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제4편 천재로 한번 살아보렵니다(3)
“대공 전하. 송구하지만 이곳에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그때, 근위 기사로 추정되는 사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아버지는 서류를 덮었다.
“알겠다.”
끼이익.
아버지가 대답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열리는 마차 문.
아버지는 익숙하게 마차에서 내렸고 나 또한 그런 아버지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오후.”
황궁의 드넓은 광장.
새하얀 대리석이 깔린 길과 저 멀리 보이는 백색의 아름다운 황궁.
상당히 아름다웠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황제의 시종장.
회색의 머리칼을 지닌 중년 사내, 드라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아버지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자주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반가움 섞인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의 인사에 드라칸은 고개를 들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아래 대공.
황제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령을 지니고 있는 대공이다.
한 나라의 국왕과 같은 지위인 아버지에게 저딴 식으로 가볍게 말하다니?
나는 살짝 놀란 눈으로 그런 드라칸을 바라보았다.
“자주 오도록 하지.”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한 번 더 놀랐다.
미소를 지은 채 아버지가 그의 투정을 받아준 것이다.
“많이 크셨습니다, 도련님.”
“흐음…….”
놀란 표정을 지은 나를 발견한 드라칸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이자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황궁의 시종장이자, 나의 아카데미 벗이다.”
“아…… 반갑습니다, 시종장님.”
아버지의 설명에 이 상황을 이해한 나는 드라칸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내가 아는 시종장은 나의 눈앞에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아마 내가 어린 시절 존재했던 시종장이었나 보다.
아무튼 아주 예의 바른 나의 모습에 드라칸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고개를 든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벗이라면 당연히 저에게 존중받으셔야 할 분이시죠.”
“……고맙습니다, 도련님.”
평민 출신 드라칸은 나의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잘 키우셨습니다.”
“그렇군. 잘 컸군.”
드라칸의 말에 아버지 또한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드라칸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대공비 마마께서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런 것 같군.”
드라칸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망나니 같은 내가 너무나도 개념 있는 행동을 하자 아버지가 놀라서 평소의 포커페이스를 잃어버린 것이 웃겼던 것이다.
“참.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때, 드라칸이 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가지.”
“예.”
아버지의 말에 드라칸은 고개를 숙인 다음 앞장섰다.
10여 분 정도 걸어 황궁의 안으로 들어섰고 모든 기사의 경례를 받으며 이 나라의 주인인 황제가 집무를 보고 있는 대전 앞에 도착했다.
“폐하. 대공 전하와 아들 요한 도련님입니다.”
“들라.”
대전 문 앞에서 드라칸이 조금은 큰 목소리로 말했고 이내 대전을 지키는 문 건너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황제의 대답에 굳건히 대전을 지키던 문이 열렸고 이내 그 사이로 레드카펫의 끝, 5계의 계단 위에 존재하는 거대한 금색의 의자에 앉은 검은 머리 붉은 눈의 중년인이 보였다.
뚜벅뚜벅.
아버지와 나는 황제를 향해 당당하게 걸어갔고 계단의 5보 정도 앞에서 멈추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카르미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요한 카르미언.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버지와 나의 인사에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저 멀리 보이는 드라칸을 바라보았다.
“문을 닫거라.”
“예 폐하.”
황제의 명령에 드라칸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고 대전 안을 지키는 호위 기사들에게 눈치를 주어 나오게 한 다음 거대한 대전 문을 닫았다.
넓은 대전에 3명만이 존재하게 되자 황제는 황좌에서 일어나 5개의 계단을 내려왔다.
“일어나거라, 나의 동생아.”
“오랜만입니다 형님 폐하.”
계단을 내려온 황제가 아버지의 앞에 서서 말하자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툭!
“짜식이, 형이 자주 오라니까 왜 이렇게 안 오는 거냐?”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인사에 황제는 아버지의 가슴을 치며 장난스레 말했고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는 귀에서 들리는 체통 없는 황제의 말투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 가식 없고 품위 없는 행동과 말투.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황태자로 만들려 했던 나의 큰아버지, 알칸 듀크답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황위 계승서열 3위이다.
한데 왜 황태자로 삼으려 했냐고?
1위는 우리 아버지고 2위는 나의 삼촌, 즉 계승서열 1위와 2위가 지금 황제와 같은 세대인 동생들이었다.
다음 세대에 존재하는 인물은 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현 황제가 황태자였던 시절 진심으로 사랑하던 황태자비가 난산으로 아이와 함께 죽어버렸다.
그에 상처받은 황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나를 정말 이뻐했다.
아버지 몰래 납치해갈 정도로 말이다…….
납치되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자 나는 더욱더 진한 미소를 지었고 이내 나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오는 손길에 깜짝 놀랐다.
번쩍!
“어이구 우리 요한이! 많이 컸네?”
“폐하…… 저 이제 10살입니다.”
나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황제를 보며 내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황제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애가 왜 귀염성이 없어졌어? 너 닮으면 안 된다니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하아…….”
황제의 말에 아버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그런 황제를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조카 요한이 큰아버지께 인사드립니다.”
“그래그래. 큰 빼버리고 아버지라 부를까?”
“형님 폐하!”
“솔직히 저놈 재미없잖아. 나랑 살자. 겁나 재밌을걸?”
솔깃한 황제의 제안에 내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자 황제는 더욱더 신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나라도 너에게 주고 원하는 여인과 결혼을 시켜주겠다. 평민이든 상관없어.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 줄 테니 나에게로 오거라.”
