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0화
제140편 거래성립
“하아…….”
한적한 산골에 위치한 작은 마을.
그곳의 촌장직을 맡고 있는 노인, 카울은 창문 밖에서 하늘에 구멍 뚫린 듯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만 오면 떠오르는 가슴 아픈 기억.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외딴 곳에 위치한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젊은 여인, 그리고 사라진 그 여인의 딸.
마을 사람들에게 마녀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살아가던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모녀였다.
그렇기에 카울은 그런 모녀가 신경 쓰였고, 마을 주민들 몰래, 때로는 당당하게 그런 모녀들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어느 날 죽은 채 발견된 여인과 거짓말처럼 사라진 아이의 행적에 진작 그 모녀를 거두어 돌보아주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자신이 직접 그 모녀를 거두어들이고 친딸, 손녀처럼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제대로 돌보아주었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자신은 이 마을의 촌장이었고, 주민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 생각 때문에 대놓고 여인과 아이를 거두어 주지 못했던 카울이었기에 후회는 더욱더 막심했다.
찌릿.
“하아…….”
카울은 그 비극이 일어나고 10년이 흘러서도 비가 내리면 무릎이 아파오며 그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이 죄책감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떨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저 매일 밤 늙은 노인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후회할 뿐이었다.
“촌장님!”
그때.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카울의 집 현관문을 강하게 열고 들어오며 한 사내가 카울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카울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적한 시골 마을인 이곳에서, 사람들이 저렇게 다급한 표정을 지을 일은 별로 없었기에 본능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난 것을 알아챈 것이다.
“황성에서…… 기사들이 찾아왔습니다!”
“뭐?”
영주성도 아니고 황성에서?
이 시골 마을까지 기사들이 찾아왔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때.
“촌장은 어서 앞으로 나오시오!”
문밖에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울은 서둘러 문밖으로 나섰다.
투두두둑!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당당하게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
은은하게 붉은빛이 감도는 멋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는 청년과 그 뒤에 검은색의 갑옷을 입고 중무장한 20명의 기사.
그들을 발견한 카울은 화들짝 놀라며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머리 청년의 앞으로 달려갔다.
“미천한 이 노인네가 이곳의 촌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적한 시골 마을의 촌장.
먹은 것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는 미천한 평민인 카울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기사들의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촌장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울의 귀에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기사, 아니 황성에서 나온 기사라면 분명 귀족일 것이다.
아무튼, 그런 대단하신 분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정중한 어투.
그에 카울은 황공하다는 듯 이마를 바닥에 처박으며 입을 열었다.
“카울입니다!”
“그렇군요. 일어나십시오, 카울.”
촌장인 카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붉은 머리의 기사, 아니 요한의 명을 받고 성녀 루멘과 함께 이곳에 찾은 칼론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쇤네가 어찌!”
부드러운 칼론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당치도 않다는 듯 부정하며 고개를 더욱더 깊이 숙이는 카울.
사실 그는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높으신 분들이 변덕을 부려 이 작은 마을에 해코지를 한다면 자신 같은 힘이 약한 평민들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걱정스러웠고, 또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런 카울의 행동에 칼론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가만히 자신의 옆에 있던 성녀 루멘.
그녀의 의중이 궁금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그런 칼론의 시선에 새하얀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루멘.
그녀의 입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카울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라니요! 아가씨께서는 미천한 저에게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멘의 부름에 당황한 카울이 황급히 대답했다.
카울의 행동은 어느 평민과 다르지 않았다.
평범한 귀족을 만났다면 평민인 그들이 취하는 행동은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그런 카울의 행동에 칼론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 평민이라 생각하고 자라왔던 칼론이었기에 카울의 모습이 안쓰럽고 또 남 같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카울의 모습에 루멘은 조용히 로브를 벗었다.
“아…….”
황성에서 나온 기사들의 방문에 괜한 책잡히지 않기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기에 볼 수 있었다.
로브를 벗자 보이는 아름다운 백금발과 신비로운 황금색의 두 눈동자.
살짝 처진 눈꼬리가 너무나도 인상적인 자애로운 미녀, 루멘의 모습을 말이다.
너무나도 성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마을 주민들은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할아버지. 고개를 드세요.”
로브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루멘이 다시 따뜻한 목소리로 카울에게 말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카울.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루멘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10년을 자책하며 그 아이가 컸으면 이렇게 컸을까, 매일 매일 아이의 얼굴을 그려보았던 카울이다.
수많은 얼굴을 그려보며 깊은 죄책감을 잠시 잊었던 카울은 기사들과 함께 온 여인을 보며 경악했다.
매일같이 그려오던 아이의 얼굴 아니, 자신이 그려온 모습보다 더 훌륭하게 자란 아이가 완벽한 숙녀가 되어 서 있었다.
“아…… 아…….”
루멘의 얼굴을 알아본 카울.
그는 차오르는 눈물을 느끼지도 못한 채 놀란 표정으로 루멘을 바라보았다.
그런 카울의 모습에 루멘은 떨어지는 비를 아무렇지 않게 맞으면서, 또 떨어진 비로 인해 흙탕물이 된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었다.
스윽.
