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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행보관되다-174화 (174/175)
  • 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74화

    제46장. 드리무어, 그리고 강필두

    “포위망 구축하고 차근차근 진입한다!”

    “단독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언제 어디서 무장공비가 튀어나올 수 있으니 항상 주의하고!”

    “암구호 반드시 숙지해라! 피아식별 띠도 차고!”

    간부들이 병사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사실 간부나 병사나 정신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낯선 폭발음은 연달아 들려오고, 무장공비가 있는지 없는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불투명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9090대대 제1포대도 마찬가지였다.

    하나포 반장이 이끄는 오대기 소대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으로 전진, 또 전진한다.

    아까부터 계속 이어졌던 폭발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발생한 걸까.

    폭발음이 안 들려오니까 오히려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바로 그 순간,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바스락!

    “……!”

    하나포 반장이 오른 주먹을 쥔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야간이기에 목소리를 함부로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웬만한 부대 명령은 수신호로 전달해야 했다.

    하나포 반장이 구태여 수신호를 선보이지 않았어도 병사들은 이미 수풀 너머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를 포착해냈다.

    ‘서, 설마 무장공비?!’

    ‘이런 X발! 다음 달이 전역인데!’

    ‘침착하자, 침착하자!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병사들의 머릿속에 제각각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손의 떨림에 총구 역시 흔들렸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상대방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인물들이었다.

    “총구 내려놓아라. 나다.”

    “해, 행보관님?!”

    강필두. 그가 이들 앞에 등장했다.

    두 사람 다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투성이였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일을 겪은 게 아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그보다 무장공비는…….”

    “놈들이라면 자결했다.”

    “예?!”

    너무 놀란 나머지 하나포 반장을 비롯해 오대기 소대원들이 입을 쩍 벌렸다.

    아까의 폭발음. 그것을 유추해 보면, 필두가 하는 말을 대략 알아차릴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리자마자 폭발물로 자살을 선택하더군. 위치를 알려줄 테니 다른 부대 사람들과 같이 가 봐라. 시체 몇 구가 있을 거다.”

    “시, 시체……!”

    “육안으로 보기에는 좀 많이 비위 상하는 장면이니까 이 말, 잊지 말고.”

    할 말을 끝낸 필두가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잔의 심장이 폭발할 때. 필두와 진수는 있는 힘을 거의 다 소모한 덕분에 무사히 그의 마지막 일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필두와 진수 측에도 손해가 발생했다.

    거의 되찾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본래의 힘을 다시 소모해 버린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오른손을 가볍게 말아 쥔 필두가 속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힘은 언제든 되찾을 수 있다.

    그저 시간문제일 뿐.

    어차피 카잔에게 레디너스 대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었다.

    필두가 본래의 힘을 되찾는다 하더라도 그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필두가 아닌 드리무어 시절 때에도 온전히 차원 이동을 해내지 못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히 알 수 있는 문제였다.

    혹여나 카잔이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으나 카잔은 필두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총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어렵지 않게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대대장, 포대장을 비롯해 간부들에게 괜찮다는 말을 연달아 하면서 잠시 쉬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후, 임시로 마련된 CP 텐트 안으로 홀로 들어선 필두.

    아무것도 없던 공간 안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끝났군.”

    황진수였다.

    그가 이곳에 잠복해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챘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두는 일부러 이곳까지 걸음을 했다.

    카잔과의 일전은 끝났다. 그러나 아직 마일더의 담판이 남아 있었다.

    “이제 날 어떻게 할 거지.”

    필두가 노골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분간은 예전처럼 너를 감시하는 체제를 유지할 거다.”

    “의외군. 너라면 지금 당장 나를 제거하려 들 거라 생각했거늘.”

    “그럴 수만 있다면 그랬을 거다. 하나 나 또한 너와 마찬가지로 힘을 소모하고 말았다. 이제 와서 너와 직접 맞붙어도 확실히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래서 보류하기로 했다.”

    “솔직하군.”

    “동맹 상태에선 서로 절대적인 정보 공유를 약속했으니까. 난 그저 협약에 따른 내용을 이행했을 뿐이다.”

    “후후. 너는 원래 그런 놈이었지.”

    비록 다른 육신을 빌렸다고 하지만, 마일더는 여전히 마일더였다.

    아직 차원 이동에 관련된 마땅한 연구 결과가 없었다.

    마일더의 지시에 의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긴 하지만,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때까지 진수와 예나가 필두를 감시해야 한다.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게끔.

    그러나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필두는 간부. 그리고 진수는 병사다.

    대략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버리게 되면, 진수 역시 전역을 하게 될 때가 올 터.

    ‘그때가 되면 어떻게 드리무어를 감시하지?’

    이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 * *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필두의 활약으로 인해 또다시 일단락되었다.

    예나의 손에 제압된 고우만 유일한 생존자였지만, 카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역시 자결을 택했다.

    이로써 필두가 목표로 했던 흑마법사 조직은 전부 궤멸하게 되었다.

    목적은 달성했다.

    소중한 이들을 빼앗긴 복수 역시 이루게 되었다.

