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7화
제177편 변화
위즐리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보스, 그가 아무렇지 않게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리자, 거짓말처럼 보스의 검 끝으로 검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먹구름 사이로 내려온 거대한 검.
보스의 나직한 한마디, ‘멸망의 검’이라는 말과 동시에 먹구름을 가르고 나타난 거대한 검은 아비뇽과 그 지면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칼론의 힘으로 인해 생성된 거대한 구멍.
그곳에 서 있던 아비뇽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구멍의 주변은 초토화가 되었다.
아까, 칼론과 아비뇽의 격돌에 어두운 밤이 밝아지자 놀란 시민들이 대피해서 다행이었지, 만약 대피하지 않았다면 일반 백성들 또한 아비뇽처럼 죽었을 것이다.
정말…… 거짓말 조금 보태서 작은 영지를 하나 날려버릴 강력한 힘이었다.
그에 위즐리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제국의 대공, 보스 카르미언.
제국 제일검이라 불리며,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나 강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자그마치 초인.
완숙한 경지의 소드 마스터인 아비뇽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죽여버린 보스다.
그 말은, 일반 소드 마스터와는 급이 다른 강자라는 뜻이다.
설마, 상상 속에서나 나오는 전설적인 경지,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것일까?
가만히 서 있는 보스를 바라보며 위즐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커헉!”
그때,
아비뇽을 처리하고 유유히 서 있던 보스가 돌연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런 보스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칼론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놀란 칼론의 옆,
화들짝 놀란 위즐리가 마나를 사용하여 보스에게 달려갔다.
칼론 또한 위즐리처럼 보스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푸욱.
하지만 왼쪽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서늘한 감각과 동시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
그에 칼론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사내.
그가 자신의 옆구리를 찔렀고, 다른 사내가 자신의 품에 안긴 케한을 뺏어 들었다.
“대장! 어서!”
챠악!
칼론의 옆구리에서 검을 뽑은 프리스트가 아직도 굳어있는 잔크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수하의 소리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잔크는 사라지는 수하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제길!”
보스의 상세를 살펴보던 위즐리.
그는 케한을 안고 사라지는 사내들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이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구멍이 뚫린 옆구리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오는 칼론.
그를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위즐리는 이를 악물고는 쓰러진 칼론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를 지혈했다.
“커헉!”
그때.
대공인 보스가 다시 피를 토했고 위즐리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보스는 아주 위험한 상태이다.
아까 잠깐 살펴본 결과 그의 마나가 역류하고 있었다.
당장 그 마나를 안정시켜야 하지만…….
“시X!”
칼론에게서 손을 뗀다면 칼론은 죽는다.
과다출혈로.
그에 위즐리는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칼론을 선택하면 마나 역류로 보스는 다시 마나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고, 보스를 선택한다면 칼론은 죽을 것이다.
그에 위즐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X…… 형 빨리 와…….”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요한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그의 도움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거짓말처럼 지금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던 위즐리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
그에 위즐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크라라라!!!
그때,
위즐리는 먹구름이 몰린 하늘에서 거대한 드래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익숙한 울음소리.
바로, 요한의 친구이자 제국의 수호룡, 크산느의 목소리였다.
그에 위즐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대장…… 저희 어떡해야 합니까?”
인적이 드문 산속의 동굴.
기절한 케한을 안아 든 수하의 물음에 잔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 수련을 받아온 동생들, 그리고 친구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잔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나는 이단 심판관님의 이야기에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다.”
“대장!”
갑작스러운 잔크의 고백에 한 수하가 화들짝 놀라며 잔크를 향해 소리쳤다.
신의 뜻에 의문을 가지다니?
미하일 님의 자녀로서 있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에 다른 수하들 또한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잔크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 뜻은 신성 모독입니다.”
케한을 안아 들고 있는 수하.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잔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 미하일께서 이 아이를 납치하라고 하셨을 것 같으냐?”
“…….”
케한을 안고 있는 수하에게 동조를 하기 위해 입을 열던 다른 수하들.
그는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잔크의 물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수하들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말이다.
“정말…… 이 아이가 이단일까?”
수하의 품속에서 기절한 채 안겨있는 케한.
곤히 잠든 듯 작은 숨소리를 내며 기절한 케한의 모습은, 성경에 나오는 미하일과 인간의 중개자인 천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케한을 내려다보며 잔크가 묻자 수하들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애써 부정하고 있던 진실.
그것을 잔크가 끄집어내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던 것이다.
그에 잔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이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50명의 수하.
그들에게 잔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님에게 간다.”
“그게 무슨! 이 아이를 어서 교황 성하께 바쳐야 합니다!”
잔크의 말에 화들짝 놀란 수하.
그가 두 눈에 쌍심지를 키며 잔크를 바라보았다.
그런 수하의 말에 살짝 한숨을 내쉰 잔크.
