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9화
제159편 친구의 부탁
제국의 수도 팔센.
팔센에 도착한 크산느는 근처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산에 착륙했다.
그런 크산느의 등에서 내려 곧장 레브의 집으로 걸음을 옮긴 나.
마나를 사용하여 걸음을 옮겼기 때문에 나는 순식간에 레브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아담한 이층집.
그 앞에 멈추어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느껴진다.
아담한 저택 안, 고대 불의 정령을 지니고 있는 칼론의 기운이 말이다.
“하아…….”
칼론 녀석…… 괜찮을까?
레헤튼의 말대로라면 녀석은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며 자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녀석에게 내가 뭐라고 위로해줘야 하지?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정말 필요한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말이다.
-그냥 옆에 있어 줘.-
그때, 나의 고민을 알았을까?
실체화를 풀고 나의 어깨에 앉아있던 크산느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걸로 될까?”
크산느의 조언에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크산느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계속, 옆에 있어 주면 되는 거야.-
“…….”
크산느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나.
스윽.
그때, 나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나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엘로나.
그런 엘로나의 모습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일단 가서 옆에 있어 주자.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눈앞에 보이는 레브의 집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지금 뭐하는 짓이야!”
처음이었다.
언성이 높아진 칼론의 목소리가 말이다.
그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레브의 집 안에서 들려오는 칼론의 높은 목소리.
그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칼론이 저렇게 언성을 높인다고?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럴 리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비켜! 너는 악마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어!”
“레브! 제발! 한스를 내버려 둬!”
그때 막 문을 열려던 나 대신 안에서 한 여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붉은 머리 청년이 나와 먼저 문을 나선 여인의 팔을 잡았다.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풍경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칼론을 혐오하듯 소리치는 레브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고, 그런 레브를 붙잡으며 소리치는 칼론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도대체 왜지?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주…… 주군…….”
그때,
칼론이 나를 발견했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리고 레브 또한 나를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왜 저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 거지?
방금까지 화를 내며 소리치던 레브는 온데간데없이 정말 반가운 듯 환한 미소를 짓는 레브의 모습에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뭐하는 짓이야?”
그런 둘에게 다가간 나.
내가 차가운 음성으로 묻자 칼론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 자식아.
고개를 숙이지 말고, 그냥 말을 하라고.
나는 언제든지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내가 생각한 대로 행동하지 않고 묵묵히 사과를 하는 녀석의 모습이 너무나도 야속했다.
저 자식.
정말 왜 이렇게 자신의 속을 썩인단 말인가?
“전하! 제가 나중에 인사드릴게요. 한스를 잡아와서 미하일 님에게 기도를 올려야 해요!”
“뭐……?”
미하일에게 기도를?
나의 시녀였던 레브.
그가 나에게 예를 갖추기 전에 신부터 찾는다고?
감히?
“레브, 요한은 황태자야. 예를 갖춰.”
너무나도 어이없는 레브의 행동에 내가 말문이 막히자 옆에 있던 엘로나가 조금은 차가운 목소리로 레브에게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미하일 님에게 기도를 올려야 해요, 잠깐만요!”
순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레브.
나와 엘로나는 그런 레브를 보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요한…… 레브의 몸에서 사악한 기운이 느껴진다.-
<어디서.>
그때, 크산느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바로 되물었다.
10년 전, 위즐리를 처음 보았을 때 크산느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위즐리는 피를 즐기고, 자신이 악하다고 단정 지은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엽기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 또한 마음의 병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크산느의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가 되었고 나는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역시…….
크산느의 대답에 나는 역시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레브는 지금 정상인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레브!”
그때, 레브가 나의 옆을 지나쳤고 칼론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레브의 손을 잡았다.
퍼억.
그리고 레브의 목을 쳐서 기절시켜버렸다.
“악…… 마…….”
기절하면서까지 칼론에게 악마라 칭하는 레브.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굳어진 얼굴로 칼론을 바라보았다.
마치, 못 볼 것은 보여주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칼론.
그런 칼론의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미안해하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주군.”
나의 물음에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칼론.
나는 그런 칼론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지금, 나에게 사죄가 아니라 도와 달라고 해야 한다.”
“…….”
나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칼론.
나는 그런 칼론을 향해 다시 말했다.
“다시 말해라.”
제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란 말이다, 이 망할 자식아!
“아닙니다.”
하지만 대답은 같았다.
칼론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자식…… 결국 혼자 삭이고 혼자 상처받을 생각이다.