    이후에 찾아온 건 허망함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고생했네! 자네가 또 한 번 우리 국방부를 구원했어!”

    “감사합니다, 장관님.”

    국방부장관이 친히 필두의 부대를 찾아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국방부장관의 두 번째 방문.

    아마 9090대대 역사상 단기간 내에 이렇게 국방부 장관이 많이 방문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 원인이 단 한 사람, 강필두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실로 놀라운 기록이 아닐까 생각된다.

    필두의 활약상이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면서 그는 국민 행보관에서 국민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사실 무장공비(본래 정체는 흑마법사들이었지만)를 필두가 혼자서 제압한 건 아니었다.

    훌륭한 미끼가 되어준 수오, 그리고 마지막에 필두와 함께 맹활약을 펼쳤던 진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보다도 필두의 활약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은 강필두, 한 사람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진수나 수오는 이에 대해 섭섭함을 느낀다든지 하진 않았다.

    애초에 국민적 관심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그냥 묵묵히 자기 할 것 하고 조용히 살아가기를 원했다.

    사실 필두도 그러했다. 그러나 대중들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필두의 입장에선 오히려 수오나 진수가 더 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 점심에는 국방부 장관과 다수의 참모들과 만찬을. 저녁에는 기자회견 일정이 잡혀 있었다.

    어떤 식으로 무장공비들을 제압하게 되었는지, 어느 방식으로 아무런 피해 없이 사건을 종결시킬 수 있었는지. 그 무용담을 듣기 위함인지 기자들의 손가락은 노트북 위에서 바삐 춤을 췄다.

    강필두는 현재 각종 티비 프로그램에서 섭외 대상 1순위로 군림한 남자다.

    만약 현역 군인이 아니었더라면, 혹은 이른 전역을 했더라면 그를 캐스팅하기 위해 작가들이 발을 벗고 본격적으로 나섰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섣불리 접근하기 힘든 것이지, 필두는 웬만한 연예인들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곤란한 건 강필두, 본인이었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한 뒤 맞이하는 평일 아침.

    오늘은 무장공비 사건 종결 이후 참으로 드물게 정시 출근에 성공한 필두의 모습을 행정반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충성! 행보관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다.”

    오늘은 정상적으로 출근했지만, 내일부터 다시 주말이 시작된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필두는 당직사관을 자처했다.

    본래 로테이션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강필두였다.

    그랬던 그가 일부러 근무를 자처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연락을 피하기 위해서다.

    대대장과의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포대장이 필두를 보자마자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나오셨군요, 행보관님!”

    “죄송합니다. 부대를 너무 오래 비웠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 당직이시던데.”

    “예, 그렇습니다.”

    “내일 목사님 따님이 부대로 오시기로 했다면서요? 영내 출입시켜도 좋으니 행보관님 재량껏 데이트 즐기시면 됩니다.”

    “데이트까지야…… 그런 건 아닙니다만. 여하튼 배려 감사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온전히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장소가 군부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한들, 혜정은 딱히 크게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9090대대는 그녀에게도 친숙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필두도 마찬가지였다.

    일하는 직장이 마음 편한 장소가 되어버리다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군.’

    필두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비쳤다.

    * * *

    토요일 오전.

    평상복이 아닌 군복을 입고 부대로 출근한 필두는 전임 근무자한테 완장을 넘겨받았다.

    “그럼 오늘 근무,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충성!”

    “충성.”

    통제관에게 당직사관을 일임 받은 필두였으나, 곧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 찾아오기로 한 혜정을 마중 나가야 한다.

    현재 시각 오전 9시 반.

    이제 30분만 있으면 그녀가 다시 부대를 방문할 것이다.

    그동안 밀렸던 업무를 보기로 했다.

    책상에 앉아 펜을 굴리는 동안, 위병소로부터 연락이 도달했다.

    키를 받은 당직병이 필두에게 곧장 보고했다.

    “행보관님, 오셨답니다.”

    “오냐. 바로 나간다고 전해라.”

    “그리고 진수도 데려와 달라고 하시던데 말입니다.”

    “진수?”

    “예. 진수 여자친구분하고 같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알았다.”

    말이 여자 친구지, 예나의 정체가 에리나라는 건 이미 필두도 알고 있었다.

    진수와 함께 위병소로 내려간 필두.

    그를 보자마자 혜정이 반갑게 맞이했다.

    “고생하네, 필두 씨. 도시락 가져왔으니까 밥부터 먹을래?”

    “아직 점심시간 아닌데.”

    “아침이야. 안 먹었지? 나도 안 먹고 왔으니까 같이 먹자.”

    혜정과 함께 강제로 휴게실 행에 오르게 된 필두.

    그의 얼굴에 난감함이 감돌았다.

    한편, 진수와 함께 일정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예나가 아직도 못 믿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볼 때마다 저자가 드리무어라는 게 안 믿겨집니다.”

    레디너스를 덜덜 떨게 만든 희대의 악인이 고작 여자 한 명에게 붙잡혀 강제로 아침 식사를 해야 하다니.

    진수가 쓴웃음을 띠고서 예나의 말을 받아줬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드리무어가 아닌 강필두다.

    진수는 그렇게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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