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75화
에필로그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무장공비 침투 사건도 이제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갈 때즈음. 전역일을 이틀 남겨둔 전도혁은 말년휴가 복귀 때 사온 전역모를 쓴 채 후임들에게 자랑을 일삼았다.
“보아라, 녀석들아! 이것이 바로 전역모라는 거다!”
“오오옷!! 눈부십니다, 너무 눈이 부셔서 쳐다보기도 힘듭니다!”
이제 막 상병 계급장을 달게 된 전의성이 오버 액션을 취하며 전역모를 쓴 도혁을 찬양하느라 바빴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김조항의 전역.
그의 뒤를 이어 전도혁이 분대장을 이어받게 되었고.
이후 만년 약골이라 불리던 조연도가 도혁의 뒤를 이어 새로운 하나포 분대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전역모를 벗은 이후에 다시 제자리에 앉은 도혁이 옛일을 회상하듯 말했다.
“조항이 형 전역할 때 생각나네. 그때 ‘이제는 우리 차례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 날이 진짜로 오게 될 줄이야. 신기하지 않냐, 성태야.”
누운 채 티비 리모컨을 매만지던 성태가 피식 웃었다.
“조항이 형 전역하는 날에 너, 엄청 울었던 것도 기억나겠네.”
“얌마! 신병들 다 듣고 있는데 쪽팔리게 그 이야기를 왜 해!”
“듣고 있으니까 일부러 하는 거지. 안 그러냐, 만해야.”
두 사람의 동기인 고만해가 킥킥 웃음소리를 자아냈다.
“암! 그렇고말고!”
이들은 내일 모래, 전역의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처음 입대했을 때에는 언제 전역하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전역할 차례가 다가오니, 아직 제대로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서로 그렇게 옛 추억을 회상하듯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였다.
오늘 당직을 맡게 된 조연도가 1생활관 안으로 들어섰다.
“곧 저녁 점호 시작한다고 합니다.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
후임급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오늘의 당직사관은 제1포대에서…… 아니, 이제는 전국구로 유명세를 타게 된 국민 영웅, 강필두였다.
“부대~ 차렷!”
행정반에서 들려오는 조연도의 우렁찬 목소리에 병사들이 앉은 채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이후의 식순을 차례로 진행한 뒤, 필두가 연도와 함께 1생활관으로 향했다.
그의 등장에 병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말년 3인방 역시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말년 킬러라 불리는 남자, 강필두다.
제아무리 전역일이 이틀 남짓 남았다고 한들, 필두 앞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조심하는 게 좋다.
전역 하루 전날까지 작업으로 끌려갈 수 있으니 말이다.
병사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필두가 전도혁 앞에 마주섰다.
“전도혁.”
“병장 전도혁!”
“내일 모래 전역일이었던가.”
“예! 그렇습니다!”
이등병의 자세로, 이등병의 목소리 크기로 답하는 전도혁이었다.
“곧 전역하는데. 기분 좋겠군.”
“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하는 도혁 덕분에 병사들이 웃음을 토해냈다.
평소 같았으면 도혁의 이런 장난을 받아주지도 않을 필두였으나, 오늘은 좀 달랐다.
“그래도 아직 이틀이나 남았으니 몸조심하면서 다녀라.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게 말년병장의 마음가짐 아니냐. 내일은 나도 너한테 큰 작업 안 시킬 거다. 후임들이랑 얼굴 마주 보면서 작별 인사 나눌 시간 정도는 줄 테니 알아서 잘 활용해라.”
“예, 감사합니다!”
“정성태, 고만해. 너희 둘도 마찬가지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감사합니다!”
말년병장 킬러라 불리는 강필두지만, 내일 모래 전역하는 전역자들에게까지 악랄하게 굴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도혁이 속한 기수가 필두 밑에서 고생을 가장 많이 했다.
한창 바쁘게 일할 일병 계급 때부터 필두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일을 해야 했으니.
게다가 무장공비 침투 사건까지 겹쳐서 최소 두 차례 이상의 실제상황에 투입되었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으니, 이틀간의 여유 정도는 필두의 권한으로 충분히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입구 쪽으로 걸음을 돌린 필두가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생활관 점호는 이것으로 마친다. 매트리스 깔고 취침 준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군대의 하루가 저물었다.
* * *
필두가 부여한 하루의 여유.
그동안 전도혁과 정성태, 그리고 고만해는 부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그간의 추억을 곱씹었다.
이후에 다가오게 된 군대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
잠에 들기 전, 병사들이 스멀스멀 도혁과 성태 쪽으로 향해 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기운이 감돌 때, 연도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애들아, 덮쳐!!”
“와아아아!!!”
수십 개의 모포와 포단이 도혁과 성태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을 당한 두 사람이 허둥댔다.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작이 왜 그래?!”
“왜긴 왜야!”
“뭐할지 뻔히 알잖아, 형들!”
병사들의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이름하여 모포말이!
전역자에게 빠지기 힘든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김조항이 전역할 때에도, 그 다음 기수들이 전역할 때도 어김없이 등장했던 예비 전역자 대상 특유의 이벤트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프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수많은 발길질을 겨우 버틴 도혁과 성태.
모포와 포단을 걷어내자, 두 사람이 너덜너덜한 상태로 널브러졌다.
“이 X새끼들! 적당히 밟아야 할 거 아니냐!”
“멍들었다, 멍들었어!”
“하하! 내일 전역하는데 까짓것 멍이 뭐가 대수야. 안 그래?”
“맞습니다!”
“전역 축하해, 형들!”
