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5화
제135편 성녀, 루멘(2)
오스란 왕성의 넓은 연무장.
위즐리는 자신을 시종장이라 소개한 노인을 따라 왕성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안내하는 시종장을 조용히 따르던 위즐리는 예상외의 장소에 도착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왜 여기로……?”
그런 위즐리의 모습에 어색한 미소를 지은 시종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왕명이었습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시종장의 모습에 위즐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죄송하다는 것인가?
“네놈이구나.”
그때.
위즐리의 귀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위즐리.
그러자 볼 수 있었다.
웃통을 벗은 채 온몸을 뒤덮은 근육과 흉터를 자랑하며 거대한 창을 바닥에 짚고 서 있는 백발의 노인.
바로 스피어 마스터이자, 왕국의 국왕인 루틸루스를 말이다.
“해밍턴 백작가의 위즐리가 국왕 전하에…….”
파앗.
그런 루틸루스를 발견한 위즐리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갑자기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역시, 제법이구나.”
제국에서부터 위즐리의 몸속에 잠자고 있던 강함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루틸루스.
그가 자신의 일격을 피한 위즐리를 보며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뚝.
하지만 위즐리는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 살짝 상처가 났고, 위즐리의 고운 손에서 피가 떨어진 것이다.
가만히 자신의 피를 바라보던 위즐리.
그가 고개를 들어 루틸루스를 바라보았다.
“좋은 눈빛이군.”
평소와는 달리 살벌한 위즐리의 눈빛.
그에 루틸루스는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싸워야 하는 겁니까?”
“남자라면.”
본능적으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이 전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을 느낀 위즐리.
그런 위즐리가 묻자, 루틸루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창을 짚고 선 채 고개를 끄덕이는 루틸루스의 모습은 견고했고, 또 무인이었다.
그에 잘 느끼지 못했던 호승심을 느낀 위즐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랫배, 단전에 잠들어 있던 내공이라는, 이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계의 힘을 꺼내 들었다.
우웅!
그 순간 확연히 달라진 위즐리의 기세!
그에 루틸루스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손녀사위로는 최고인 놈 같았다.
쿠궁!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콰앙!
심지어 루틸루스를 향해 말이다.
창을 들어 가볍게 벼락을 막은 루틸루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
자연의 힘인 벼락인 줄 알았지만 벼락과 같은 속도와 파워로 날아온 위즐리의 암기였다.
자신의 창에 막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 작은 암기.
그것을 내려다보며 루틸루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구나.”
처음 보는 기술.
그에 흥분한 루틸루스가 위즐리를 보며 말하자 위즐리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수욱!
그리고 사라졌다.
쾅!
쾅!
위즐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또 강한 벼락이 내려쳤다.
엄청난 속도와 강한 내공.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날아오른 수많은 암기들.
움직일 때마다 벼락이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 추뢰보법 墜雷步法 이라는 이름을 얻은 보법이다.
이계에 존재하는 사천당가에서 비기로 통하는 이 무공이 위즐리의 몸을 통해 발현된 것이다.
“크하하!”
벼락과 같은 소리를 내며 패도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위즐리.
그런 위즐리의 공격을 일일이 막으며 루틸루스는 기쁜 듯 소리 내 웃었다.
우웅!
한창 위즐리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단검과 암기를 막아서던 루틸루스는 뒤에서 느껴지는 살벌한 기세에 화들짝 놀라며 창을 강하게 휘둘렀다.
부웅.
크게 휘둘러지는 창과 함께 루틸루스의 뒤를 노리던 암기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웅!
그때 다시 느껴지는 위즐리의 기운.
루틸루스는 다시 몸을 돌렸다.
콰앙!
그리고 자신의 얼굴 앞까지 날아온 위즐리의 암기를 쳐냈다.
부웅.
그와 동시에 뒤로 물러난 위즐리.
루틸루스는 그런 위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푸하하하!!”
그러고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자신의 머리 위.
비처럼 떠 있는 수백 개의 작은 암기들.
자신이 조금이라 움직인다면 저 암기는 비가 되어 자신을 덮칠 것이다.
이 짜릿한 강함.
초인의 경지인 마스터에게도 밀리지 않는 위즐리를 보며 루틸루스는 너무나도 좋았다.
자신의 손녀인 코피아의 짝이 저렇게나 강하다니!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리고 저 녀석에게는 맡길 수 있다.
며칠 전에 되찾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손녀를 말이다.
“합격입니까?”
애초에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루틸루스가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았던 위즐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묻자 루틸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의 손에 쥐어진 창을 강하게 잡았다.
“합격, 하지만 마저 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루틸루스가 대답하자 위즐리는 예의 청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물론입니다.”
콰콰쾅!
바닥으로 내려진 위즐리의 손과 함께 루틸루스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수많은 암기들.
독왕이라 불리는 경지에 오른, 사천당가의 가주만이 사용하는 비기 중의 비기.
하늘을 뒤덮고 있던 꽃이 비가 되어 내린다.
만천화우 滿天花雨.
그것이 위즐리의 손에 의해 펼쳐졌다.
앞뒤 할 것 없이 전 방위로 쏟아내리는 암기를 보며 루틸루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웅!
그리고 이때까지 그의 몸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콰콰쾅!
