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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미용재벌-4화 (4/200)
  • 4화. 1997년, 응답하다(2)

    “뭐? 학원비보다 비싼 건 아니겠지?”

    “돈이 드는 게 아닌데요?”

    원장은 내가 무엇을 부탁할지 몰라 약간 불안해했지만, 돈이 들지 않는다는데 안심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승철과 원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 소원은 취업 선택권이요”

    원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학원비 만큼의 대가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쉬운 소원이라서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게 다야?”

    “네 그거뿐입니다.”

    강남의 유명 미용사들은 꼭 거쳐 간다는 <스타일 헤어>, 그곳에서 스텝 생활을 한다면 좀 더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타일 헤어>는 각 학원에서 가장 잘 하는 사람 중, 가장 잘생긴 혹은 예쁜 사람을 뽑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학원 원장들과의 커넥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제 실력 면에서는 승철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얼굴로는 조금 딸리는 감이 있는 게 문제였다.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얼굴은 잘생겼(?)지만 피부가 한창 예민하던 시기라 그렇다. 원장님이 워낙 승철이에게 여러모로 반한 상태니, 개인감정을 이기는 것보다는 미리 취업 선택권을 받아 내는 게 좋을 것이다. 승철은 이후 이번 일을 두고두고 원망했다고 한다. 뭐, 억울하면 너도 회귀하던지.

    “좋아 그러지. 대신 이번에 합격하면이야”

    “감사합니다. 원장님!”

    “난 돈이 굳고 좋지 뭐.”

    원장은 생각보다 수월한 소원에 안도하며 환하게 웃었다.

    학원생들은 기대보다 작은 소원에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선정이가 원장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돈 굳었으면 한턱 내셔야죠!”

    “이야 그렇지 회식! 회식!”

    “이 녀석들이! 좋아 가자!”

    “우와!!!”

    녀석들, 먹을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 여전하네. 그땐 나도 삼겹살 하나에 뻑이 갔지만, 이제 작은 것에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 씁쓸할 따름이다.

    * * * * *

    피맛골의 저녁은 소리만으로도 맛이 있었다. 생선 굽는 소리, 고기 굽는 소리, 국이 끓는 소리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정겹게 들리고 있었다.

    골목길 구석에 모여 있는 학원생들은 저마다 나와, 승철파로 갈리어 떠들어 댔다.

    “야 난 진짜 놀랐어. 이자식이 하루 만에 갑자기 잘하니까 뭔 약물을 먹었나 했다니까?”

    “이 녀석 진짜 약물 먹은 거 아냐?”

    “하하! 무슨 소리야? 오늘 컨디션이 좋았어.”

    “아 컨디션.”

    “그래도 승철이는 컨디션 필요 없이 항상 잘하잖아 그게 따봉이지.”

    “그건 그렇지.”

    학원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나.

    그런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선정이.

    선정이의 눈빛을 보고 술잔을 비우는 승철의 모습.

    이 상황을 정리하고, 선정이를 승철과 잘 이어주는 방법이 없을까? 선정이와는 앞으로 엮이지 않아야 한다. 내 인생이 꼬이는데 한 몫 하는 그녀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학원생들이 취해갔다. 승철은 평소보다 많이 마셔서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나도 취기가 올라 깨려고 밖으로 나갔다가 선정이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섰다. 그러자 선정이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는 기분이 상해 있었다.

    “나 피하는 거야?”

    “어? 아니 그게…….”

    선정이는 조금 취해 있었다. 취기 때문인지,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데, 여전히 예쁘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헉, 정신 바짝 차리자.

    내가 조금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챈 듯, 그녀가 좀 더 접근해 왔다.

    “나 오빠 좋아해요. 전부터 그랬어.”

    아, 젠장. 고백이 좀 더 빨라졌다. 내 실력이 갑자기 좋아져서 그런 건가? 원래는 한 달 뒤에나 고백하는데……

    “나 좋아하지 마.”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더 나쁜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냥 돌아섰다. 전 부인에 대한 배려라고 해 두자.

