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73화
제45장. 악인 대전(2)
드리무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카잔의 앞에 도달했다.
이윽고 오른손에 가득 담은 마나 덩어리를 정확히 카잔의 명치 부근에 찔러 넣었다.
퍼엉!
충격파가 뿜어져 나오며 카잔의 몸이 크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를 잘근 깨문 카잔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카잔. 그러다가 내 칼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니까.”
“……!”
순식간에 다가온 마일더가 마나 소드를 휘둘렀다.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상반신을 뒤로 휘청거리며 간발의 차이로 마일더의 공격을 회피하는 데에 성공한 카잔. 그러나 아직 방심은 금물이었다.
“설마 벌써 날 잊은 건 아니겠지.”
드리무어의 목소리가 이리도 섬뜩하게 들렸던 때가 있을까.
어느 순간 카잔의 등 뒤에 나타난 드리무어가 마나 덩어리를 폭발시켰다.
앞으로 고꾸라지기 직전, 카잔이 공중에서 중심을 잡아 간신히 자세를 취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드리무어와 마일더가 이렇게까지 완벽에 가까운 협공을 가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애초에 마일더의 존재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너무 컸다.
드리무어가 마일더의 흔적을 철저하게 감추게끔 한 작전이 제대로 통한 것이다.
“귀찮은 녀석들이군……!”
“아직도 그런 호기를 부릴 여유가 있나.”
드리무어가 재차 공세를 취했다. 마일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 소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맹렬하게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 카잔이 아니었다.
“흡!”
몸 안에 담긴 탁한 마나들을 사방으로 뿜어댔다.
발산한 마나가 흑풍으로 변환되며 카잔의 주변을 감쌌다. 동시에 드리무어와 마일더에게 접근을 허용치 않겠다는 식으로 카잔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몰아쳤다.
마일더가 마나 소드를 쥐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손 그늘을 만들며 시야를 확보했다.
“드리무어. 놈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나도 안다.”
“내가 활로를 뚫을 테니까, 네 녀석이 가서 한 방 먹여라.”
“방법이 있나.”
“물론.”
마나 소드의 크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수십 미터까지 늘어났다.
“바람 따위는 내가 갈라버리면 그만이지!”
마나 소드를 위로 추켜세운 뒤에 그대로 아래로 내려찍었다.
마나 소드로 내려찍은 기점을 중심으로 흑풍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한가운데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마일더의 마나 소드를 방어해낸 카잔이 있었다.
이 기회를 드리무어가 놓칠 리 없었다.
전방을 향해 매섭게 치고 들어가는 드리무어의 기세가 날카롭다!
바로 앞까지 도달한 드리무어. 카잔이 이를 잘근 깨물었다.
“온전한 힘을 되찾지도 못한 너 따위가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카잔이 악을 쓰며 왼팔을 휘둘렀다. 그의 팔 동작에 따라 검은 돌풍이 드리무어를 급습했다.
허를 찌르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드리무어도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 형성된 강한 마나 실드가 카잔의 공격을 튕겨냈다.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허무하게 막힌 덕분에 카잔은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째서……!”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나.”
드리무어의 입가에 짙은, 아주 짙은 미소가 새겨졌다.
“네가 본래의 힘을 되찾았다고 한들, 나를 이길 리 없다.”
드리무어는 애초에 카잔을 절대적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복수의 대상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00의 강함을 가진 존재와 50의 강함을 가진 존재가 있다. 드리무어나 마일더, 카잔처럼 차원 이동을 한 덕분에 본래의 힘을 되찾지 못했다고 했을 때, 100은 70의 힘까지.
50은 30의 힘까지 내려갔다고 치자. 30이 다시 50이 되었다고 한들, 70을 이길 수 있을까?
천만에. 역전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이 지금, 드리무어와 카잔의 현 입장이었다.
‘힘의 차이가 이렇게나 날 줄이야!’
카잔이 속으로 울분을 토해냈다.
부하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본래의 힘을 억지로 되찾았다. 그러나 50으론 70을 넘어서기 힘들었다.
드리무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일더조차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나 아직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드리무어. 제2의 하르만 학살 사건을 체험하고 싶나.”
카잔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순간, 드리무어의 움직임이 멈췄다.
협박이 통했음을 알아차린 카잔이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반면, 드리무어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뜻이지.”
“알고 있다. 이 세계에 네놈이 사랑하게 된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키득 키득 키득.
작은 웃음소리를 토해낸 카잔이 협박 투로 말했다.
“지금쯤 내 부하가 네놈의 여자를 인질로 확보했을 거다. 만약, 여기서 나를 죽인다면 그 여자의 목숨은 보장 못 한다.”
“…….”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그 여자를 살리고 싶다면, 지금 당장 투항하고 나에게 레디너스로 되돌아갈 방법을 일러줘라.”
카잔의 말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마일더였다.
“돌아갈 방법? 그걸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 있었던 걸까.
‘아니지, 카잔이 여기 있는 한, 드리무어는 원래 세계로 되돌아갈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을 거야.’
그래도 다시 돌아갈 방법을 드리무어가 알고 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급 정보를 얻었다.
하나 그 정보의 유통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안한 일이지만.”
드리무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사실 거짓말이다.”
