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2화
제182편 어린 양. 그리고 시작된 국교 선언식(2)
콰앙!
“…….”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힘없이 잠들어 있던 레브.
그녀는 자신의 문에서 들리는 폭발음에 고개를 들었다.
“레브.”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무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내.
한때는 자신의 연인이었으며, 지금은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고만 이단자 칼론이었다.
그의 등장에 레브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칼론을 노려보았다.
“너지.”
“…….”
“네가 시녀를 시켜 아비뇽에게 대공 전하의 휴가지를 알려주었지?”
다그치는 칼론의 물음.
그런 칼론의 물음에도 레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칼론을 노려볼 뿐이었다.
“케한이는 아직 아이야. 8살.”
“그래 봤자 이단이자, 악마이다. 악마의 종자인 녀석은 심판을 받아야 해.”
칼론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레브가 말하자 칼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레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네가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네 동생 한스가 행복해졌어.”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것인가?”
“네가 시녀에게 시킨 일로 케한이가 다쳤어, 그 어린아이가.”
“죽이지 못한 건가? 아쉽네.”
스르릉.
칼론은 더 이상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더 이상 레브와 대화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못 죽여.”
칼론이 검을 뽑자 레브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칼론을 바라보았다.
그에 피식 미소를 지은 칼론은 레브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너는 나를 죽이면 살아가지 못할 테니까.”
칼론의 물음에 레브가 당당하게 말하자 칼론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브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내 연인의 목숨보다, 또 나의 목숨보다, 기사도가 소중하다.”
“뭐?”
“너는 나의 주군인 황태자 전하의 가족을 해하려 했으며, 주군의 나라인 제국에 혼란을 가져왔고, 황궁에 첩자들을 만들어 분란을 만들었다.”
“그래서?”
칼론의 낮은 목소리에 레브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칼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에 칼론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손으로 이 모든 것을 끝내야지.”
서걱.
* * *
“본 성녀는 미하일 님의 대리자이자, 미하일 교단의 대표로서 트레이 교단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미하일 님과 에르 님의 자녀들인 우리 인간이 서로 돕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 힘든 이들을 구제하는 길에 앞서는 선구자가 되었으며 합니다.”
와아아!!!
백금발의 아름다운 미녀 루멘.
신성교국의 성녀인 루멘의 말과 동시에 수많은 백성들은 환호했다.
길고 길었던 국교 선언식은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황제의 선언만이 남았다.
“흐윽…….”
가만히 그런 선언식을 바라보고 있던 크림슨은 옆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자신의 제자이자, 1사제인 튜칸.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훔치고 있는 튜칸의 모습에 크림슨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튜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생했다.”
“크흑!”
크림슨의 단 한마디.
그 한마디에 튜칸은 다시 울컥 울음이 차올랐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사기꾼 취급을 당해왔고, 돈이 없어 자신들이 거두어들인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식량을 제공하지 못했다.
사제인 자신이 굶은 날은 셀 수도 없이 많았고 말이다.
그간의 힘든 일이 튜칸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그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주변에 있던 나머지 3명의 사제 또한 눈물을 흘렸다.
이제 끝이다.
모든 백성들이 자신들의 신인 에르 님을 믿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길을 나아갈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힘들게 걸어왔던 길, 살아왔던 인생이 헛되지가 않았다.
그에 사제들은 계속 눈물을 흘렸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크림슨 또한 눈에서 흘러나오는 한줄기 물을 손으로 닦았다.
“모두 조용.”
그때,
황좌에서 일어난 황제의 한마디에 함성을 지르던 백성들, 자신들 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황좌에서 일어난 황제에게 집중했다.
“판게아 대륙력 460년. 짐은 트레이 교단이 본국의 국교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와아아!!
그리고 황제의 선언이 시작되었고, 간단하지만 묵직한 선언이 끝남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에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벌컥!
“꺄악!”
그때.
갑작스럽게 광장의 문이 열렸고, 문이 열리고 등장하는 인물을 발견한 여인들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에 광장에서 환호하던 백성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고, 상단에 있던 귀족들과 황태자, 그리고 황제 또한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이런 미X!”
열린 문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피 칠갑의 사내.
그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챈 황태자 요한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태자는 가만히 있어라.”
당장에라도 달려나가 사내를 제압하려던 황태자.
그는 위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낮은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명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상단 앞에 도착한 적발, 적안의 잘생긴 사내.
털썩.
그 사내, 황제에게 화염의 기사라는 이명을 받은 칼론이 무릎을 꿇었다.
“지금 무슨 짓이더냐.”
그런 칼론을 내려다보며 황제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황제의 말에 모든 귀족이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은 느꼈다.
나직한 황제의 목소리에 담긴 거대한 분노를 말이다.
그에 황태자 또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칼론을 살펴보았다.
저 녀석은 왜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정말 황제의 눈 밖에 나고 싶은 것인가?
요즘 따라 계속해서 속 썩이는 칼론의 모습에 요한은 미칠 것만 같았다.
스윽.
“…….”
그런 황제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한 칼론.
고개를 다시 든 그가 자신의 옆에 있던 주머니를 앞으로 내밀었다.
