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화
제128편 드래곤 레어(2)
“지들 유리할 때는 지들 것이지.”
“뭐라?”
그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 할간의 중얼거림을 들은 헤이 공작이 두 눈을 치켜뜨며 소리치자 할간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 말도?”
스릉.
“건방지구나. 우리는 국왕 전하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다. 이 이상 방해한다면 반란으로 간주하겠다.”
할간의 빈정거림에 분노한 헤이 공작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조금 뽑으며 경고하자 할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기인 메이스를 들었다.
쿠웅.
거대한 굉음을 내며 바닥에 박힌 거대한 메이스.
그 메이스에 몸을 기댄 할간은 삐딱한 표정으로 헤이 공작을 바라보았다.
“왕국에서 우리한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네 이놈!”
할간의 대답에 분노한 헤이 공작이 호통을 쳤고 할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지도는 우리 것이다.”
그때,
그 둘의 사이로 하얀색 터번을 깊게 눌러쓰고 검은색의 마스크를 쓴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미라!”
오스란 왕국의 골칫거리이자 공포의 대상인 전갈 마적단.
그곳의 단주인 미라의 등장에 헤이 공작은 물론 할간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드 마스터를 암살한 경력이 있다는 암살자.
두 개의 단검을 귀신같이 다루고, 사막을 건너는 수많은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받는 마적단이며 사막의 주인이라고도 불리는 미라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헤이 공작과 할간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막의 도적이 이곳까지 무슨 일이지?”
평소 사막을 벗어난 일이 없는 미라.
그런 미라를 보며 할간이 빈정대며 묻자 미라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뇌까지 근육인 네놈이 알 필요는 없지 않나?”
“음침한 자식이 말이 많군.”
미라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친 할간.
역시 용병답게 말재간에서는 당할 수가 없었다.
할간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린 미라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안색이 하얗게 변한 엘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와라. 너를 받아주겠다.”
29살에 오러 나이트에 오른 천재 용병 엘.
그녀를 바라보며 미라가 말하자 엘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레오랑 그레이를 죽인 것이 너희들이지?”
“흐음…….”
적의가 가득한 엘의 물음에 미라는 조용히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레오의 어린 동생을 가지고 협박하고 죽인 것은 왕국군, 즉 헤이 공작 그대의 짓이고.”
“그러게 왜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다시, 적의 가득한 엘의 말에 헤이 공작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행했던 행동이 마치 당연했다는 듯 말이다.
“그리고…… 너를 그 누구보다 존경했던 헤이스, 하츠, 카르, 이오, 다그, 크라. 이 6명의 어린 용병들을 죽이고 고문한 것은 네놈이고.”
“그러게 왜 과분한 지도를 손에 넣은 것이냐?”
용병들의 왕인 할간의 대답에 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저런 쓰레기 같은 작자를 존경하고 용병의 길에 들어선 자신과 이제는 죽은 동생들이 너무나도 멍청하고, 또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단장.”
“말하지 마.”
각오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크리스.
그런 크리스의 행동에 불안함을 느낀 엘이 황급히 대답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도망가.”
“크리스…….”
자신보다도 약한 크리스.
매일 같이 결혼해달라며 매달리던 크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엘은 인상을 찌푸렸다.
“닥쳐. 너나 가.”
“부탁이야. 나는 죄책감으로 살아갈 수 없어.”
엘의 말에 크리스가 간곡한 어조로 대답하자 엘은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자신의 실수로 동생 같은 수하들이 모두 죽었다.
심지어 동생들의 가족까지 말이다.
그런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가야 할 크리스다.
어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곳에서 당당하게 죽고 동생들의 뒤를 따라가 서둘러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겠지.
그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엘이었지만 싫었다.
“너라도 살아. 그리고 반성하며 살아가.”
크리스의 어깨를 잡은 엘이 그를 뒤로 잡아당기고는 앞으로 나섰다.
“단장…….”
그런 엘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크리스.
엘은 그런 크리스를 무시했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는 일어섰다.
“욕심 많은 늙은이들아.”
“뭐라?”
“…….”
“나는 아직 젊은 편인데…….”
당당한 엘의 말에 흥분한 헤이 공작과 조용한 미라, 그리고 능글맞은 할간.
그들 셋을 보며 엘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29살 여자애한테 수하들 전부 다 끌고 와서 물건 뺏는 건 너무 찌질하지 않아?”
“그것을 감수하고도 남을 물건이잖아.”
엘의 당당한 말에 할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엘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너는 오늘부터 용병왕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
“글쎄, 용병들은 네 말보다 내 말을 더 믿지 않을까?”
엘의 말에 할간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엘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저 망할 놈은 실력이 아니라 주둥이로 용병왕에 오른 듯하다.
펄럭!
“!!!”
그 순간!
엘은 품속에서 한 장의 지도를 꺼냈다.
꺼내어진 지도가 바람에 펄럭이는 그 순간.
헤이 공작과 할간, 그리고 미라가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이걸 원하는 것이지?”
그런 셋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은 엘.
그런 엘의 모습에 세 명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수하는 보내줘.”
“단장!”
그런 엘의 말에 화들짝 놀란 크리스.
엘은 그런 크리스를 무시하고는 세 명을 바라보았다.
“어때?”
“…….”
엘의 물음에 입을 다문 세 명.
엘은 그런 세 명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이 진짜 지도인지 우리가 어떻게 믿지?”
세 명의 뒤.
또 다른 한 존재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엘에게 물었던 것이다.
걸을 때마다 허벅지가 보이는 아찔한 긴 치마와 쫙 달라붙는 상의로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여인.
