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제37편 설인족의 시험
“야.”
“왜요!”
와인 한 병을 모두 마신 할버드. 그는 새로운 술병을 집기 위해 손을 뻗을 때 실이 자신을 부르자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물론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다음 깜짝 놀라며 실의 눈치를 살폈지만 말이다.
“언제라도 출진할 수 있도록 준비해.”
“에?”
갑작스러운 실의 말에 할버드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고 실은 와인병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 오후에도 요한이 그쪽 영역에 있다면…… 총공격이다. 설인족을 멸족시킨다.”
“아…… 옙!”
실의 명령에 멍한 표정을 짓던 할버드가 이내 활짝 웃으며 힘차게 대답한 다음 천막을 벗어났다.
언제든지 출진할 수 있도록 병사들을 다그쳐야 했으니 말이다.
* * *
“허어…….”
“와아…….”
천여 명이나 되는 설인족이 모두 모인 지금.
모든 설인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감탄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인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주인공.
바로 나였다.
촤아아아!
떨어지는 폭포에서 물벼락을 맞으며 명상을 하고 있는 나 말이다.
명상은 개뿔.
나중에 엘로나랑 결혼하면 아이는 몇 명 낳을지, 이름은 무엇으로 할지 등등. 미래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한나절이라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엘란 산맥에서 가장 차갑다는 폭포물을 맞고 있는 중이다.
조상 대대로 북부에서 살아가 추위에 관해 뛰어난 유전자를 받고, 북부에서 태어나고 자라 추위에 강한 내성이 있는 설인들조차 가능하지 못한 것을 나는 하는 중이다.
아마 설인들은 자기들 입장에서 야만인인 내가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 엄청난 추위를 견디고 있으니 대단해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내 모습이 너무 잘생기기도 했고,
보라. 몇몇 여인들이 폭포를 맞는 나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히고 있지 않은가?
아마 엄청 섹시할 것이다.
-또 이상한 상상 하고 있군.-
이런, 표정에서 티가 났나 보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크산느의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무표정을 고수했다.
아무튼 귀신같은 놈이었다.
-내 욕하고 있지?-
정말 귀신인 것 같았다.
“북해신이시여. 첫 번째 시험은 끝이 났습니다.”
약속한 12시간, 한나절이 되자 위천이 나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고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위천을 내려다보았다.
아, 내가 구한 소녀는 위천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때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충성을 다하는 위천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이 녀석 덕분에 조금 더 수월한 것도 있으니 말이다.
“불만 있는 자 있는가?”
아무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폭포에서 살짝 벗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의 물음에 모든 설인이 무릎을 꿇은 채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신에게만 보이는 절대복종의 자세.
그것을 나에게 한다는 것은 이미 나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설인들의 모습에 워레인은 고개를 숙인 채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기꾼, 알룬이 아닌 모든 설인족은 북해신을 인정하고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시험은 그만두시지요.”
“사기꾼?”
워레인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워레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때까지, 저희에게 북해신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거짓말을 하며 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긴 죄인입니다. 얼마 전, 눈보라 일족의 한 소녀도 그렇게 희생될 뻔했습니다.”
피식.
역시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거짓말을 하던 알룬은 나의 등장에 설인들에게 의심을 받았고, 이내 내가 겔루 칼립스를 증명하고 모든 것을 증명했음에도 인정하지 않는 알룬의 행태에 그간 이상했던 모든 것들이 폭발했나 보다.
“재미있군.”
저 멀리, 줄에 포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알룬을 보며 미소를 지은 나는 가장 선두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위천과 워레인을 바라보았다.
“다음 시험으로 안내하라.”
오랜만에 주어진 임무를 내가 포기할 리 없지 않은가?
나의 명령에 위천과 워레인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고 이내 바짝 긴장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왜 감탄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고, 그 뒤로 존경 어린 눈빛을 나에게 마구 보내는 설인족들이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이건 무엇이지?”
나는 내 눈앞에 벌어진 이 상황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참으며 위천에게 물었다.
그런 나의 물음에 나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위천이 무릎을 꿇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저희 대전사 시험, 두 번째 아니, 마지막은…… 바로 술입니다.”
키야.
-어이구, 좋겠구만.-
위천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고 크산느는 나를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주 말했기에 크산느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이다.
한데…… 전생에서 엘로나에게 들었던 시험의 내용과 다르다.
아마도 카자르 그 양반, 마나로 겨우 통과했기에 부끄러워서 숨겼나 보다.
자신이 아는 카자르는 술을 잘 못 하는 사내였으니 말이다.
-괜찮겠냐?-
내 앞에 놓인 거대한 술동이.
나의 키만 한 술동이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그 괴물 같은 양에 크산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크산느의 물음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내가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천재인 것은 내가 둔재이고, 아버지가 둔재인 것은 내가 엄청난 천재라고.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술을 엄청 못한다.
그럼 나는?
“재미있겠군.”
그냥 존X 세다.