이게 정말로 축하하는 건지, 아니면 폭행과 악담을 늘어놓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오늘이 지나면 이들과 이렇게 같은 천장을 바라보며 자는 것도 끝이니까.
애교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모포말이가 끝났을 때, 통제관이 생활관 문을 열고서 등장했다.
“모포말이 다 끝났으면 전역자 세 명, 행정반으로 와라. 행보관님이 치킨 사가지고 오셨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튀어나가겠습니다!”
모포말이에 이은 또 다른 이벤트.
필두가 사는 치맥 파티다.
전도혁, 정성태처럼 고만해도 병사들에게 모포말이를 당한 모양인지 그 또한 너덜너덜한 꼬라지로 행정반에 입성했다.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본 필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녀석들. 그러니까 평소에 후임들 좀 잘 대해주지.”
“하, 하하하…….”
“들어와라.”
“예!”
필두의 뒤를 따라 쫄래쫄래 행보관실로 들어서는 이들.
매번 오던 행보관실이 오늘따라 유독 정겹게 느껴졌다.
오늘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행보관실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치킨과 맥주가 이들의 시각과 후각을 자극했다.
군대에서 접하기 힘든 치맥 파티. 서로 잔을 주고받는 동안, 필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가서 할 것들은 정했냐.”
“이제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회 적응부터 먼저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저도 도혁이 생각과 같습니다.”
이들의 말도 설득력 있었다.
사회 적응.
2년간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지냈으니, 적응 기간이 필요할 터였다.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지 이 행보관한테 연락해라. 전역해도 한 번 부하는 영원한 나의 부하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나가서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성태와 만해가 한껏 입 꼬리를 올린 채 대답했다.
그때, 도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행보관님. 진수 소식은 아직 없습니까.”
“진수?”
“예. 전역하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고 갔으면 했는데…….”
“음, 그건 좀 힘들 거 같다.”
“그렇습니까.”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도혁이었다.
진수는 모종의 일로 인해 부재중이었다.
내일이 도혁의 전역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중에 전역하고 나서 따로 놀러 와라. 그럼 녀석이 반갑게 맞이해 줄 거다.”
“예, 행보관님.”
전역이 영원한 이별을 상징하는 건 아니다.
시간과 여력만 된다면, 그리고 먼 길을 오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다.
훗날을 기약하며 도혁은 그렇게 군인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 * *
오전 8시.
이른 기상을 치룬 필두가 거실로 향했다.
그때, 아리따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잤어? 오늘 일찍 일어났네?”
혜정이 앞치마를 두른 채 필두의 아침을 반겨줬다.
벽에는 웨딩드레스로 한껏 치장한 혜정의 모습이, 그 옆에선 어색한 웃음을 지은 필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이제 막 한 달이 되어간다.
그동안 혜정은 다시 일러스트 일을 시작하면서 내조에 힘을 쓰는 중이었다.
의자에 앉은 필두가 차려진 아침 밥상과 마주했다.
“전역하는 애들이 있어서 일찍 나가봐야 할 거 같아.”
“어머, 누구?”
“전도혁하고 정성태, 고만해 세 명.”
“아~ 그분들? 가만. 도혁 씨는 필두 씨 속 많이 섞였던 병사 아니야?”
“그건 예전 일이고. 지금은 나름 쓸 만해졌어.”
지금은 필두의 충신이 되었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필두가 현관문을 나설 때, 혜정이 그에게 다가와 눈을 감았다.
살짝 얼굴을 내미는 제스처를 본 순간, 필두가 가볍게 키스를 했다.
“잘 갔다 와, 자기.”
아직 ‘자기’라는 말보다 ‘필두 씨’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덕분일까. 혜정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행복한 신혼의 아침을 잠시 뒤로한 필두가 부대에 들어설 때, 마침 오전 근무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 중인 제1포대 병사들과 마주했다.
“충성!”
“충성. 아침부터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행정반에 들어섰을 때, 오늘의 당직을 차지하게 된 서수오가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행보관님 오셨습니까.”
“오늘 당직은 너냐.”
“예, 그렇습니다!”
수오도 이제 어엿한 상병이 되었다. 물론, 전역일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말이다.
“병력들 사열대로 집합하라고 해. 그리고 전역자들도.”
“예!”
병력들을 집합시킨 필두.
따로 지시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전역자 3인방이 지나갈 수 있게끔 좌우측으로 나란히 줄을 만들었다.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전역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위병소를 통과했을 때, 전도혁이 필두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행보관님! 부족한 저를 사람 만들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나가서도 몸 건강히 잘 지내라.”
“예!!!”
그리하여 오랫동안 정들었던 병사들을 또 한 번 떠나보내게 되었다.
이윽고 잠시 후.
행정반으로 돌아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제1포대 전용 레토나가 사열대 앞에 정차했다.
뒷좌석에서 하차한 남자 한 명이 저벅저벅 사열대 계단을 올라섰다.
행정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필두가 그를 응시했다.
“왔군.”
필두와 마주한 남자가 묵직한 거수경례를 선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행보관님.”
하사 계급장을 달고 등장한 남자.
황진수. 그가 간부가 되어 다시 필두 곁으로 오게 되었다.
이 얼마나 기구한 인연이란 말인가.
간부를 지원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었다.
필두를 계속 감시하기 위해 간부지원까지 자처하리라고는 예상 못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묘한 안심을 선사했다.
드리무어가 어둠이라면, 마일더는 빛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두 존재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공존 관계다.
필두와 진수, 두 남자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황진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행보관님.”
드리무어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러나.
강필두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