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화
제86편 새로운 힘, 신성력
“그만! 그만두세요!”
그런 나의 행동에 대경실색한 로리가 나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눈물이 가득한 그녀의 두 눈동자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비켜요.”
“전하! 세계수는 저희 엘프들이 살아가는 이유이며, 저희들의 어머니입니다. 한데 해하려 드시다니! 저희 종족과 정녕 전쟁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목숨을 다해 당신을 막을 것입니다!”
로리의 만류,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애검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다가온 위로로가 내 눈에 보였다…….
무례한 행동에 나는 눈가를 찌푸렸지만 목숨을 건 듯 비장한 위로로의 얼굴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위로로가 검을 뽑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 있던 모든 엘프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자그마치 수천 명의 엘프들이 말이다.
“오우…….”
결사항전이라도 할 듯한 엘프들의 기세에 움찔한 위즐리가 조용히 삽을 내렸고 칼론은 굳은 얼굴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전하. 조금은 진정하시지요.”
밀리언 공국과 모든 조약을 완벽하게 마친 루드비히 후작.
그가 당황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만류했고 옆에 있던 레헤튼 또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내가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세계수의 수호자다.
솔직히 별 책임감은 느끼지 못하지만 전 스탯 5만큼의 상승을 이미 받은 상태이다.
받을 것만 받고 나머지를 외면하기에는 양심이 찔리잖아?
그리고…… 도와 달라 하잖아? 아프다는데 안 아프게 해줘야지. 그것이 인격을 지닌 인간이지.
푸욱.
로리를 지나친 나는 다시 세계수의 바닥에 삽을 꼽았다.
퍼억.
그리고 흙을 퍼 올렸다.
그런 나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꽉 문 하이엘프 로리.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리가 두 눈을 감았다.
“모두 전투 준비!”
이내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 사이로 죽음을 각오한 듯 결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고 모든 엘프들이 정령력과 마나를 끌어 올렸다.
히이잉!
그들의 모습에 칼론은 자신의 벗인 고대 불의 정령, 화염의 갈기와 말발굽을 지닌 쿠르스를 소환하고는 이내 그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언제라도 뛰어나갈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급박한 현재 이 상황.
레헤튼과 루드비히 후작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칼론의 뒤에 섰고 위즐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가느다란 침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피 보겠다. 헤헤.”
움찔.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섬뜩한 말을 내뱉는 위즐리.
그의 말과 함께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에 엘프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였으며 루드비히 후작과 레헤튼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위즐리를 바라보았다.
“헤헤.”
하지만 위즐리는 이미 흥분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위즐리는 예의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엘프들을 바라보고는 입맛을 다시고 있었던 것이다.
푸욱.
퍼억.
아무튼, 그들이 긴박한 대치 상황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세계수의 모래를 펐다.
그리고 보였다.
검은색으로 오염된 세계수의 뿌리 일부분이 말이다.
치이익!
화악!
오염된 세계수의 뿌리가 공기와 태양 빛을 마주하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물, 물의 정령 계약자가 필요하다! 정화를 해야 해!-
“물의 정령과 계약한 엘프들은 어서 나와!”
그런 세계수의 모습에 나 또한 당황했지만, 나의 귀에 들려오는 크산느의 조언에 황급히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예…… 예!”
그런 나의 외침에 세계수의 상태에 당황한 엘프들이 정신을 차렸고 이내, 백여 명 정도 되는 엘프들이 앞으로 달려왔다.
“모두 정령을 소환해서 오염이 된 뿌리에 정화의 기운을 보내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나의 명령에 군기가 바짝 든 병사들처럼 대답한 엘프.
나는 그런 엘프들을 무시하고 다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머지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땅의 정령과 계약한 엘프들은 서둘러 모래를 뒤집어 세계수의 모든 뿌리가 공기는 물론, 태양 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네!”
나의 명령에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수백 명의 엘프들.
명령을 마친 나는 다시 삽을 집어 들었다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칼론과 위즐리를 바라보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뭐해? 안 파?”
짜식들이 일 안 하고 농땡이 부리려고 하네.
“알겠습니다.”
“응, 형아!”
나의 명령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둘.
칼론은 쿠르스를 소환 해제하며 삽을 집어 들었고 위즐리는 침을 집어넣고 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아…… 정령력이…….”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하나둘 정령계로 역소환되었고, 엘프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리한 정령력 사용으로 탈진이 온 것이다.
치이익!
“아아…….”
모든 정령력을 사용하며, 탈진할 정도로 노력한 엘프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수의 뿌리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에 엘프들은 절망했다.
자신들의 어머니와 같은 세계수.
신목인 세계수가 괴로워하며 오염이 되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던 것이다.
