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2화
제162편 거절(1)
“미하일 님이시여…… 이 불쌍한 자녀를 이곳에서 구원해주소서…….”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던 루멘은 옆에서 들려오던 작은 음성에 잠에서 깨었다.
그러자 확실하게 들려오는 기도문.
루멘은 이 늦은 시간에도 자지 않고 기도를 올리는 신자의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신앙심이 깊은 신자의 옆에서 함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몸을 일으킨 루멘은 고개를 돌렸고, 이내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기도를 올리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몬 빛 머리칼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처음 보는 외모였지만 이내 루멘은 기억이 났다.
교국의 인물이 아닌 제국의 인물로서 미하일 님을 진심으로 따르고 기도하던 신자였다.
그에 루멘은 그녀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고 이내 그녀에게 다가갔다.
옆에서 함께 기도를 올리고 친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악마의 속삭임에 빠진 이단들을 벌하시고…… 세계를 구원해주소서…….”
멈칫.
다가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기도를 올리려던 루멘.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여인을 보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기도를 올리는 것은 좋으나 기도를 올리는 내용이 너무나도 살벌했다.
그에 화들짝 놀라 루멘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놀란 가슴을 채 가라앉히기도 전에 그녀의 입에서는 또다시 끔찍한 기도문이 튀어나왔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칼론은 더 이상 제가 사랑하던 남자가 아닙니다…… 부디 죽음으로 벌하고 영혼을 구해주소서.”
그녀의 목소리에서 광기를 느낀 루멘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용을 떠나 그녀는…… 진심으로 상대방이 죽기 바랐다.
신인 미하일에게 다른 인간을 죽여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그녀.
루멘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함께 새벽 기도를 올리시려는 것입니까?”
이곳 모두가 미하일 님의 신자이고 루멘이 미하일의 대리자, 성녀인 것을 잘 아는 레브.
그녀가 자신의 어깨를 잡은 루멘을 바라보며 따뜻한 목소리로 묻자 루멘은 떨리는 눈동자로 그런 레브를 바라보았다.
“왜…… 다른 이들을 이단이라 표현하시는 것입니까?”
“……? 성녀님, 당연한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루멘의 물음에 도리어 레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런 레브를 바라보며 그대로 얼굴을 굳힌 루멘.
레브는 그런 루멘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계를 구원해주시는 미하일 님의 은혜를 모르고 전지전능한 유일신 미하일 님을 저버리고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마신을 믿는 이들입니다.”
“…….”
“그런 이들은 당연히 이단이며, 벌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 아닌가요?”
자신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브의 모습에 루멘은 조용히 어깨에 얹은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그런 레브의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부디…… 부디 이 불쌍한 영혼을 구제해주소서…….’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신자 레브.
그녀를 구제해달라는 기도를 말이다.
* * *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호오.”
황태자궁에 들어선 나.
그런 나를 반기는 두 명의 사내를 보며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깔끔한 정장과 자세의 게슈레.
그리고 기본적인 예를 지키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건들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샌드.
그 둘의 모습에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전하.”
반가운 나의 인사에 게슈레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옆에 있던 샌드 또한 그런 게슈레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드라칸에게는 잘 배웠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의 물음에 겸양 어린 말로 대답한 게슈레.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학살자였던 게슈레.
전생에서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허무하게 죽고 말았던 인재를 보며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많이 강해졌구나.”
게슈레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한층 강해진 기운.
한 단계 성장한 게슈레를 보며 내가 말을 건네자 게슈레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전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하도록 해.”
게슈레의 인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쉬시겠습니까?”
“아니, 옷만 갈아입고 바로 폐하를 알현하러 간다.”
“알겠습니다.”
나의 말에 게슈레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다음 고개를 돌려 샌드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그런 게슈레와 눈이 마주친 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고개를 한 번 숙인 다음 물러났다.
아마 시종장 드라칸에게 가는 것일 것이다.
황태자인 내가 잠시 후 황제 폐하에게 방문할 것이라고 알리러 말이다.
“들어가시지요.”
나의 방 앞에 도착하자 게슈레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어색함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런 것을 보니 아무래도 드라칸에게 잘 배운 것 같았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방에 들어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 게슈레.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게슈레는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이야…… 저거 완전 분위기가 변했네.-
방문이 닫히고 홀로 남게 되자 나의 어깨에 가만히 앉아있던 크산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녀석도 너무나도 변한 게슈레의 모습이 신기했나 보다.
