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화
제44편 영웅
칼론의 힘에도 청년은 두 눈을 부릅뜨며 그 세 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우리 아버지를 죽인 원수!”
두 눈에 핏발이 선 채 소리치는 청년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청년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런 청년을 바라보았다.
“푸른매 기사단장 레이놀 백작. 그대의 아버지였지.”
“전하! 저 개자식들은 우리 아버지를 죽인 원수입니다! 어찌 저 더러운 것들을 이곳에!”
“그대의 아버지가 죽인 설인의 수는 30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대 아버지의 수하가 죽인 설인의 수는 백 명이 넘어가지.”
“…….”
청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청년은 입술을 다물고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나는 그런 청년을 내려다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설인들에게 있어 그대는 물론 하이아칸 왕국 모두가 원수라는 뜻이다. 그대처럼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정도의 원수.”
까드득.
이를 가는 청년을 무시한 나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족장들의 옆에 섰다.
“이들은 설인족을 이루는 세 개의 일족의 족장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야만적입니까? 괴물입니까?”
은발에 은색의 눈.
거기에다가 나의 명령으로 정장을 입은 위천과 워레인, 그리고 드레스를 입은 앨런.
그들의 모습에 귀족들은 감히 긍정할 수가 없었다.
귀티가 흐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들이 어딜 봐서 야만인, 설인족이란 말인가?
“설인들과의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추모하고, 그분들 덕분에 이제 전쟁이 끝나, 우리가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전쟁 없이 말입니다. 그것이라면 희생한 분들 또한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화려한 나의 언변에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칼론에게 제압되어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대의 아버지 덕분에 자네는 물론 우리가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네. 아닌가?”
“맞습…… 니다.”
뚜욱.
나의 물음에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런 청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그대의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는 바이네.”
“감사합니다.”
제국의 황태자인 나의 감사인사.
그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나에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런 청년을 바라보았다.
전생에서 20살의 엘로나를 지키던 호위기사.
엘로나를 지키다 죽은 기사다운 기사를 보며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라이언입니다.”
나의 물음에 라이언이 눈물을 닦으며 씩씩하게 대답했고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런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라이언. 기억해두겠네. 부디 좋은 기사가 되기를 바라네.”
“감사합니다.”
생각지 못한 나의 격려에 라이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라이언을 돌려보낸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카자르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저의 사람들입니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부탁드립니다. 이들을 친구로 대해주시고, 이들의 영역을 지켜주십시오.”
“알겠네.”
고개를 숙이는 나의 부탁에 카자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되옵니다!”
하아…….
저 인간 또 시작이다.
가만히 있던 귀족파의 수장, 아이션 공작이 앞으로 나서며 반대하자 그를 따르는 모든 귀족이 앞으로 나서서 카자르의 의견에 반대했다.
10년간 전쟁터에서 시간을 보낸 카자르였기에 그의 왕권이 많이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 부끄러운 상황에 카자르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고 코르와 엘로나 또한 인상을 굳혔다.
“뭐가 아니된다는 것이지?”
싸늘한 카자르의 물음에 아이션이 족장들을 힐끔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희 왕국의 주적이었던 설인들입니다. 이들을 친구로 대하고 영역을 지켜주다니요! 말이 안 됩니다!”
“아 시끄럽네.”
나는 폭발했다.
시끄럽게 쫑알대는 아이션 공작을 보며 내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자 아이션 공작은 인상을 굳히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 저는 왕국의 공작입니다. 어느 정도 예는 갖추어 주시지요.”
“지X.”
아이션 공작의 말에 욕지거리를 내뱉은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아이션 공작의 멱살을 잡았다.
덥석
“전하!”
“공작님!”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기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고 귀족들은 두 눈을 부릅떴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다가올 수 없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을 저지하는 카자르의 명령에 의해, 귀족들은 감히 제국의 황태자인 나에게 맞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뭐하는 짓입니까.”
나에게 멱살을 잡힌 아이션 공작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그런 공작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대의 반대로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면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은 물론, 지금부터 살아가야 할 백성들에게도 큰 잘못을 하는 것이다. 한데 그대는 자존심 하나로 가볍게 전쟁을 더 하자고 말하나?”
“왕국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명예보다 백성이 더 소중한 법이지. 덜 배웠나 보군.”
아이션 공작의 말에 내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이에 격분한 아이션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황태자!”
스르릉.
“입 닥쳐라.”