“잠시 비켜주시겠습니까.”
주저앉아 좌절하던 엘프들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에 엘프들은 망연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검은 사제복의 사내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그런 엘프들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준 늙은 인간, 크림슨의 말에 엘프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엘프의 대답에 크림슨은 싱긋 미소를 짓고는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런 크림슨의 뒤를 3명의 사제가 뒤따라 나섰다.
“성자님.”
“뭐?”
심각한 표정으로 세계수의 뿌리를 내려다보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마치,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크림슨의 모습에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의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크림슨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에르님이 내려주신 첫 번째 시련입니다. 저희가 도울 수 있을 듯합니다.”
“뭐? 너희가?”
괴상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들이 해결하겠다는 사제들.
크림슨의 말에 내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크림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의 어깨에 앉아 있는 크산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믿어주시겠습니까?”
“뭐야? 보여?”
크산느를 정확히 바라보며 묻는 크림슨의 행동에 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묻자 크림슨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집니다. 저와 같은 힘을 지닌, 위대한 존재가.”
“무섭네.”
크림슨의 대답에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믿어보지.-
그때, 크산느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동의했다.
“흐음…… 해봐.”
크산느의 동의에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나는 턱짓으로 세계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나의 말에 크림슨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나를 지나쳐갔다.
“모두 물러나 주십시오.”
거대한 세계수의 뿌리 앞.
모든 정령력을 쏟아부으며 간절한 엘프들에게 크림슨이 말을 건넸지만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으며 간절하게 기도할 뿐이었다.
크림슨은 그런 엘프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엘프들이 똑같았다.
한마음 한뜻으로 세계수의 오염이 어서 정화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엘프들이 말이다.
크림슨은 가만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스륵.
대사제라 소개했던 크림슨이 무릎을 꿇자 뒤에 있던 3명의 사제가 크림슨과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덥석.
그러고는 양손을 모았다.
“주신이자 마신이시며 용신이신 에르님. 에르님의 아이인 세계수님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주신이자 마신이시며 용신이신 에르님. 에르님의 아이인 세계수님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진심이 가득 담긴, 절절한 크림슨의 선창에 뒤에서 있던 세 명의 사제들이 후창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기도에도 변함은 없었다.
“흐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를 올리는 그들을 보며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기도한다고 오염된 세계수가 정말 정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가능하다.-
내 생각을 읽었을까?
대답은 하늘도, 크림슨도 아닌 나의 어깨에 있던 크산느에게서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크산느의 말에 나는 오른쪽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세계수, 순수하고 어린 소녀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분께서 아끼는, 딸과 같은 존재이지. 분명 도와주실 것이다.-
“흐음…….”
-성자인 네가 가서 힘을 보태주지?-
크산느의 대답에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이어진 크산느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성자는 개뿔.
지금 저 네 명의 모습은 딱 봐도 미친놈들 같지 않은……?
우웅!
그때.
나는 내 생각을 끝내지 못했다.
크림슨과 3명의 사제, 4명의 사제에게서 보라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
“아아…… 세계수시여…….”
그리고 느껴졌다.
전에 느끼던 미묘한 기운.
나를 달래주며 나를 사랑해주던 어머니의 기운, 그리고 나를 따끔하게 혼내시면서도 내가 잘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기운.
따뜻하면서도 무서웠고, 또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운이었다.
사제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처음 보는 기운에 흠칫하던 엘프들도 하나둘 모여들더니 이내 세계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양손을 정성스럽게 모아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자신들의 어머니이자 신인 세계수를 맞이하듯 말이다.
잠시 후.
보라색 빛을 뿜어내는 세계수의 앞에 서 있는 존재는 다섯 명뿐이었다.
나, 칼론, 위즐리, 레헤튼, 그리고 루드비히 후작 이렇게 인간들만이 말이다.
우우웅!
사아아…….
그리고 우리는 두 눈을 부릅떴다.
우리들의 눈 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는 광경.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한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드높은 하늘.
태양 앞에 모여있던 구름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따뜻한 태양이 밀리언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에서 새하얀 빛과 보라색의 빛이 내려오더니 그대로 세계수를 뒤덮어 버린 것이다.
차아아…….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이 기이한 현상,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계수 뿌리의 검은 기운이 빛에 의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깨끗한 물에 씻겨나가는 때처럼 말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스러운 빛.
그리고 정화가 되는 신목 세계수.
우리는 우리들의 두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눈 앞에 펼쳐진 이 상황은 분명히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저 힘을 오늘부터 이렇게 부르려고 한다.
인간의 조물주, 모든 생명체의 조물주이자 아버지이며 어머니인 신이 사용하는 성스러운 힘.
‘신성력’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