“뭐라고……?”
“처음부터 온전히 레디너스로 돌아갈 방법 따윈 몰랐다. 그저 너한테 나를 찾게끔 유도하려고 일부러 그런 정보를 흘렸을 뿐. 설마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너도 참 순진하군.”
“드리무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카잔이 고함을 내질렀다.
“고우! 들리나! 지금 당장 그년을 죽여라! 최대한 고통스럽게!”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으나, 들려온 대답은 카잔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고우라면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다.”
마일더가 주머니에서 통신석을 꺼냈다. 그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하나의 영상을 홀로그램 식으로 표현했다.
쓰러져 있는 고우. 그 자리에 에리나가 녀석을 완벽하게 제압했다는 식으로 제스처를 뽐내고 있었다.
“네놈의 부하는 아무래도 내 부하보다 무능했던 거 같군.”
“……!”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다. 어떻게 할 거지?”
카잔을 따르던 충신들은 더 이상 없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카잔, 단 한 명.
드리무어와 마일더가 이렇게나 강한 존재들이었나! 카잔은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가 아무리 날뛰어봤자 두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셈밖에 더 된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허무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복수라도!
“이렇게 된 이상……!”
결국 최후의 칼을 뽑기로 했다.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선 카잔이 대뜸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꽂았다.
푸욱!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겼다. 이윽고 오른손에 그의 심장이 들려 나왔다.
두근, 두근, 두근.
살아 움직이는 심장의 고동이 혐오감을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잔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이 세계와 함께 네놈들을 전부 다 깡그리 날려 버려주마!”
최후의 도박이다.
어차피 자신은 여기서 죽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드리무어, 마일더와 함께 죽음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미친놈, 얌전히 혼자 죽을 것이지!”
마일더가 침음성을 흘렸다.
카잔이 여기서 힘을 폭발시키면, 이 주변 일대는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9090대대를 포함해 군인들, 민간인들이 희생당한다.
민혜정과 에리나도 안전을 장담하기 힘들다. 그만큼 카잔의 마지막 결단은 위협적이었다.
하나 그보다 먼저 행동에 임한 이가 있었다.
드리무어였다.
카잔의 근처에 도달한 드리무어가 응축된 마나들을 퍼트렸다.
반원 형태의 결계를 친 드리무어가 카잔을 마주 보며 이렇게 말했다.
“혼자 지옥 길 떠나기가 그렇게 싫다면 내가 길동무가 되어주지. 단, 나 혼자뿐이다.”
“하하하하하! 그래, 같이 죽자! 드리무어!”
죽음을 결심한 드리무어의 행동에 마일더가 소리쳤다.
“괜한 짓 하지 마라, 드리무어!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해! 분명 네 희생 말고 다른 방도가 있을 거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다수를 위해 소수가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때가 있다. 선택의 갈림길이 주어진다면, 몇 명의 소수가 희생하느냐일 뿐이야.”
드리무어가 이를 악물었다.
점점 가해져 오는 압박감. 폭발이 발생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이 결계를 유지해야 한다.
“나 혼자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이건 네가 바라는 결말 아니냐.”
“혼자 폼 잡지 마라, 드리무어! 아직 너와 나 사이의 일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했으니까!”
결계 안으로 치고 들어온 마일더. 그의 행동에 드리무어가 침음성을 흘렸다.
“너나 괜한 짓 하지 마라. 빨리 돌아가!”
“아직 난 너에게 할 말이 잔뜩 남았다. 이대로 죽는 건 내가…… 아니, 레디너스 전체가 용납 못해!”
마일더가 양손 가득 마나를 끌어 모았다.
“결계 규모를 축소시켜! 너와 나, 이중으로 만들면 놈의 자폭을 막을 수 있어!”
“만약 그렇게 해서 잘못된다면.”
“그때는 너와 내가 저놈이 저승길 가는 데 동행해 주면 된다.”
“어이가 없군.”
드리무어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평가를 내렸었다.
죽어도 싼 놈.
세상 모두가 드리무어를 증오했고, 그가 사라지기만을 기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던 마일더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이건 드리무어의 계산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난 모른다.”
결국 마일더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다.
결계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축소시켰다. 드리무어와 마일더가 있는 곳을 벗어나 카잔 한 명만 수용 가능한 사이즈까지 축소된 미니 결계.
카잔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아니, 목숨을 잃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의 심장만이 오로지 이 세계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을 원료로 삼아 강하게 고동쳤다.
파지지지지지직!
강한 스파크와 검은 돌풍이 결계 안에서 몰아쳤다.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이 부들거리는 결계는 드리무어와 마일더에게 많은 부담감을 심어줬다.
카잔이 살아 있을 때, 그를 죽이지 못했던 게 실수였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자행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카잔이 남긴 최악의 폭탄을 무효화시켜야 한다!
곧 폭발이 임박하자, 드리무어와 마일더의 양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죽느냐, 사느냐.
모든 것은 이 두 사람의 손에 달려 있었다.
세계를 괴롭히던 희대의 악인, 드리무어.
지금의 입장은 정반대가 되었다.
이번에야말로…….
‘두 번 다시 내 사람들을 잃지 않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낸다!
드리무어의 소망과 함께 눈 부신 빛이 주변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