“그거 괜찮은 것 같습니다.”
“요한!”
“뭐? 푸하하!”
황제의 유혹에 내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불렀고 황제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다행이다. 저 녀석과 안 닮아서.”
“저도 재미없는 성격은 별로입니다.”
“우리 조카 뭘 좀 아는구나?”
“애랑 뭐 하십니까 형님.”
폐하라는 단어를 때버린 아버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움찔한 황제는 헛기침을 하고는 뒷짐을 지었다.
“대공.”
“하아…… 예, 폐하.”
자기 불리할 때만 직책을 찾는 황제의 모습에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점심 아직이지?”
“예.”
“밥 먹으러 가자 요한아.”
“네 큰아버지.”
아버지의 대답에 황제가 나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고 나는 보란 듯이 환하게 웃으며 황제가 내민 손을 잡았다.
“크흠…….”
“아버지……?”
그때, 아버지가 나의 옆으로 오더니 슬쩍 손을 내밀었고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저 무뚝뚝함의 극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적조차 없었던 아버지가 황제에게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덥석.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아버지는 그냥 나의 빈손을 잡아버렸고 이내 나는 황제와 대공의 손을 잡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25살인 내가 말이다.
* * *
판게아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듀크 제국.
그곳의 제일검은 아니지만 황궁을 지키는 검인 황실 근위 기사단장 더 패론 후작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에 찾아왔다가 복도에서 만난 황제와 예상외의 손님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그래 더 패론 후작. 무슨 일인가?”
“오랜만이군.”
더 패론 후작의 인사에 두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자 더 패론 후작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위 기사단의 수습 기사들의 실전 훈련을 위한 보고……?”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을 노려보는 엄청난 눈길에 몸을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주군 황제와 인생의 롤 모델인 카르미언 대공의 사이.
제국의 양대 산맥을 한 손에 하나씩 쥐고 있는 검은 머리 붉은 눈의 잘생긴 소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내 아들일세.”
“형님 폐하! 아니네, 후작. 나의 아들이네.”
더 패론 후작의 모습에 황제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카르미언 대공은 화들짝 놀라며 그런 황제를 보더니 이내 더 패론 후작을 바라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반갑습니다, 도련님.”
황제와 대공의 설명에 그제야 소년의 정체를 알아차린 더 패론 후작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위 계승서열 3위.
향후 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소년.
황제의 조카이자 대공의 아들인 소년이었기에 더 패론 후작의 예는 과하지 않았다.
“정.말. 반.갑.습.니.다.”
“……?”
하지만 그 소년은 자신을 싫어하는 것만 같았다.
* * *
‘저 씨방새!’
복도 끝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푸른 머리의 중년 사내.
그를 발견하자마자 누군지 알아차린 나는 죽일듯한 눈빛으로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것밖에 못 합니까?’
‘어떡해…… 대공 전하의 씨앗에 이런 존재가…….’
‘정말…… 부끄럽습니다.’
‘차라리 학문에 매진하십시오.’
무능한 나의 검술 스승이었던 황실 근위 기사단장 더 패론 후작.
아버지를 너무나도 존경한 나머지 그와 다르게 너무나도 무능한 나에게 크게 실망하여 엄청난 수치를 주었던 사내.
무능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나의 모습을 조롱하며 포기하라고 말하던 개 같은 사내.
어찌 잊을까?
전생에서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하던 사내다.
저 사내에게 후회라는 감정을 실어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더욱더 연습했지만 결과는 저 사내의 조롱뿐이었기에 더욱더 미워했다.
“아…… 반갑습니다, 도련님.”
전생에서 맨 처음 만났던 시절 보았던 환한 미소와 과한 예의.
나는 그런 후작의 모습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정.말. 반.갑.습.니.다.”
“……?”
나의 인사에 당황했는지 더 패론 후작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듯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후작을 바라보았다.
“근위 기사단장 더 패론 후작님 맞으십니까?”
“저를 아십니까?”
“큰아버지의 검이신 후작님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10살 답지 않은 화려한 나의 언변.
이성적인 판단이 부족하고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더 패론 후작은 내가 은근히 황제를 큰아버지라 부르며 자신을 칭찬하자 황송해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후후…….
향후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될 내가 무섭긴 했나 보지?
전생에서 나를 그토록 무시하던 놈이 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격하게 반응하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보고는 나중에 받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폐하.”
나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을까?
황제가 더 패론 후작에게 축객령을 내렸고 후작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물러났다.
“무슨 일이냐?”
후작이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니기는.”
나의 대답에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황제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고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 아무래도 막내랑 닮은 것 같지?”
“…….”
“예?”
생각지 못한 존재가 황제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긍정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더욱더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황제와 아버지의 막냇동생.
나에게는 숙부가 되는 7군단장 실 공작.
내가 그와 닮았다니?
전생에서 20년 동안 북부에서 내려오지 않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숙부를?
“아무것도 아니다 밥 먹으러 가자꾸나.”
“…….”
“가자.”
“네.”
황제의 말에 나는 불만 어린 표정을 짓다가 이내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압력과 아버지의 목소리에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무리 가벼워 보이고 친근한 큰아버지이지만 대륙 절반의 주인인 황제다.
절대 예의를 잃어서는 아니 되었다.
특히, 가벼운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모든 원로귀족을 죽여버린 제7대 황제 알칸 듀크의 앞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