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화
제118편 할아버지와 손녀
“날씨가 좋구나.”
어제부터 자신의 무기력함에 힘이 빠지는 루틸루스.
그는 황궁의 정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햇볕이 너무나도 좋은 그런 날이었다.
“나도 이제는 은퇴해야겠구나.”
술, 여자 이런 것보다 따뜻한 햇볕이 더 좋은 것을 느낀 루틸루스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친아들은 아니지만, 훌륭한 후계자인 시우 공작이 있다.
비록 황태자의 야망이 두렵지만 시우라면 알아서 잘 극복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의 핏줄이 이 세상에 이제 존재하지 않는데, 굳이 왕국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틸루스는 피식 미소를 짓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그때.
루틸루스는 보았다.
약 16년 전에 죽은 자신의 며느리를 말이다.
며느리와 같은 이목구비에, 붉은색의 머리와 초록색의 눈.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은 여인의 모습에 루틸루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할아버지!”
그리고,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에 안겨드는 여인.
해맑게 미소를 짓는 그 모습까지 죽은 며느리와 너무 똑같이 생겼다.
그에 루틸루스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 둘을 향해 걸어갔다.
“녀석 웬일이더냐?”
“그냥!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들리는 듣기 좋은 조손 관계의 대화.
그에 루틸루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감히 자신이 끼어도 되는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응?”
그때, 여인이 그런 루틸루스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시오?”
그리고 에스란이 그런 루틸루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실례했소. 나는 오스란 왕국의 왕 루틸루스라 하오.”
그와 동시에 에스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자신의 손녀 코피아.
그녀의 친할아버지가 등장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에스란 후작가의 영애 코피아입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코피아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루틸루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오. 그럼 이분이?”
그런 코피아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은 에스란.
이내 자신을 바라보며 두 눈을 크게 뜨는 루틸루스의 모습에 서둘러 표정을 지우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에스란 후작입니다.”
“오오. 대륙의 현자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그런 에스란의 말에 루틸루스는 눈에 띄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코피아를 바라보았다.
“손녀도 어찌 이렇게 아름답소이까? 정말 부럽소이다.”
“감사합니다.”
그런 루틸루스의 말에 에스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참, 그러면 영애가 바로 시우의 제자이겠구려?”
“그렇습니다.”
“허허. 그럼 나에게 사손이 되겠구먼 그래.”
“아…….”
코피아의 대답에 루틸루스가 허허 웃으며 말했고 그에 코피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응? 실례인가? 미안허네 그려. 노인네의 주책이었네.”
그런 코피아의 모습에 당황한 루틸루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건넸고, 그에 코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코피아라고 합니다.”
“반갑네.”
그리고 루틸루스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코피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때, 에스란이 루틸루스에게 양해를 구했고 루틸루스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나 보오. 영애.”
“네.”
에스란의 물음에 웃으며 대답한 루틸루스.
그가 가만히 있는 코피아를 불렀고 코피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언제 한번 차 한잔하러 오겠는가? 나도 창을 사용하는 무인일세, 한 수 가르쳐주고 싶어서 그래.”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창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스피어 마스터 루틸루스.
그의 조언에 코피아는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코피아의 모습에 루틸루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에스란을 바라보았다.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살펴가십시오.”
루틸루스의 예의 바른 인사에 에스란 또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고, 고개를 든 루틸루스는 코피아를 향해 한 번 더 웃어 준 다음 물러났다.
“코피아.”
그리고 물러나는 루틸루스의 뒷모습을 보며 에스란은 조용히 코피아를 불렀다.
코피아도 알고, 에스란도 안다.
저자가 바로 코피아의 친할아버지라는 것을 말이다.
“할아버지! 저랑 쇼핑가요!”
그런 에스란의 부름에 에스란의 팔짱을 끼며 쾌활하게 말한 코피아.
에스란은 그런 코피아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음 코피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 * *
“코피아.”
“네 할아버지.”
코피아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에스란.
그런 에스란이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코피아를 부르자 코피아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쾌활한 코피아의 모습에 에스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코피아의 손을 잡았다.
“가서 대화해 보거라.”
“네? 누구랑요?”
에스란의 물음에 코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에스란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코피아의 손을 다독였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어 코피아를 바라보았다.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
“아까 그자를 보니, 많이 외로워 보이더구나.”
수천 년의 세월을 산 에스란이다.
삶의 지혜는 무시하지 못했고, 긴 세월, 온갖 풍파를 겪은 에스란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죽은 날이 얼마 안 남았고, 또, 심각하게 외로워하며 삶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루틸루스가 말이다.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다.”
에스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드래곤에서 늙은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남은 수명은 약 천 년이 된다.