    하지만 선정이에게 그보다 더 나쁜 말은 없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또 다시 오기가 발동했다. 선정이는 갖고 있던 음료수 캔을 나의 뒤통수에 던졌다. 캔은 나의 뒤통수에 정확하게 꽂혔다.

    퍽.

    나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고, 뒤따라 다가온 선정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내 마음이야! 좋아하는 건!”

    하, 지금 잘라야 한다. 좋아하지 말라고 협박할 수도 없고, 좀 더 확실하게 거절을 하지 않으면 그녀도 더 상처받을 것이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거짓말 하지 마. 저번에는 없다고 했잖아! 날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고?”

    그랬었지. 선정이 외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었다. 그땐, 진심으로 선정이를 사랑했으니까. 그걸 그녀도 느끼고 있었을 테고, 나도 굳이 감추지는 않았다. 다만 미용사 시험을 합격하고서 고백하려다 타이밍을 놓쳤었지.

    “그녀는 너보다 훨씬 예쁘고 매력적이야.”

    “웃기지 마.”

    선정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 선정이 만큼 예쁜 여자도 많지 않으니까. 연예인이라면 모를까.

    그때 가게 앞에 붙어있는 연예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다른 여자가 모델이지만 얼마 안있으면 김설아가 모델인 그 광고였다. 김설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가 좋아한다는 미지의 그녀를 구상했다.

    “그녀는 항상 날 보며 미소를 짓는데, 하얀 치아가 눈이 부실 지경이야. 거기다 목소리는 작지만 힘이 있고, 피부는 우유만큼 하얀데다 검은 생머리에서 향기가 나.”

    사실, 김설아는 내 마음속의 영원한 첫사랑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그녀를 흠모했을 정도로 청순하고 이지적인 여자다. 그래서 차기 영부인 후보가 된, 전설의 탑스타.

    선정은 내 구체적인 답변을 듣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큼 말했으면, 그녀도 포기 할 테지. 나름 자존심이 쎈 여자니까.

    “눈만 높아가지고.”

    선정이는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돌아섰다.

    그 와중에, 승철은 또 짝사랑에 눈이 멀어서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앞 가게 유리창에 비친 놈의 눈빛을 봐 버렸다. 내가 이렇게 빠져주면 저 둘이 자연스럽게 연결 될 테지. 승철이는 유부녀가 된 내 선정이를 꼬실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본의 아니게 사랑의 중매쟁이가 되었네.

    으드드득.

    내 의도를 모르는 승철은,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갖고 있던 음료수 캔을 으스러뜨렸다. 이제 선정이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 * * * *

    “다녀왔습니다.”

    두근두근.

    엄마…… 2000년에 돌아가신 엄마가 집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눈물부터 튀어 나왔다. 돈이 없어서, 수술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허망하게 돌아가신 엄마. 그 엄마가 집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뚜벅뚜벅.

    “뭐하니?”

    “네?”

    아버지도 계셨지. 엄마를 죽도록 때리고, 내 동생까지 때려서 다리 불구로 만든 아버지도 살아있네.

    “여서 뭐하냐? 안 들어가고.”

    “네.”

    “술 좀 먹었나보네? 학원은 재밌니?”

    하긴, IMF를 겪기 전까지는 우리 아버지도 남들과 다름없는 좋은 아버지였다. 그놈의 빚이, 사채업자가 우리 아버지를 괴물로 만들었다. 지금은 그 괴물이 되기 전 좋은 아버지다.

    “네, 재밌어요. 아버지도 한 잔 하셨어요?”

    “그래, 마 거래처에서 하도 한 잔 먹자해서.”

    “술 좀 적당히 드세요.”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 술만 드시다가 결국 간경화로 사망하셨다. 우리 가족은 사실 콩가루나 다름없었다. 그런 콩가루 더미에서 날 건져준 건 선정이었다. 가족은 망해서 콩가루가 되어가든 말든, 난 사랑에 눈이 멀어서 등한시 했으니까.

    선정이를 정리한 것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끼이익.

    “여보! 아들도 같이 왔네?”