그러고는 카울의 늙은 두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잘 계셨어요……?”
“저…… 정말 너냐?”
옛날과는 너무나도 다른 루멘의 모습.
이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루멘을 보며 카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루멘은 미소를 지으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아아…….”
그런 루멘의 확답에 카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에 있는 루멘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너무나도 훌륭하게 자라 이제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루멘의 모습에 카울은 눈물을 흘리며 안도했다.
루멘은 그런 카울을 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이제 와 인사드려 죄송해요. 많이 걱정하셨죠?”
“아니…… 아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으면 되었어.”
루멘의 사과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는 카울.
루멘은 그런 카울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이제는 자신보다 왜소해진 노인, 카울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정말 감사했어요, 할아버지.”
“내가 잘못했다…… 더 챙겨주었어야 했는데…….”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버린 루멘의 품에 안긴 카울.
그는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따뜻한 목소리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을 탓했다.
“…….”
“칼론 경.”
가만히 그 둘을 바라보고 있던 칼론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블랙 기사단의 부단장 레인.
그가 칼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 요한의 명령.
그것을 시작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렸다가 시작하시죠.”
레인의 부름에 눈물을 흘리며 해후를 하고 있는 루멘과 카울을 바라보던 칼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 칼론의 대답에 살짝 미소를 지은 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 * *
“제가 왜 도와줘야 합니까?”
오스란 왕성, 황제의 응접실.
그곳 소파에 앉은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코피아와 친하지 않았나?”
“…….”
나의 칼 같은 대답에 루틸루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양반이 장난하나.
선을 넘는 루틸루스의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루틸루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저는 황태자입니다.”
“진정하게.”
나의 눈에서 일어난 분노를 읽었을까?
나의 경고에 루틸루스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런 루틸루스의 모습에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영감한테 이러니 내가 너무 나쁜 사람 같지 않은가?
-나쁜 놈.-
저 자식.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네.
나의 귀로 들려오는 크산느의 목소리를 가볍게 흘려들은 나는 다시 루틸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마적 토벌은 알아서 하십시오.”
오스란 왕성에 위치한 사막.
제국과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막을 반드시 지나야 했고, 그 사막은 마적들이 지키고 있었다.
사막의 주인은 마적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수많은 상인들은 그런 마적들에게 통행세를 내야 했고, 마적들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물론, 상인들을 죽여버리고 재물과 여인을 납치해가는 경우도 흔했다.
그런 마적들의 행태에 왕국에서는 몇 번이고 병사를 보냈지만 사막에서 자라온 마적단을 이길 수는 없었다.
루틸루스도 하지 못한 일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기에 지금은 반 포기한 상태.
그런 마적들의 토벌을 도와달라는 루틸루스의 말에 나는 칼같이 선을 그었다.
물론 마적 토벌은 제국에도 어느 정도 이득이 된다.
제국의 상인들이 더욱더 간편하게 무역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한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마적 토벌을 위해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낭비였으며, 왕국의 상단들이 제국에 들어왔지, 제국의 상단들이 왕국에 가는 일은 별로 많지 않으니 말이다.
부족한 것은 왕국이다.
그들이 부족하니 문명이 앞선 우리 제국에 물건을 팔러, 사러 오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황태자인 내가 나서서 마적들을 토벌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귀찮다.
“그냥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네.”
“그럼 무엇입니까.”
“왕위를 위즐리에게 넘기겠네.”
“…….”
생각지 못한 루틸루스의 조건에 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코피아와 교제 중인 위즐리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제정신이십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내가 정색을 하며 묻자 루틸루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네.”
“…….”
이 영감.
진심이다.
“시우 공작은?”
“이미 이야기를 마친 상태야. 녀석은 왕위에 관심이 없네, 아니 정확히는 포기했다고 해야지.”
나의 물음에 루틸루스는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루틸루스의 모습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야기, 들으셨군요.”
약 17년 전.
시우 공작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를 국왕인 루틸루스가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네, 코피아를 찾고 나서 자백을 하더군.”
“용서를 해주셨군요.”
“…….”
나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루틸루스.
그에 내가 다시 놀란 표정으로 묻자 루틸루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완벽하게 용서는 하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그런 루틸루스의 모습에 나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약했다.
“거절합니다.”
위즐리가 왕위를 물려받더라도 그게 뭐?
그리고 위즐리는 제국의 귀족이다.
누가 이곳의 왕이 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은가?
“역시…… 부족한가.”
나의 확실한 거절에 루틸루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거래 조건이 약합니다.”
“확실하게 마적들을 처리해준다면 우리 또한 공국으로 들어가겠네.”
“!!!”
-미쳤군.-
자발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제국의 밑으로 들어온다는 루틸루스의 이야기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나의 어깨에서 두 눈을 감고 있던 크산느 또한 마찬가지로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적들을 확실하게 처리해주게. 하면 제국의 밑으로 들어가겠네. 대신 자치권은 확실하게 주겠지?”
속국인 공국으로 들어오겠다며 조건을 거는 루틸루스.
나는 그런 루틸루스를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거래 조건이 약한 줄 알았는데 개뿔.
존X 대박인 거래 조건이었다.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루틸루스를 보며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루틸루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래성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