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8화
제138편 오스란 왕성(2)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해지는 푸른 바닷가.
푸른 바다의 물살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배.
그 거대한 배의 갑판 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팔짱을 낀 채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한 청년이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의해 휘날리는 붉은 머리, 그윽한 눈빛이 인상적인 붉은 눈과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청년.
그런 미청년의 옆으로 하얀색의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여인이 걸어왔다.
짹짹!
여인의 어깨에 앉아있던 작은 새.
그 작은 새가 붉은 머리 청년을 보며 반가운 듯 소리를 냈고 그에 로브를 눌러쓴 여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짭새가 칼론 경이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요.”
옥구슬 굴러가듯 너무나도 듣기 좋은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에 미청년, 아니 칼론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짭새와 로브의 여인, 루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흠칫.
조금은 싸늘한 칼론의 말투.
그의 차가운 말투를 느낀 루멘은 흠칫하며 가만히 칼론을 바라보았다.
그런 루멘의 시선에 가만히 고개를 돌린 칼론.
짹!
짭새는 그런 칼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표정이 좋지 않은 칼론을 보며 루멘이 조심스럽게 묻자 칼론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루멘을 지나쳤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
자신을 지나쳐 먼저 선실로 들어가 버리는 칼론.
루멘은 몸을 돌려 그런 칼론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가만히 칼론을 바라보던 루멘의 옆으로, 어색한 표정을 지은 하인리히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네.”
그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루멘.
하인리히는 그런 성녀의 모습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늘 인자한 미소를 짓는 루멘.
그녀의 미소가 오늘은 평소와 달리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 * *
“못났다 칼론…….”
선실로 들어온 칼론.
그는 방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신의 한심함으로 아무 죄도 없는 루멘에게 상처를 주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 때문에 그녀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미친…….”
한참을 루멘에 대해 생각을 하던 칼론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러면 안 되었다.
칼론은 선실에 마련된 책상 의자에 앉았다.
스륵.
그러고는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여러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어린 시절, 북방에 있던 자신을 위해 레브가 보내준 응원의 편지였다.
칼론은 마음을 다잡으며 레브가 보내주었던 편지를 읽었다.
그녀가 이 편지를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썼을지 상상하며 말이다.
* * *
“한스, 이렇게 노니까 너무 좋다!”
제국의 수도 팔센.
귀족이지만 태어나기도 전에 몰락귀족이 되어버린 한스는 평민과 같은 사상을 지닌 어린 소년이었다.
돈이 귀하고, 친구들과 뛰어놀기 좋아하는 평민 아이 말이다.
아무튼, 그런 한스는 오랜만에 만난 동네 아이들과 즐겁게 놀았다.
그중 한 명이 동네 친구들의 무리에서 대장 격인 한스를 향해 말하자 한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그동안 재미없었지?”
“응!”
한스의 큰 목소리에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한스.
이내 아이들을 향해 두 눈을 반짝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전쟁 놀이할까?”
“응! 아랫동네 자크가 계속 까불어! 혼내주러 가자!”
한스의 말에 한 아이가 긍정하며 말하자 한스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자크 이 자식…….”
감히 자신이 없는 동안 우리 아이들을 괴롭힌 것인가?
이거 이거, 안 되겠다.
혼을 내줘야지.
한스는 살벌한 표정으로 주변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준비됐나!”
“예!”
한스의 큰 목소리에 미소를 지은 채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
한스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가자!”
“어디를 가!”
그때.
아이들을 이끌던 한스는 멀리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인 레브.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한스는 그런 레브를 보며 뒷걸음질 쳤고 아이들은 눈치껏 뒤로 물러나 큰 바위 뒤로 숨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한스의 누나, 레브가 얼마나 무서운지 말이다.
“아침 기도도 올리지 않고 도망쳐?”
“아악! 아파!”
한스의 귀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소리치는 레브.
그리고 잡아당긴 귀가 아파 눈물을 찔끔 흘리며 소리치는 한스.
아이들은 그런 둘을 보며 조용히 몸을 돌렸다.
“너희들!”
“네!”
그때.
아이들은 자신들의 귀에 들리는 날카로운 레브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도망가려던 행동을 멈춘 채 말이다.
“너희들도 기도 올리러 가자.”
“싫어요…….”
아이들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레브가 말하자 아이들은 눈치를 살피며 거절했다.
이 세상에 신은 없다고 믿고 자라온 아이들이었기에 없는 존재인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간에 더 놀고 말지.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레브가 무서웠다.
아무튼, 그런 레브의 말에 아이들은 거절했고 그에 레브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한스의 손을 잡고 강하게 이끌었다.
“저런 이단들과 놀지 마.”
“누나……?”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 뛰어놀며 자라온 친구들이다.
한데 갑자기 놀지 말라니?
그럼 자신은 누구와 논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레브의 말에 한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레브를 불렀다.
“어서!”
하지만 레브는 강압적이었다.
가기 싫어하는 한스의 손을 강하게 이끌며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시는 저런 아이들과 놀지 마!”