나와 같은 녀석의 말에 나 또한 그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완전 변했어.”
-재미없는 성격이 되어버렸어.-
나의 말에 투덜거리는 크산느.
그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냥…… 드라칸이랑 판박이던데?”
누가 드라칸 제자 아니랄까 봐.
드라칸과 너무나도 똑같이 행동하던 게슈레의 모습에 내가 웃음기 어린 말로 말하자 크산느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파닥.
그러고는 날개를 파닥거리더니 이내 침대 위로 날아가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아, 역시 이 침대가 편해.-
나의 침대에 누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뒹굴거리는 크산느.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짜리몽땅한 몸을 지닌 귀여운 도마뱀 크산느.
그런 녀석이 침대 위에서 떼굴떼굴 굴러다니니 귀여웠던 것이다.
-너 이상한 생각 했지.-
하여간 귀신같은 놈.
크산느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똑똑.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근처에 있던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들어와.”
벌컥.
나의 말과 동시에 열린 문.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온 칼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찾아온 칼론을 보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칼론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나의 옆에 섰다.
“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나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칼론의 모습.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칼론은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성녀와 그의 호위, 하인리히 경도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뭐?”
“황제 폐하와 독대를 마치고…… 바로 포박당했다고 합니다.”
하아…… 젠장.
칼론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인 루멘마저 가두었단 말인가?
이거 잘못하다가는 미하일 신도들의 반발이 거셀 수가 있다.
그렇다면 피곤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알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칼론은 그런 나를 보며 다시 눈치를 살폈고 나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그런 녀석을 바라보았다.
나의 날카로운 눈빛에 칼론은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무리하시지는…… 마십시오.”
걱정이 가득 담긴 칼론의 말.
그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왜? 폐하에게 선을 넘을 것 같나?”
“…….”
나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칼론.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었어?”
칼론은 황제를 존경하고 두려워했지만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한데 지금의 모습은 황제를 너무나도 어려워하는 신하의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칼론을 향해 물었고 칼론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대답해.”
고개를 가로젓는 칼론의 모습에 무언가 있었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고 칼론은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는 황제와 독대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 *
“내가 왔다고 알려.”
황제의 집무실 문 앞.
그곳에 멈추어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은 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드라칸을 향해 말했다.
“네.”
그런 나의 말에 드라칸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이내 문 앞에 있는 종을 살짝 흔들었다.
딸랑.
“황태자 전하가 폐하를 뵙기 청합니다.”
“들라 하라.”
드라칸의 보고에 곧장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
드라칸은 나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은 다음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벌컥.
굳건히 닫혀있던 거대한 문이 열렸고 나는 당당한 걸음으로 안에 들어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집무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펜을 내려놓는 황제.
그런 황제를 향해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거라. 거기 앉아라.”
나의 인사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황제.
그가 앞에 놓인 소파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고 나는 고개를 숙인 다음 황제가 권한 소파에 앉았다.
“어제는 즐거웠느냐?”
“네, 폐하 덕분에 오랜만에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소를 지은 황제의 물음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나의 감사인사에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시종장인 드라칸이 차를 들고 왔고 황제와 나의 앞에 잔을 놓아둔 다음 다시 물러났다.
또다시 둘만 남게 된 황제와 나.
“들거라.”
찻잔을 집어 든 황제가 나를 향해 차를 권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러고는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한 다음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맛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차 향과 온몸에 퍼지는 따뜻한 기운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미소를 지었고 황제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 중에 차를 좋아하는 놈은 한 명도 없는데, 너는 참 신기하다.”
그러게 말이에요.
전생에서도 아무도 닮지 못해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농담 어린 황제의 말에 나는 울컥할 뻔했다.
전생에서 대마법사, 소드 마스터, 엘리멘탈 마스터.
뛰어난 큰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숙부와 비교당했던 서러운 나날들.
그것을 떠올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주워온 놈은 아닐까요?”
“그러기에는 외모가 너무 똑같지 않느냐.”
나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황제 또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황제의 말이 맞다.
나의 겉모습은 정말 아버지와 황제, 그리고 숙부와 닮아 있었다.
그 누가 봐도 우리가 가족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말이다.
“폐하.”
잡담은 여기까지.
찻잔을 내려놓은 내가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자 황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의 부름에 여유 있게 대답하는 황제.
나는 그런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에 나는 긴장되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성녀를 풀어주시지요.”
“싫다.”
그리고 단칼에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