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7화
제137편 오스란 왕성(1)
잠시 후.
나는 루멘에게 내가 직접 우려낸 차를 대접했다.
내가 직접 차를 우려낸 것에 한 번 놀란 루멘은 이어, 내가 우린 차를 맛보고는 다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맛있지?
아주 맛있어 죽겠지?
그런 루멘을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쪽 대륙은 살만한가?”
소파에 앉으며 내가 묻자 루멘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 대륙은 이곳과 아주 다릅니다.”
“그래. 통일제국이라지?”
“신성 교국입니다. 대륙이 신님을 믿고 있습니다.”
“재미있군.”
루멘의 대답에 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 가정에는 신님을 형상화한 작은 목상이나 석상이 있으며, 성당에서 아이들에게 기본 지식과 함께 신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주말에는 귀족들, 평민들 모두가 모여 신님에게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웃기는군. 밥 먹을 때도 신님께서 주신 양식이다 하면서 감사기도를 올리겠군.”
루멘의 말에 피식 웃은 내가 장난스레 말하자 루멘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짜냐.
루멘의 물음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튼 저희 대륙은 실생활 모든 것에 신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여, 대륙에서는 왕족 귀족보다는 사제들의 힘이 더 강합니다. 실질적인 신성 교국의 주인은 교황 성하이시구요.”
“교황이라…….”
루멘의 설명에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아닌 교황이라…….
재미있지 않은가?
“황제즉위와 국혼은 교황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며, 기사의 서임권 또한 교황이 지니고 있습니다.”
“뭐……?”
이어진 루멘의 말에 나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황제가 교황의 허락이 있어야 즉위가 가능하다고?
결혼도 교황의 허락?
그리고 수하인 기사 서임권을 교황이 지닌다고?
“그럼 황제는 뭐하는데.”
“황제이지요.”
미친.
내가 아는 상식과 너무나도 다른 나라이다.
신성 교국은 황제라는 존재가 필요하지도 않다.
한데 왜 황제가 있는가?
이것은 황제가 아니라 허수아비가 아닌가.
실 권력이 없는 황제의 이야기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루멘은 살짝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하여 개혁을 원합니다.”
“어떻게?”
루멘의 말에 내가 묻자 루멘은 나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굳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더라도, 본분을 잊지 말고 신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신의 자녀답게라…….”
“신의 가르침을 확실히 전하고, 권력에 욕심내지 않으며 신의 가르침을 일반화시키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재미있군.”
루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루멘이 말하는 개혁이 내가 원하는 트레이 교단이었으니 말이다.
“전하…… 아니, 성자님은 에르님을 만난 적이 있으시지요?”
“그래.”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나.
그런 나를 향해 루멘이 묻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거짓을 알릴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성자님의 몸에서는 신님과 같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내가 좀 완벽하지.”
“…….”
농담인데 정색하기는.
나의 말에 정색하는 루멘을 보며 나는 혀를 한번 찬 다음 소파에서 일어났다.
“크림슨, 우리 교단의 대사제와 만나보도록 해.”
“……?”
일어선 나의 말에 루멘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 개혁, 트레이 교단의 대사제인 크림슨과 대화를 나눠봐. 그리고 교류도 해보고.”
* * *
“레브와는 연락을 하고 있나요?”
“아니요.”
“그렇군요.”
엘로나의 방.
칼론과 엘로나가 차를 마시며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십 분 후.
찻잔을 비운 엘로나가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이 변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엘로나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칼론이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엘로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칼론을 바라보았다.
“주제넘다는 것 알아요.”
“…….”
“하지만 레브도 저에게는 소중한 동생이라 미리 알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칼론 경. 마음의 변화가 있으셨나요?”
칼론의 흔들리는 두 눈을 보며 엘로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 엘로나의 물음에 당황한 칼론.
하지만 이내 흔들리던 두 눈동자를 고정하고, 굳건한 표정으로 엘로나를 바라보았다.
“있었습니다만 없습니다.”
그러고는 확신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
엘로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칼론의 대답은 좋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런 엘로나의 모습에 칼론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확신 어린 칼론의 대답.
그에 엘로나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브가 더 슬퍼할 것 같군요.”
엘로나는 눈치를 챈 것이다.
성녀인 루멘에게 마음이 흔들리지만, 레브와의 인연을 생각해 자신의 마음을 무시하겠다는 칼론의 각오를 말이다.
본심을 파악하고 레브를 안쓰러워하는 엘로나의 모습에 칼론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마치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잠시 흔들린 것은 사실이지만, 제 마음속에는 레브뿐입니다. 레브가 변하지 않는 이상,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왠지.. 제 귀에는 레브가 변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요.”
“엘로나 왕녀.”
엘로나의 차가운 말에 칼론은 낮은 목소리로 엘로나를 불렀다.
이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다.
아무리 자신의 주군인 요한의 안사람이 될 여자라고 해도 이것은 아니다.
무례하고 선을 넘는 칼론의 말에 엘로나는 고개를 들어 칼론의 붉은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레브의 친구입니다. 솔직하게 지금 칼론 경의 모습은 보기 흉합니다.”
“…….”
그런 칼론을 보며 엘로나는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엘로나의 솔직한 말에 칼론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두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지만, 레브의 친구로서 레브를 걱정해 주는 그녀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는 레브도 그리고 칼론 경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엘로나의 말.