요염한 색기를 자랑하는 여인이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와 앞에 있던 세 명과 나란히 섰다.
“정보 길드까지 나서는 것인가?”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정보 길드.
돈을 받고 정보를 팔고, 정보를 사는 곳이며, 귀족들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길드이다.
그리고 오스란 왕국에 본점을 두고 있으며 오스란 왕국의 뒷세계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왕국에서는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병사를 파견했지만 항상 허탕을 쳤고, 결국, 그들이 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며 포기했다.
사실상 왕국이 진 것이다.
아무튼, 그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자 오스란 왕국의 여인 중 가장 영향력이 강한 존재, 카리나의 등장에 세 명은 물론, 엘 또한 인상을 굳혔다.
“더러운 계집이 왜 여기까지 온 것이냐.”
10년 전.
국왕의 명을 받고 병사들을 이끌고 정보 길드 소탕 작전을 시행했던 헤이 공작.
그의 업적에 유일하게 오점을 나긴 그 작전을 떠올린 헤이 공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카리나를 노려보자 카리나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 노망난 늙은이가 여기에 어쩐 일이세요? 집에서 손자들 재롱이나 보지? 아…… 미안. 손자 얼마 전에 죽었지?”
아무렇지 않게 죽은 손자의 이야기를 꺼낸 카리나.
그녀의 말에 헤이 공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스르릉.
그러고는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움찔
오스란 왕국, 국왕인 붉은 사신 루틸루스 다음으로 강하다고 평가되는 헤이 공작이 진심으로 살기를 일으키며 검을 꺼내 들었다.
그의 기세에 카리나는 움찔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헤이 공작은 그만큼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내 손자는…… 너 같은 더러운 년의 입에서 나올 이름이 아니다.”
5년 전.
국왕의 명을 받고 마적단 토벌에 나섰다가 함정에 빠지고 만 자신의 손자.
명예를 아는 기사로서 수하들을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자신의 손자이다.
자신이 사랑하고, 키웠으며 직접 검술을 가르쳐 주었던 제자이자 손자였다.
하나뿐인 손자가 죽었지만 명예롭게 죽었기에 더더욱 자랑스러웠다.
그렇기에 명예롭게 죽은 손자를 희롱하는 카리나의 행동을 헤이 공작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르릉.
헤이 공작이 검을 빼 듦과 동시에 뒤에 있던 기사들 또한 검을 빼 들었다.
그들은 헤이 공작의 손자와 전우였으며, 선배였고 후배였다.
그 누구보다 명예로운 그가 모욕을 받는 것에 분노를 느낀 기사들 또한 자진해서 검을 뽑아 든 것이다.
채챙!
소드 마스터인 헤이 공작과 정예인 그의 기사들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검을 뽑아 든 마적들과 용병들 그리고 정보 길드원들.
“이봐. 우리는 조용히 있었다고.”
흥분한 헤이 공작을 보며 할간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헤이 공작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할간을 바라보았다.
“빠져라.”
“그러지.”
헤이 공작의 말에 할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빠졌다.
다른 사람들의 싸움에 휘말려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푸욱!
“……?”
하지만 그때.
평소 마적들에게 큰 원한이 있던 한 용병이 미라의 수하인 한 마적의 복부에 검을 찔렀다.
“우와아아!!”
“모두 죽여!”
그것이 시작이었다.
인간의 탐욕으로 모인 탐욕스러운 존재들.
그들이 서로의 욕심과 원한을 위해 서로 검을 겨누며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끄아악!”
“씨X!”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산속 공터.
“단장. 지금이야.”
가만히 지켜보던 크리스가 멍한 표정을 짓는 엘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퍼뜩 정신 차린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의 말 대로였다.
도망갈 기회는 지금뿐이다.
“어서 가자.”
지도를 다시 품 안에 넣은 엘이 크리스에게 말하자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우뚝.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과 크리스의 걸음은 멈추었다.
“…….”
엘과 크리스만이 아니었다.
한창 서로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던 모든 존재가 검을 내리며 행동을 멈추었다.
뚜벅.
그들의 귀, 아니 고막에 울리는 발소리.
분명 작은 발소리인데 그들의 귀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만큼이나 큰 소리로 다가왔다.
우뚝.
걸음을 옮겨, 엘과 크리스의 앞에 멈추어선 미지의 존재.
그의 존재에 엘과 크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감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관이군.”
욕심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인간, 그 인간들이 만든 잔혹한 광경.
그 광경을 본 존재가 불편한 어조로 말했다.
움찔.
채챙.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반 병사들과 길드원들, 용병들, 그리고 마적단원들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미지의 존재.
그의 싸늘한 한마디에 욕심을 위해 검을 들었던 자신들의 행동이 너무나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대는 누구시오?”
그때,
존재의 기운에 잡아먹히지 않는 4명 중 한 명.
소드 마스터 헤이 공작이 정중한 어조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존재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그런 헤이 공작의 물음에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 존재.
그가 손을 들었다.
펄럭.
그리고 깊숙이 눌러쓴 로브를 벗었다.
“!!!”
“서…… 설마!”
대륙에서 보기 힘든 흑발과 아름다운 적안.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왕의 기세.
모든 것이 합처진 인물을 단 한 명.
현재 천재, 영웅이라는 위명으로 대륙을 진동시키는 존재.
바로 그 존재 한 명뿐이었다.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네 명의 탐욕스러운 인간.
대륙을 진동시키는 천재이자 영웅인 단 한 명, 황태자 요한 카르미언 듀크는 그런 네 명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 나는 요한이야.”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