한데 인간인 루틸루스와 코피아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진심이 담긴 에스란의 말에 코피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때까지…….”
“정말이니, 한번 대화는 해보려무나.”
코피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에스란이 그런 코피아의 말을 끊고 다시 권유했다.
그것이 코피아의 행복이라고 생각된 에스란이었다.
그렇기에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에스란의 행동과 말에 코피아는 가만히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싱긋.
코피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주는 에스란.
코피아는 그런 에스란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괜찮아요?”
“네가 그 이를 할아버지라 불러도. 나는 너의 할아버지란다.”
“그건 당연하죠! 저에게는 할아버지뿐이에요!”
에스란의 말에 코피아가 발끈하며 대답하자 에스란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코피아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니 가서 대화해 보거라. 나는 정말 괜찮으니 말이다.”
“……알겠어요.”
결국 코피아는 에스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코피아의 모습에 에스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내 그런 코피아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누가 뭐라 해도 너는 나에게 하나뿐인 손녀란다.”
“네…… 저도 누가 뭐라 해도 할아버지가 최고예요.”
“그래그래.”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 것일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에스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엘로나.”
“…….”
엘로나의 방에 들어선 나.
나는 나의 부름에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엘로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앉아서 나를 향해 시선도 돌리지 않고 차를 마시는 엘로나.
나는 그녀의 뒤로 걸어갔다.
스윽.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런 나의 행동에 방 안에 있던 궁녀는 두 눈을 가렸다.
황족인 내가 하는 애정표현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궁녀들의 모습에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궁녀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나가. 나 엘로나한테 애교부려야 하니까.”
“풋.”
장난스러운 나의 말에 드디어 엘로나가 반응을 했다.
웃겼는지 입가를 가리고 웃은 것이다.
나의 명령에 궁녀들은 깊이 고개를 숙인 다음 황급히 물러갔다.
궁녀들이 물러나고 문이 닫히자 나는 걸음을 옮겨 엘로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턱을 괴었다.
“우리 엘로나. 아직 화 안 풀렸어?”
그러고는 은근한 눈빛과 목소리로 엘로나를 바라보며 말했고 엘로나는 그런 나의 눈빛을 피했다.
스윽.
그런 엘로나의 모습에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엘로나의 손을 잡았다.
“나랑 눈사람 만들러 가자.”
“지금 가을이야.”
“하이아칸에 말이야.”
나의 물음에 엘로나가 쌀쌀하게 대답하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제?”
“지금.”
그런 나의 대답에 엘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이해가 되지 않겠지.
나는 그런 엘로나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죽는다.-
그러고는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산느와 마주했다.
나의 눈빛을 읽은 크산느가 인상을 찌푸리며 경고했고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엘로나랑 인사해야지.”
-…….-
“엘로나는 너 좋아하는데…….”
-아 진짜.-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닥쳐! 알겠으니까 닥쳐!-
훗.
나의 말에 크산느는 신경질을 내며 대답했고 그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디?”
그런 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로나.
나는 그런 엘로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눈사람 만들러!”
그렇게 나는 엘로나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잠시 후.
펄럭!
“와아!”
엘로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하고 새하얀 눈을 밟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 내 친구 죽이지?”
본체화해 있는 크산느의 다리에 손을 턱 올리며 내가 짐짓 멋있는 표정을 짓자 엘로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아니 크산느를 바라보았다.
“크산느 님 최고예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엘로나.
크흑…… 너무 귀여웠다.
-크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근데 그 표정이 내가 아닌 크산느를 향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퍼억.
“이 도마뱀 자식.”
-크라라! 이 자식이!-
괜히 질투가 난 나는 크산느의 허벅지를 걷어찼고 크산느는 드래곤 피어를 내뿜으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크산느 님 참아요…….”
그리고 엘로나의 만류에 언제 그랬냐는 듯 크산느가 진정했다.
-너 조심해라.-
아예 예쁜 말을 사용해가며 경고한다.
저 자식 여자한테 약했나?
“내가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암컷 드래곤을 한번…….”
-크라라라!-
쿵쾅!
“미안!”
오우 겁나 무섭네.
뒤뚱거리며 달려오는 크산느의 모습에 나는 도망치며 사과했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너무 무섭다.
깔리면 나는 최소 사망일 테니 말이다.
덩치 크니까 귀여운 맛도 없고…… 웬만하면 본체화 하지 말라고 해야 할 듯하다.
“호호!”
그리고 그런 우리 둘의 모습에 엘로나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미소를 지었다.
씨익.
그리고 나는 그런 엘로나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뭐 엘로나가 즐거우면 된 거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