이 수근 대는 사이, 류사희의 메이크업이 끝났다. 자신의 얼굴을 본 현민아는 만족감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했다.
“어머, 자긴 진짜 천재다. 분장팀 말고 메이크업을 해야 한다니까. 더 제대로 배우면 우리나라 탑이 될 거야!”
“아유, 아니에요. 전 분장팀에 있어야 해요.”
“설마, 윤…… 아니다 암튼 자기는 꼭 메이크업으로 전향해. 알았지?”
“네, 생각해 볼게요.”
류사희는 현재 드라마 분장팀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드라마 주인공이 바로 윤호준이다. 윤호준은 분장팀의 류사희를 전용 메이크업 아티스트처럼 부려먹고 있었다. 물론 애인이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걸 이유로 류사희에게 하는 짓을 보면 좋은 남자가 아님이 분명했다.
“쌤, 저 여자는 나중에 쌤 가게에 부원장으로 스카우트 하면 좋겠네요.”
노랑머리가 나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나도 물론 애초부터 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옆에 있는 승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승철은 류사희에 관하여 유 사장에게 말했고, 유 사장은 그맘때 재준과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재준에게 소개해 준다. 그렇게 재준에게 발탁이 되어서 유학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승철은 유 사장이 미용실 원장을 시켜준다고 했기 때문에 그녀와 사귀는 중에도 포기하고 보내주는 걸로 들었다. 재준은 그렇다 치고, 유 사장이 류사희를 많이 아끼게 되는데, 지금은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동안 유 사장의 사업이, 김 실장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매직약의 판매도 나의 약에 비해 턱없이 낮게 팔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린easy까지 하면서 사업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자 조금씩 망해가고 있는 것이다.
2021년에는 손에 든 핸드폰으로 게임도 하고 문자도 보내며 자유롭게 게임문화를 즐길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피씨방에 처박혀서 해야만 게임 내 탑을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게임을 하게 되면 잠이 늘 부족했고, 덕분에 일에 차질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내가 류사희에게 접근했다. 류사희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려면 우선 드라마팀에 헤어로 합류하면 될 것 같았다.
* * * * *
드라마 [부인 천하]의 촬영 현장에 도착한 나는, 회귀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선정이가 보고 또 보고 또 본 드라마가 바로 이 [부인천하]였는데, 그 촬영 현장에 나가 직접 합류하게 된 것이다.
드라마에는 헤어 전담팀이 거의 꾸려져 있고, [부인천하]는 가채를 붙여서 촬영하기 때문에 그런 전담 미용사가 따로 있었다. 특히 가채를 붙이는 일은 탤런트들의 탈모와도 관련이 많아서 아주 잘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따로 다른 헤어팀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는데 마침 전담 미용사가 며칠 다쳐서 그 기간 동안만 내가 담당해 주기로 하였다.
나는 가채를 붙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가채 전문가에게 밤을 새가며 전수받고 팀에 합류했다. 어떻게든 류사희를 나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잠 정도는 포기해도 괜찮았다. 그 과정은 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준수씨같이 유명한 분이 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주인공이 아니고 이상궁인데도 이렇게 손수 달려와 주시다니.”
“어유 아닙니다. 이상궁도 중요한 배역인데 잘 해드려야죠.”
“그럼 이틀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 마시고 일 보세요.”
나는 여유롭게 대답하고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 건너편에 주차하고 있는 흰색 밴 차량에 윤호준이 있는 차가 보였다.
이상궁의 머리를 해주고 슬슬 가보려고 하는데, 마침 그쪽에서 류사희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도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어? 준수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와, 류사희씨도 여기 있으시군요. 전 이상궁 맡으신 배우님 이틀만 봐드리기로 했어요. 그 분의 헤어디자이너가 다치셔서요.”
“아, 맞다 그 언니가 다치셨죠. 괜찮으시대요? 병문안을 가봐야 하나?”
“아닙니다. 이틀이면 낫는대요.”
류사희는 내가 우연찮게 이곳에 온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분명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지만, 그녀만 모르면 되니까. 우리가 대화를 하는데 갑자기 윤호준이 차에서 뛰쳐나왔다. 사희가 다른 남자와 대화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행동은 사랑이라기엔 너무 과격했고, 무례했다.
“야 사희야, 커피 언제 갖다줄 거야?”
“어, 알았어. 금방 가져갈게.”
류사희가 급히 가려고 하는데, 내가 갑자기 류사희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윤호준이 불을 품은 듯 벌개진 얼굴로 다가왔다.
“넌 뭐야?”
회귀해서 미용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