“칼론.”
“예, 주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고해.”
“…….”
“명령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명령이라는 방법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강압적인 방법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말이다.
“…….”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칼론을 바라보았다.
어색한 듯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칼론.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짜악!
그러고는 녀석의 뺨을 후려쳤다.
“…….”
“요한!”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크산느는 얼굴을 굳혔고 슬픔에 눈물을 흘리던 엘로나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눈이 돌아가 버렸다.
“나는 네 주군이기 전에, 친구다.”
“…….”
“왜 나에게 도와 달라고, 미리 말을 하지 않은 것이지?”
“무슨 염치로 그러겠습니까?”
나의 물음에 칼론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자신의 여인 때문에 주군에게 도와달라는 것은 힘들겠지.
하지만…… 섭섭하다.
정말 섭섭하다.
“레브는 황궁으로 데려가 감금시키겠다, 그리고 지금 당장 크림슨을 만나러 간다.”
“주군…….”
나의 결정에 칼론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리곤 나는 그런 칼론을 보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전력을 다해 너와 레브를 도운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하겠다.”
“…….”
나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칼론.
오늘따라 너무나도 작고 초라해 보이는 칼론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마음이 심약한 레브의 잘못이다.”
“그때, 제가 옆에 있어 주었다면 레브는 심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브는 강한 아이였으니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졸지에 홀로 동생들을 돌보게 된 레브.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 칼론마저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 너무나도 외로웠던 레브.
그런 그녀를 칼론이 변호하며 말하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칼론을 바라보았다.
“그것까지 왜 네가 책임져야 해?”
“…….”
“너는 네 인생을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레브는 도태된 것이다.”
“아닙니다…….”
조금은 차갑고 정이 없었을까.
나의 말에 칼론은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없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레브의 보호자인가? 그저 사랑하는 연인일 뿐이었다. 왜 네가 책임져야 하지? 레브는 너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어린아이인가?”
“주군!”
나의 물음에 칼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 살벌하다.
처음으로 나에게 화를 내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세상에서 나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부모님과 큰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너뿐이다.
호흡이 걸치어진 녀석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레브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정말 네 탓이 아니야. 그 당시에 네가 옆에 있었다 하면? 네 말대로 괜찮아졌을지 몰라. 하면 그 이후는?”
“…….”
“그 이후, 네가 없을 때는 어쩌지? 네가 평생을 옆에 있어 줄 생각이었나?”
“…….”
나의 물음에 칼론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녀석도 아주 복잡할 것이다.
그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마음 알아. 만약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너와 같았을 것이다.”
입장 바꿔, 엘로나가 레브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미쳐 돌았을 것이고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칼론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제발…… 너를 힘들게 하지 말도록. 명령이자, 부탁이다.”
“…….”
진심이 담긴 나의 명령이자 부탁.
그에 칼론은 처음으로 불복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던 것이다.
말없이 고개를 숙인 칼론을 보며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레브의 치료에 최선을 다할 테니 말이야.”
진심이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반드시 레브의 심각한 신 의존증을 고치겠다.
레브를 위해서?
아니,
칼론의 행복을 위해서.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칼론에게서 듣고 싶어 했던 그 말이었다.
너무나도 작은 목소리였지만 똑똑히 들은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 * *
“더 강해지셨습니다. 성자님.”
크림슨이 기거하고 있는 보육원.
그곳에 들어선 나는 나를 맞이하는 크림슨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임무 완료로 오른 신성력.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크림슨이 아는 체를 해왔고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주변에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크림슨.”
의자에 앉은 내가 크림슨을 부르자 크림슨은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 성자님.”
“성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와 이야기를 마치고 사라졌습니다.”
“흐음…….”
크림슨의 대답에 나는 조용히 턱을 어루만졌다.
루멘이 그냥 사라졌다고?
그렇게 개념 없는 애는 아닌데…….
“성녀가 어디 간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나?”
“없었습니다.”
나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은 크림슨.
나는 그런 크림슨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교단의 상황은?”
“포교에 노력 중입니다. 또한, 황제 폐하께서 트레이 교단을 국교로 삼으시겠다고 발표하실 예정이라 교단의 교리를 정리 중입니다.”
“뭐?”
국교라고?
이 무슨 개 같은 상황인가?
생각지 못한 크림슨의 말에 내가 인상을 찌푸린 채 크림슨을 바라보자 크림슨은 그저 좋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