그가 케한을 안고 있는 수하를 바라보았다.
“내려놔.”
“대장!”
스윽.
잔크의 명령에 언성을 높인 수하.
잔크는 그런 수하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려놔.”
“…….”
잔크의 차가운 목소리에 이를 악문 수하.
결국, 그는 케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스윽.
그러자 잔크의 뜻에 동참하던 한 수하가 케한을 안아 들었고 잔크는 검을 거두었다.
“나는 성녀에게 갈 거다.”
“…….”
조금 전 한 말을 다시 잔크가 반복하자, 칼론의 옆구리를 찌르고 케한을 안았던 수하는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섰다.
“성녀님은 황궁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잔크의 결정에 나머지 수하들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에 잔크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그리고 설인들을 데리고 황궁으로 간다.”
“대장…….”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과 같은 잔크의 결정에 한 수하가 말리듯 그를 불렀지만 잔크는 단호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생명을 신의 뜻이라는 변명으로 뺏었다.”
이단 심판관 아비뇽.
그의 명령대로 신의 뜻이라 믿으며 수많은 살생을 해온 프리스트들.
그런 자신들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잔크의 말에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인간이다.
어찌 죄책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저, 이때까지 외면해왔을 뿐이다.
신의 뜻이라는 말로 변명을 하며 말이다.
“나는…… 오히려 이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이 된다. 아비뇽이 죽고, 우리들을 진실과 마주하게 한 것을 말이다.”
“…….”
“그에 나는 그 뜻과 시련에 따르겠다. 황궁에 가서 우리를 사로잡고 죽인다면 그 또한 신의 벌. 나는 받아들이겠다.”
그동안 가져왔던 죄책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잔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떠나고 싶은 녀석은 떠나거라. 그 누구도 탓하지 않겠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지금 도망갈 기회를 말이다.
지금 자신이 해석한 신의 뜻은 자신의 해석일 뿐이다.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잔크였기에 수하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또 그에 맞게 행동하라고 자유를 주었다.
그런 잔크의 말에 수하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비뇽의 명령에 익숙해졌던 수하들.
그들은 정작 자신들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라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던 것이다.
그런 수하들의 모습에 잔크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신의 뜻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의견을 묻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라고 하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수하들.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말하는 잔크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의 말이 옳았다.
그동안 자신들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대장은 자신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잘못 걸어온 길을 되돌리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그에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정했다.
대장인 잔크와 끝까지 함께하기로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듯, 이들과 의견이 다른 수하도 있었다.
“이 이단아들!”
고개를 끄덕이는 수하들과 잔크를 노려보며 소리치는 한 수하.
너무나도 분노한 나머지 온몸을 떨면서 얼굴을 붉힌 그의 모습에 나머지 수하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아.”
“닥X!”
그런 자신의 수하, 칼론의 옆구리를 찔렀던 고아를 보며 잔크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고아는 언성을 높이며 그런 잔크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단아 자식들! 교황 성하께 알려 너희들에게 천벌을 내리게 할 것이다!”
“…….”
살기를 일으키며 소리치는 고아의 모습에 잔크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스릉.
그때, 잔크를 친형처럼 따르던 수하, 게오르크가 검을 조용히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게오르크.”
“대장. 살려두면 위험합니다.”
잔크의 부름에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게오르크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잔크는 게오르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고아도, 자신의 신념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으로 우리가 위험해집니다.”
잔크의 말에 게오르크가 다시 대답하자 잔크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게오르크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방금 각오한 생각을 져버려야 한다.
변화하기로 각오했다.
그에 잔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가 고아를 죽인다면 우리는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더냐?”
“하지만!”
잔크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게오르크.
그가 몸을 돌려 잔크를 향해 다시 언성을 높이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동료들.
그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변하고 싶다고.
그들도 게오르크와 같은 생각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에 게오르크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래. 가거라.”
그런 게오르크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인 잔크.
그가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고아에게 말했다.
그에 고아는 이를 악물며 다시 한 번 노려보았고 이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고아 저 녀석을 보내 준다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교황이 아비뇽의 죽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들의 변심을 알게 될 것이다.
분명 이단으로 지정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잔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평생을 바쳐온 신성교국.
그곳의 주인인 교황의 명을 어긴 것이다.
교국을 위해 일해 온 자신의 명예와 신념이 꺾이는 일.
하지만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
더 이상…… 신의 뜻을 왜곡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잔크는 성녀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자신이 잘한 일이냐고.
신께서는 정말…… 아비뇽과 같은 생각을 지니신 것이냐고 말이다.
아마…… 성녀라면 자신을 칭찬해줄 것이다.
잔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에 잔크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홀가분하다는 듯 진한 미소를 지은 잔크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수하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잔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수하들.
그에 잔크는 동굴 안쪽에 위치한 감옥에 갇힌 설인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