    “엄마!”

    엄마. 30년 만에 부르는 이름이다.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기어코 흘러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라면 좀 끓여줘. 속 쓰려 죽겠네.”

    아버지가 엄마를 붙잡는 바람에 엄마는 내 눈물을 보지 못했다. 천만다행이다. 헌데 이놈의 여동생 나부랭이가 내 눈물을 보고 시비를 걸어왔다.

    “뭐야? 그거 콧물 아니고 눈물이지?”

    “콧물이야.”

    박준희, 내 여동생이다.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다가 도망쳤는데, 차사고가 났고 그때 다리를 다쳤었다. 그 일로 다리를 절게 되면서 잘하던 공부도 때려치우고 공장에 취직해서 죽도록 일만 한 내 동생.

    “눈에서 나오는 게 콧물이면, 코피나면 피눈물이네?”

    “아으 이게 진짜.”

    “바보.”

    준희는 내게 메롱 하고는 도망쳤다. 다리를 절지 않는 준희를 다시 보자, 또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철없이 사랑타령 하는 동안, 인생을 망쳤던 저 세 사람을,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저 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려고 이때로 회귀한지도 모르겠다.

    사랑 때문에 가족이 그리 되는 걸 몰랐고, 사랑 때문에 인생을 바꿀 기회를 저버렸던 내게, 이제야 겨우 인간의 도리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 * * * *

    미용사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미용사 시험을 준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메이크업이 문제였다. 그때, 미용사 시험은 메이크업이 필수였는데, 내 가장 문제가 메이크업이다. 게다가 그때 메이크업을 해 준 모델의 피부가 어마어마하게 나빴다. 알다시피 메이크업은 바탕이 잘 먹어야 하는데, 기초부터 망치는 것이다.

    큰일이다. 당장 메이크업 모델을 구해야 한다. 안 그러면 영락없이 저번처럼 귤껍질 메이크업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선 젊은 여학생들이 많은 대학가로 향했다. 돈을 좀 주고 모델을 사서라도 이번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

    “역시 오길 잘 했어.”

    나의 예상대로 대학가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지나가는 여학생을 붙잡았다. 여학생은 매우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 왜 이러세요?”

    “아, 저 그니까 다름이 아니고.”

    “흥! 시간 없거든요!”

    철썩.

    여학생은 다짜고짜 나의 따귀를 갈겼다.

    당황한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여학생은 도망쳐 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모델 캐스팅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여성은 너무도 예쁘고 늘씬해서 감히 말조차 붙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와, 진짜 예쁘다. 말도 못 붙이겠네.”

    하지만, 인생 세 번째엔 거칠게 없다. 예쁜 게 뭐 벼슬이라고 말도 못 붙이나? 싶었다.

    그런데 그 여성이 갑자기 내 앞에 서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까이 보니 더 예쁘다. 까짓거 거절을 당하더라도 말은 붙이고 싶었다.

    “저, 시간 좀 있으신가요?”

    “네, 저 시간 있어요.”

    엥? 이게 웬 떡인가. 여성이 내 말에 선뜻 오케이를 해 주자 용기가 솟아올랐다.

    “저……. 모델을”

    “네네, 제가 모델을 구합니다!”

    나는 여성이 선뜻 모델을 하겠다고 하자 너무 기뻐서 소리쳤다.

    “아니, 그쪽 분 여드름 피부를 제가 치료해주고 싶어서요.”

    “네? 그게 무슨…….”

    “아, 제가 한의사인데 한방으로 피부를 치료하는 걸 연구 중이거든요.”

    “아, 한의사시구나!”

    나는 미모의 여인이 한의사라는 말에 놀라며 다시 한 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한의사와 미모의 여인의 접점을 생각하다,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김소연 한의사!

    “김소연?”

    “어머, 나 알아요? 미스코리아 봤구나?”

    정말 김소연이라니, 하긴 이곳은 김소연의 모교인가 보네.

    “헉, 지……진짜 김소연이에요?”

    “네, 제가 김소연입니다. 반가워요!”

    회귀해서 미용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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