그의 행동에 내가 반응하기 전,
칼론이 검을 뽑아 그의 목에 가져다 대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국의 손님으로서, 국왕의 앞에서 검을 꺼내 든다는 것은 상당히 실례되는 행동이지만 칼론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저 건방진 노인 하나를 죽일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저에게 검을 겨눈다는 것은, 본국과 전쟁을 하자는 뜻입니다.”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칼론을 한번 노려본 아이션 공작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경고했다.
정말 같잖았다.
아이션 공작의 말에 나는 피식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뭐라도 되는지 아는가 보군.”
“뭐라?”
차가운 나의 목소리에 아이션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그런 공작을 바라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제국이 전쟁을 두려워할 것 같나?”
우웅!
“크윽!”
나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이션 공작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고 나는 거만한 표정으로 그런 아이션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제국이 우습게 보였나?”
“그…… 그런…….”
“고개 숙여.”
나의 말에 변명을 하려는 공작을 보며 나는 차갑게 말했다.
콰앙!
그러자 아이션 공작의 이마가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주르르…….
아이션 공작의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파티홀의 바닥을 적셨지만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이들을 무릎 꿇리고 싶은 나였지만 그것은 카자르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애써 참으며 이마를 박고 있는 아이션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예의를 지킬 때, 그대도 예의를 지키도록.”
“…….”
나의 말에 아이션 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고 나는 그런 공작을 그대로 내버려두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조금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카자르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설인들을 친구로 대하고, 영역을 보존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이겠네.”
나의 물음에 카자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나는 위엄을 거두어 들었다.
“후욱!”
그러자 모든 귀족이 크게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카자르와 코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의 무리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이럴 때는 협박이 최고인 듯하다.
아무튼 파티의 분위기는 망치게 되었고 파티는 흐지부지 끝이 나게 되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족장들에게 다가가 내가 격려하자 세 명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들을 보며 위즐리에게 눈짓해서 쉴 곳을 안내해주었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 * *
“왔냐?”
“언제 왔습니까?”
방으로 들어선 나는 소파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실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털썩.
그러고는 실의 앞에 앉았다.
실은 가만히 그런 나를 보더니 이내 나의 앞에 술잔을 놔두었다.
“……?”
그런 실의 모습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양반이 죽을 때가 되었나?
그렇게 술을 못 먹게 하던 양반이 안 하던 짓을 하니 괜스레 불안한 나였기에 놀란 표정으로 실을 바라보았다.
나의 눈빛에 피식 미소를 지은 실은 나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작은 형처럼 네가 술이 약할 줄 알았다.”
“후후.”
실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고 실은 씨익 미소를 짓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한데 너…… 아주 괴물이더구나.”
술친구를 발견한 듯한 흥미로운 눈빛의 실.
나는 그런 실의 눈빛을 보고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저 눈빛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나 자신이 자주 짓던 미소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실이 따라준 술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으. 설인들의 것이군요.”
도수가 강한 독주.
식도가 타들어 가는 기분에 내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실에게 말하자 실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 하나는 기가 막히더구나.”
“그들의 능력도 쓸만합니다.”
“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냐?”
그런 나의 대답에 실이 술잔을 따라주며 물었고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실에게 술병을 받아 이번에는 내가 실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있냐.”
“적어도 10년 이내일 것 같습니다.”
실의 물음에 나는 술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고 실은 피식 웃고는 나의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가져다 대었다.
쨍.
맑은 소리를 내는 두 개의 술잔.
그렇게 우리는 약속한 듯 술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삼촌.”
“뭐.”
“아이션 공작. 마음에 안 들던데요.”
“죽여.”
“거 참…….”
나의 말에 즉시 대답하는 실을 보며 내가 한숨을 내쉬었고 실은 피식 웃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야. 피의 숙청이라는 것 아냐?”
“…….”
실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얼굴을 굳혔다.
현 황제가 일으킨 최악의 사건, 왜 모르겠는가?
그런 나의 표정에 씨익 미소를 지은 실은 술잔에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권위욕에 찌들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귀족들을 죽이는 데 가장 선두에 있던 게 나야. 공작 1명 후작 2명 백작 5명. 이렇게 내가 죽였지.”
“…….”
갑작스러운 실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실은 술잔을 들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말해. 네가 만들어가는 나라. 내가 도와줄 테니.”
“뭐 합니까?”
술잔을 비우며 멋있는 척을 하는 실을 보며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실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런 실을 보며 나는 술잔을 들었다.
“죽여도 내가 죽입니다. 이제 그만 은퇴하고 쉬세요.”
“얀마. 나 아직 30대 초반이야.”
나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실이 대답하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내년에 중반이죠.”
빡!
그리고 또 한 대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