그에 칼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세요.”
그리고, 엘로나는 칼론에게 조언을 했다.
그런 엘로나의 조언에 고개를 갸웃거린 칼론.
그가 의문 어린 눈빛으로 엘로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칼론의 모습에 엘로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서로의 행복을 위한 일입니다.”
엘로나의 충고와 조언.
그에 칼론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 * *
“왔는가?”
오스란 왕국의 귀빈실.
그곳에 앉아있던 위즐리는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노인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예의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에스란 후작님에게 인사드립니다.”
“허허. 녀석, 그렇게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된다.”
현자 할아버지라 칭하며 따르던 위즐리.
그런 위즐리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에스란은 웃으며 말한 다음 의자에 앉았다.
“앉거라.”
“네.”
에스란이 의자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위즐리.
그런 위즐리에게 에스란이 말하자 위즐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곧게 펴고 팔을 쭉 뻗어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누가 봐도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위즐리의 모습에 에스란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늘 자유롭던 위즐리가 저런 행동을 취하니 흥미로웠던 것이다.
“그래, 코피아와 교제를 한다고?”
“그렇습니다!”
에스란의 물음에 빠릿빠릿하게 대답한 위즐리!
그런 녀석을 보며 에스란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이 사랑하는 여인.
그 여인의 할아버지인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니 귀여웠던 것이다.
“루틸루스는 너를 좋게 보았더구나.”
“아…… 다행이군요.”
코피아의 친할아버지인 루틸루스.
그가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확언을 들은 위즐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에스란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시우 공작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하더군.”
“……코피아는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에스란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인 위즐리.
그가 다시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에스란에게 묻자 에스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완벽하게 화해했고, 지금은 코피아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다. 그에게도 잘 보여야 해.”
“하아…….”
에스란의 대답에 위즐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넘어야 할 산이 3개나 되니 위즐리의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올 법도 했다.
“전하는 어디 계시느냐?”
그런 위즐리를 보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에스란이 하자 위즐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그…….”
말끝을 흐리며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위즐리.
그런 녀석을 보며 에스란은 살짝 미소를 지은 다음 입을 열었다.
“되었다, 내가 전하를 만나 직접 물을 터이니 어디 계시지만 알려다오”
“사실, 제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코피아의 남자친구로서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지만, 부가적인 이유는 형아…… 아니 전하의 전언이 있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에스란의 앞.
그의 앞에서 최대한 정중하고, 품위있는 말을 선택하며 위즐리가 말하자 에스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위즐리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래, 전언이 무엇이냐?”
“곧 찾아뵙고 인사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구나.”
위즐리의 대답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에스란.
그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위즐리를 바라보았다.
“코피아를 좋아하느냐?”
“이런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
위즐리의 대답에 턱을 괴며 에스란이 묻자 위즐리는 잠시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정은 아니더냐?”
그런 위즐리의 모습에 에스란은 다시 한 번 더 질문을 건넸다.
그런 에스란의 질문에 위즐리는 좀 전과 달리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물론 오랜 세월 친구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우정, 또는 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 못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렇구나.”
위즐리의 단호한 대답에 에스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위즐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코피아는 저의 모든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
진지한 위즐리의 말.
그런 위즐리의 말에 에스란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코피아의 앞에 서면, 저는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습니다. 제가 사람을 치료할 때는 코피아가 저를 대단하다고 칭찬해주며, 제 성격이 문제가 있어 자책을 할 때는 그녀는 옆에서 위로를 해주며 저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워 줍니다.”
“…….”
“저는 그녀의 옆에 있으면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구나.”
위즐리의 진심이 담긴 말.
그에 에스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는 코피아를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를 존경하고 배우고 싶고, 함께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래.”
되었다.
위즐리의 진심을 확실하게 확인한 에스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위즐리를 바라보았다.
“우리 손녀, 다혈질적이고 바보같이 정만 많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야.”
“맞습니다.”
에스란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위즐리.
에스란은 그런 위즐리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부탁하네.”
“!!”
이어진 에스란의 말에 위즐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에스란을 바라보았다.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에스란.
그런 에스란의 모습에 위즐리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벌떡!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십 도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루틸루스에 이어 에스란의 허락까지 맡았기에 거대한 산을 두 개 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기분 위즐리의 인사에 에스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럼 이만.”
“아, 차 한잔 더 안 하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는 에스란을 보며 위즐리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에스란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다음 손님이 기다리고 있네.”
벌컥.
“네놈이구나.”
에스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열린 문.
그리고 그 사이로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중년인이 보였다.
바로 왕국의 이인자이자 코피아의 외숙부인 시우 공작이었다.
그런 시우의 모습에 위즐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초인인 스피어 마스터, 루틸루스의 허락을 받고.
대륙에서 유명한 현자 에스란의 허락을 받고.
이제는 오러 나이트 상급이며, 붉은 사신이라는 이명을 물려받은 시우 공작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
하지만 이내 위즐리는 예의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시우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누구보다 빠릿빠릿하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위즐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대륙에서 현자라고 알려진 에스란.
그는 대륙의 수호자인 드래곤이었으며, 만약 코피아의 눈에 눈물 나게 한다면 브레스를 내뿜어 해밍턴 백작가를 멸문시켜버릴 정도로 코피아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