“누나! 내 친구들이야!”
끌고 가면서도 놀지 말라고 강요하는 레브.
그런 누나의 모습에 한스는 소리치며 부정했지만 레브는 변함없었다.
“어서 와!”
그저 자신의 막냇동생을 강하게 이끌 뿐이다.
* * *
“엘로나, 정말 괜찮을까?”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기 위해 왕성으로 가는 마차를 탄 나.
나는 나의 맞은편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 엘로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칼론을 루멘의 안내 겸 호위를 붙이자고 한 것은 엘로나였다.
칼론과 루멘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은 나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엘로나가 나에게 따로 부탁했고 결국 나는 그런 엘로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칼론이 레브를 버리고 루멘과 눈이 맞았으면 하는 것인가?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
나의 머리에 앉아 잠을 청하던 크산느.
녀석이 두 눈을 뜨고 엘로나를 보며 말했다.
역시 이 녀석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칼론 경은 이미 마음이 시작되었어.”
“엘로나……?”
레브랑 친한 거 아니었어?
조금은 단호한 엘로나의 말에 내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엘로나가 저렇게 확고하게 대답할 때도 있네.
아우 예뻐라.
아무튼, 그런 나의 표정에 엘로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이 없는 이상, 둘은 행복할 수 없어. 오히려 칼론 경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레브와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아.”
“…….”
조금은 정 없는 엘로나의 대답에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엘로나의 말이 맞다.
하지만 사람이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될까?
아마 레브가 받을 상처는 엄청나겠지.
그것이 싫은 칼론은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할 것이고.
“솔직히 내가 봐도, 칼론 경과 루멘 성녀는 너무나도 잘 어울려, 둘이 인연이 아닌가 싶기도 할 정도로.”
-그건 나도 공감이다.-
이 자식, 박쥐야 뭐야?
왜 이렇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거야?
줏대 없는 크산느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나는 이내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씨X.
모르겠다.
그냥 칼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전하, 도착하였습니다.”
그때,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사용인에 의해 열리는 마차 문을 나섰다.
“엘로나.”
내가 먼저 내린 다음, 드레스를 입은 엘로나를 위해 손을 내민 나.
엘로나는 그런 내가 내민 손을 잡고 내려섰다.
꽈악.
나의 손을 잡고 내려선 엘로나.
다 내려선 엘로나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엘로나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그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엘로나.
나는 그런 엘로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저벅.
그러고는 왕성 정문, 나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밖으로 나온 루틸루스 국왕의 앞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국왕 전하.”
“어서 오시오. 황태자!”
초인의 길을 먼저 걸은 선배이자 인생의 선배인 루틸루스.
나의 인사에 루틸루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황태자 전하에게 인사드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루틸루스의 옆.
왕국의 이인자라 불리는 시우 공작과 루틸루스 국왕의 절친한 벗이 된 선생님.
둘이 나를 향해 인사를 했고 나 또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그래.”
어느새 완전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코피아.
사랑을 하면 더 아름다워진다 했던가?
그 말이 맞는 듯했다.
태양 빛이 강한 오스란에서 쉬지 않고 창술 수련을 해왔기에 오스란 왕국 특유의 갈색 피부가 되어버린 코피아.
그녀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했다.
전생에서 제국의 영애들과 다를 바 없었던 코피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으니 말이다.
“여!”
그런 코피아의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위즐리.
저 자식, 표정을 보니 허락받았나 보군.
홀가분한 위즐리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짓고 있는 루틸루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방문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니네, 황태자 그대가 남도 아니고 말일세.”
이 할아버지가.
은근슬쩍 친한 척하네.
위즐리를 힐끔 보며 말하는 루틸루스의 모습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덩치는 멧돼지와 같았지만 머리 굴림은 역시 정치 생활을 수십 년간 한 여우였다.
“그렇지요. 남은 아니지요.”
그리고 나는 그런 루틸루스의 말을 받았다.
상대방이 호의적으로 나오는데 굳이 내가 적대적으로 나갈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헤이 공작이 안 보이는군요?”
드래곤 레어 사건.
그때, 정보 길드장 카리나를 잡아가는 것으로 만족했던 공작이 보이지 않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그에 루틸루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잠시 고향에 내려갔네.”
“네?”
오스란 왕국의 검이며, 루틸루스의 오른팔과 같은 헤이 공작이 고향으로 떠나다니?
“뛰어난 무위를 지닌 황태자를 보고 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는군.”
“흐음…….”
생각지 못한 루틸루스의 대답.
그에 나는 신음을 뱉었다.
나 때문에 왕성을 떠났다고?
이거 괜히 미안해지잖아.
“걱정 말게, 그 친구 오랜만에 열정이 가득했으니 말일세.”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을까?
루틸루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위로했다.
그런가.
나를 보고 감명을 받아 수련을 더 하고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건가.
“역시 저는 대단하군요.”
“음?”
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루틸루스.
영감,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하네.
아무튼, 나는 그런 루틸루스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