“뭐 하자는 짓이지?”
그런 칼론의 행동에 얼굴이 찌푸려진 황제.
이제는 대놓고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황제가 묻자 칼론은 조용히 주머니를 풀었다.
“으음…….”
“꺄악!”
칼론이 내민 주머니가 풀어지자 귀족들은 신음을 흘렸고, 심약한 백성들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여인들의 소리가 막혔고, 귀족들 또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무튼, 황제는 풀어진 주머니를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너!”
그리고.
황제의 바로 밑에 위치한 의자에 서 있던 황태자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이 미X 놈이!”
“황태자!”
우웅!
칼론을 향해 당장 달려가 주먹을 휘두를 기세인 황태자 요한.
그의 행동에 황제가 언성을 높이며 위엄을 내뿜자 요한은 그대로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몸을 돌려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있게.”
“…….”
“황명을 거역하려는 것인가?”
황제의 명에 요한이 가만히 입을 다물자 황제는 싸늘한 눈빛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에 요한은 황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의 신하입니다.”
“제국의 신하이기도 하네.”
“아니, 저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바친 기사입니다.”
“선을 넘는군.”
모든 귀족이 있는 곳, 또한 수많은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당당하게 황권에 맞서는 황태자의 모습에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황제의 말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당당하게 허리를 편 채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반역자의 목입니다.”
그때, 요한의 뒤에서 칼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황제는 다시 고개를 들어 칼론을 바라보았고, 요한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혀를 길게 내민 채 두 눈을 감고 있는 한 여인의 머리, 한때는 칼론의 연인이었으며, 지금은 지하 감옥에 갇힌 죄인이다.
그런 레브의 머리를 내밀며 칼론은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의 휴가지를 외인에게 발설한 인물이며, 제국의 시녀들과 시종들을 회유하고, 세뇌해 첩자로 만든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국의 죄인을 네놈이 죽였다는 말이냐?”
칼론의 말에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에 칼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네놈이 미X구나.”
감히 황제의 명령도 없이 지하 감옥에 갇힌 죄인을 죽인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옥에 갇힌 죄인은 황제의 소유이다.
그런 죄인을 황제의 허락도 없이 죽인다는 것은 황권에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
반역과도 같은 행동이다.
“…….”
그리고 요한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칼론.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다.
자신이 지켜주고 싶어도 이 이상은 무리이다.
“황제 폐하!”
“말하라.”
다시 고개를 든 칼론.
그가 큰 목소리로 황제를 부르자 분노한 황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라도 칼론을 포박하라고 명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간의 공이 있었으니 변명이라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이 죄인은 저의 연인이었습니다, 못난 저 때문에 이렇게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기사이자, 제국의 기사로서 그에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
“감히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 죄인을 죽인 것, 진심으로 송구합니다. 하지만 제 연인이었으며, 그녀가 이렇게 된 것에는 제 책임이 많았습니다.”
“…….”
이어지는 칼론의 말에 황제는 물론, 모든 귀족과 백성들이 칼론에게 집중했다.
칼론의 입에서 나오는 말.
이때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이렇게 그녀가 타락했는지, 자신의 심정이 어떤지 모든 것을 고하는 칼론의 모습에 백성들과 귀족들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젊은 기사 칼론.
그가 너무 불쌍했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죄책감에 빠져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하여, 제가 마무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입을 연 칼론.
그의 말에 황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황제 또한 알고 있었다.
칼론과 레브의 이야기를 말이다.
황제는 개인적으로 칼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칼론이 아니더라도 레브라는 아이는 어떻게든 극단적인 신앙에 빠질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론은 모든 책임을 그녀의 곁에 없었던 자신이라 탓하고 있었다.
불쌍했다.
정말 불쌍한 어린 양과 같았다.
“황태자 전하.”
“말해 이 새X야.”
공적인 장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론의 부름에 황태자 요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황태자 요한의 욕설. 체통 없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귀족들과 백성들은 그런 황태자를 탓하지 않았다.
칼론의 벗이라고 알려진 황태자 요한.
그가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얼굴로 상단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칼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했습니다.”
푸욱!
“꺄악!”
“허업!”
정말 순식간이었다.
황태자 요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 칼론이 짧은 단검을 꺼내 들어 자신의 심장을 찌른 것이 말이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백성들은 소리를 질렀고 귀족들은 기함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론!”
“칼론!”
그리고, 요한과 루드비히 후작이 화들짝 놀라며 칼론에게 달려갔다.
“죄…… 죄송…….”
“이 씨XXX야!”
피를 토하며 계속해서 사과를 하는 칼론.
요한은 그런 칼론을 내려다보며 절규했다.
“제발…… 제발 죽지 마…….”
점점 두 눈에 힘이 풀려가는 칼론.
그런 칼론을 보며 요한은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전생에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벗.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자신이 패악질을 부려도 항상 자신의 옆에 있어 주었던 그 벗이 이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려고 하고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생에서 느끼지 못한 행복을 칼론에게 느끼게 해주는 것인 목표였는데 이렇게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우웅!
그리고 그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따뜻하면서도 아름다운 보라색의 빛이 내려와 요한과 죽어가는 칼론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