벼락과 같은 소리를 내며 루틸루스를 몰아붙이는 암기들, 그리고 그것을 귀신같은 창 놀림으로 하나하나 쳐내는 루틸루스.
“크하하하!”
만천화우.
그 암기들 하나하나에 실려있는 강한 힘을 느끼며 루틸루스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즐거웠다.
정말 즐거웠다.
새로운 강자와의 싸움은 늘 즐겁고 짜릿했다.
그리고, 암기라는 작은 무기를 사용하는 위즐리의 무공은 너무나도 흥미로웠고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즐거웠다.
자신이 더 힘들어지니 말이다.
우우웅!
하늘을 가득 메우던 꽃잎과 같은 암기는 쓰레기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 붉은색의 오러를 소환해 창을 뒤덮은 루틸루스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전하야말로 대단하십니다.”
자신의 비기였던 만천화우를 모두 파훼시켜버린 루틸루스.
그런 루틸루스의 모습에 위즐리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푸하하!”
그런 위즐리의 대답에 다시 소리 내 웃은 루틸루스.
뚝.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참을 웃던 루틸루스가 돌연 웃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위즐리를 바라보았다.
“나를 더 즐겁게 해주기를 부탁한다.”
콰콰쾅!
루틸루스의 말과 동시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색의 오러.
강한 기운과 함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색의 오러는 루틸루스의 몸을 뒤덮었다.
그런 루틸루스의 모습에 어색한 표정을 지은 위즐리.
그가 조용히 두 개의 단검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X됐네.”
이제 더 이상 펼칠 비기가 없는 위즐리였다.
“할아버지!”
멈칫.
그때.
위즐리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루틸루스는 자신의 귀를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몸을 멈추었다.
우웅.
그러고는 재빨리 기운을 거두어 들었다.
“하아…….”
그런 루틸루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위즐리.
그 또한 단검을 거두어 들었다.
“할아버지 정말!”
그때, 연무장에 등장하여 허리에 손을 얹고 날카롭게 소리치는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 코피아.
그녀의 등장에 루틸루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왔느냐.”
“정말! 애한테 왜 그래요!”
손에서 흐르는 피와 찢어진 옷자락.
엉망진창이 돼 있는 위즐리를 보며 코피아가 소리치자 루틸루스는 허허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결혼은 언제 할 것이냐?”
“…….”
루틸루스의 물음에 그대로 말문이 막힌 코피아.
방금까지 화내던 코피아의 말문을 막히게 한 루틸루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멍하니 코피아를 바라보고 있는 위즐리를 바라보았다.
“위즐리.”
“예.”
루틸루스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위즐리.
그가 오스란 왕국의 특산품,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코피아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런 위즐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루틸루스.
그가 입을 열었다.
“환영한다.”
“…….”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루틸루스.
위즐리는 그런 루틸루스의 인사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예의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허허.”
그런 위즐리의 인사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루틸루스.
그가 뒤돌아섰다.
“조금 이따가 찾아오거라.”
“네.”
손녀와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빠져주려는 것이다.
“할아버지.”
그때, 돌아선 루틸루스의 귀에 코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내를 흔쾌히 받아준 루틸루스.
그가 코피아가 할 말을 짐작하며 대답했다.
“주우세요.”
하지만 예상과 다른 코피아의 말에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코피아를 바라보았다.
“위즐리를 이렇게 괴롭혔으면, 위즐리의 암기들 주우셔야죠?”
연무장 바닥에 떨어진 수백 개의 작은 암기들.
그것을 가리키며 미소를 짓는 코피아의 모습에 루틸루스는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타앗!
“할아버지!”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곳에서 사라졌다.
멀어지는 코피아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말이다.
* * *
“앉아.”
여관 뒤.
별채에 도착한 나는 빈 소파를 가리키며 상석에 위치한 소파에 앉았다.
“…….”
그런 나의 행동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하인리히.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뭐?”
“잠시 자리 비켜주시겠어요?”
나의 물음과 동시에 루멘이 하인리히에게 말을 했다.
그에 하인리히는 고개를 숙인 다음 물러났다.
아쉽네.
조금 더 놀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인성에 문제 있냐?-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을까?
나의 어깨에 있던 크산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녀석의 말에 피식 웃은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고는 루멘을 바라보았다.
“얘기해봐.”
“…….”
나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돌려 칼론을 바라보는 루멘.
그녀의 눈빛에 칼론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호위입니다.”
“하인리히 경도 저의 호위에요.”
칼론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루멘.
그런 그녀의 대답에 칼론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나갈 생각이 없었나 보다.
“칼론 경. 잠시 이야기해요.”
움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엘로나가 차가운 표정으로 칼론을 보며 말했다.
그에 움찔한 칼론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의중을 묻는 것이다.
끄덕.
그리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엘로나와 칼론이 물러났다.
단둘만이 남게 된 방안.
나는 여전히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루멘을 바라보았다.
“저는 타 대륙, 신성 교국에서 왔습니다.”
“…….”
당연한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모르면 바보지.
“그리고 성녀입니다.”
“아까 얘기했지 않나?”
진부한 루멘의 말.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루멘을 바라보았다.
“빨리, 요점만 말해.”
긴 대화는 싫으니 말이다.
나의 경고에 미소를 지은 루멘.
그녀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천족과 인간족의 혼혈입니다.”
스윽.
흥미로운 그녀의 말.
그에 나는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