이때까지 취한 적이 몇 번 없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 마시면 되나?”
입맛을 다신 내가 위천에게 묻자 위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양의 술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내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아직 15살.
성인이 아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기가 하늘의 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북부에 와서 몰래 술을 마시려고 시도를 한 적은 수백 번이 넘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실, 그 인간이 귀신처럼 나타나서 나를 팼다.
나를 애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애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말이다.
하여튼 자기 멋대로다.
아무튼, 그런 서러움을 겪으며 애써 금욕의 생활을 하던 나는 오늘 봉인을 해제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털썩.
나는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고 이내 나의 앞에 놓인 거대한 술잔을 들었다.
술잔만 해도 나의 얼굴만 하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누가 따르지?”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술잔을 든 내가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묻자 대답은 가만히 있던 워레인에게서 튀어나왔다.
워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고 이내 거대한 술잔을 들어 나의 잔에 조심스럽게 따랐다.
“눈비 일족은 활은 물론 함정이나 지형을 파악해 급습을 하는 것이 장점입니다.”
“잘 알고 있지.”
얘네한테 죽은 하이아칸 왕국의 병사만 아마 500명은 될 것이다.
7군단의 병사 또한 십여 명 정도 될 것이고 말이다.
비가 내리는 엘란 산맥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활을 쏘는 눈비 일족은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였고, 또 순간적으로 기습해오는 탓에 병사들에게 큰 피해와 스트레스를 주었던 일족이다.
병사들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눈비 일족을 하도 욕하고 다녔기에 나는 잘 알고 있었고 나의 대답에 워레인은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거대한 술잔이 다 찼고 나는 맑은 빛을 자랑하는 술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북부 설인족의 전통주.
몸에 열을 내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살기 위해 먹었던 독한 술.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북부의 술 제조법은 전생에서 아주 유명했다.
그 술로 인해 하이아칸 왕국이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지 않았는가?
그것을 맛본 적이 있던 나였기에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술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입술과 투명하고 맑은 술이 맞닿자 입술에서 느껴지는 짜릿함.
강한 도수로 인해 입술을 짜릿하게 하자 두 눈을 크게 뜬 나는 그대로 잔을 들어 올렸다.
꿀꺽꿀꺽 꿀꺽.
“헐…….”
독하디독한 독주.
한번 목을 넘어간 그 술은 쉬지를 않았다.
아니 정확히 내가 쉴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술에 나의 눈이 돌아간 버린 것이었다.
거대한 술잔을 한 번에 들이키는 나의 모습에 설인들은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크아아! 이거지!”
잠시 후.
나는 빈 술잔을 내려놓고는 식도에서 느껴지는 뜨거움과 몸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에 이때까지 지켰던 체통을 집어 던지고 온몸을 몸서리쳤다.
너무 좋고 짜릿했다.
“…….”
-미친놈.-
그런 나의 모습에 설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고 크산느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약 두 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위천.”
움찔.
“말씀하시지요.”
술기운이 조금 오른 나의 부름에 위천은 몸을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내가 너 잡아먹냐?”
“아닙니다.”
“덩치도 큰 놈이.”
덩치도 큰 사내가 움찔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던 나의 말에 위천이 송구하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약간은 고지식한 위천의 모습에 문득 칼론이 떠오른 나는 피식 미소를 짓고는 이내 위천을 바라보았다.
“이제 진짜로 데리고 와.”
“네……?”
“설인족의 진정한 대전사를.”
엘리멘탈 마스터 실 공작.
소드 마스터 급의 강함을 지닌 실이 있음에도 설인족을 멸족시키지 못한 이유가 있다.
엘란 산맥의 지형적 유리함? 설인족들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X소리.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실과 카자르에게 그런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것이 문제가 아닌, 설인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설인족의 수호신, 케르파의 존재 때문이다.
전생에서 엘로나를 통해 들었던 케르파의 존재.
저주로 인해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산 괴수 중의 괴수.
카자르가 전력을 다해서 덤벼도 이길 수 없었던 괴수.
그가 만약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멸망하는 것은 하이아칸 왕국이라고 카자르가 얘기했다고 엘로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케르파를 불러오라고 위천에게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그것을 어찌…….”
“웅성웅성.”
나의 명령에 위천은 두 눈을 크게 떴고 수많은 설인족들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설인족들을 한번 쓸어본 후 다시 위천을 바라보았다.
“북해신의 대리자. 나 요한 카르미언 듀크가 왔다고 불러오란 말이다.”
우웅!
나의 명령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위천의 모습에 내가 마나를 끌어올리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나의 모습에 모든 설인족들이 무릎을 꿇었고 위천 또한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분은 현재 거동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주인인 내가 왔는데?”
“용서하십시오!”
우웅!
“크으으.”
이 X끼들.
개념이 없나 보다.
분명 나는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왔다.
한데, 지배자인 내가 이곳에 있는데 이곳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 놈이 등장하지 않는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