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 행보관되다 172화
제45장. 악인 대전(1)
레디너스 최악의 악인이라 소문난 드리무어.
그리고 뒷골목 최대 악인, 카잔.
두 사람이 드디어 낯선 세계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다.
“네가 카잔이라는 놈인가.”
필두가 뚫어져라 카잔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카잔이 어깨를 가벼이 으쓱였다.
“그렇다면 어쩔 거지.”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필두가 심호흡을 천천히 내쉬었다.
카잔을 만나면 꼭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네놈이 하르만 사건을 일으킨 자인가.”
“답변을 원하나.”
“대답 여부에 따라 너를 죽일지, 말지를 결정할 거다.”
“좋게 대답한다면 살려준다?”
“아니지. 말을 정정하마.”
필두가 도중에 말을 바꿨다.
“편하게 죽을지, 고통스럽게 죽을지. 선택해라.”
“재미있군.”
카잔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수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건 필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꺼낸 건 하나뿐이었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였다.
기묘한 미소를 유지하던 카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주도했다.”
“이유가 뭐지.”
“이유? 그런 게 있어야 하나?”
카잔의 표정이 변했다.
“그냥 하르만이라는 곳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곳에서 웃고 떠들고 즐기는 사람들도, 생기가 넘치는 거리도, 평화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분위기도 전부다! 그래서 살짝 심술을 부리기로 했지.”
두 팔을 쫙 벌린 카잔이 열변을 토했다.
“남을 괴롭히는 데에 이유가 있나! 살육을 하는 데에 반드시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본능이 그렇게 시킨다고 하면 되는 것을! 안 그런가, 드리무어.”
“…….”
드리무어는 그곳에서 가족들을 포함해 소중한 존재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날 이후, 그는 악인이 되었다.
드리무어의 삶에 가장 큰 계기가 된 하르만 학살 사건.
그 사건의 주범이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심심해서.
괜히 괴롭히고 싶어져서!
거창한 이유 따윈 없었다. 복잡한 이해관계도, 누군가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었다.
카잔은 순수 악 그 자체였다
“고작 그따위 이유로…….”
드리무어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성을 지켰다.
뒤에서 바라보던 수오는 솔직히 말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수오가 드리무어의 입장이었다면, 이성을 잃고 당장 달려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필두는 달랐다.
마인드컨트롤과 포커페이스는 그의 장기다. 그러나 이쯤 되면 장기 수준이 아니라 신의 경지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무서운 남자야……!’
어떻게 보면 미친 카잔보다 이성을 끝까지 지키는 드리무어가 더 두렵게 느껴졌다.
한편, 계속해서 일부러 드리무어를 자극하는 발언을 했음에도 냉담한 반응만 보이자 카잔도 덩달아 흥이 깨지고 말았다.
“재미없는 녀석이군.”
“그건 피차일반 같은데.”
장난은 여기서 끝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힘 싸움에 돌입할 차례다.
카잔도 오래 시간 끌 생각은 없었다. 질질 끌어봤자 이들에게 불리할 게 뻔했다.
이미 이곳을 중심으로 수많은 부대의 포위망을 결속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뒤가 없다. 이곳에서 드리무어를 쓰러뜨려야 한다.
그리고 레디너스 대륙으로 다시 돌아간다!
희대의 악인이라 불리던 드리무어 대신 이번에는 카잔의 시대를 연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기 드리무어를 쓰러뜨려야 한다.
양손을 수평 방향으로 펼친 카잔. 왼쪽에는 한조가, 오른쪽에는 봉수가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너희의 역할은 끝났으니 나를 위한 거름이 되어라.”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전에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뜬금없이 거름이 되라니. 이해하기도 전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또 한 번 흑풍이 몰아치며 봉수와 한조를 옭아맸다.
“카, 카잔 님! 이건 대체……!”
“대충 내가 뭘 할지 알고 있잖냐.”
“설마……!”
“그 설마다.”
주먹을 쥐는 순간, 두 사람의 몸이 산산조각났다.
고깃덩이가 된 채 사방으로 흩어진 두 사람. 붉은 피는 뚝뚝 흘러 대지를 적셨다.
“우웩!”
뒤에 있던 도혁이 구토 증세를 보였다. 살아생전 처음 보는 시체였다.
불기둥과 바람이 몰아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초자연현상이니 뭐니 그런 걸로 넘겨버리면 되니까. 그러나 사람이 폭탄처럼 터지는 것을 목격하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힘을 흡수하는 데에 성공한 카잔. 그의 주변을 맴도는 흑풍도 기세가 한층 매서워졌다.
“그래. 바로 이 감각이지!”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힘은 부하들의 희생으로 인해 채웠다.
카잔의 눈이 붉게 타오르듯 빛났다.
필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레디너스에 있을 당시의 온전한 힘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반면, 그를 비롯해 다른 이들은 본연의 힘을 찾지 못했다.
오로지 카잔뿐.
짙은 미소를 선보인 카잔이 오른손을 뻗었다.
“우선 잔챙이부터 없애볼까.”
그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수오와 도혁이 있었다.
날카로운 흑풍이 두 사람을 집어삼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수오가 방어막을 치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런!”
“히익!”
수오와 도혁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이라는 공포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등장하지 않은 또 다른 구세주가 있었다.
퍼엉!
흑풍을 그대로 날려 버린 또 다른 남자가 수오와 도혁을 보호하듯 가로막아 섰다.
실눈을 뜬 상태로 눈앞에 등장한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도혁이 입을 쩍 벌렸다.
“지, 진수? 니가 여긴 어떻게……!”
“위험합니다, 전도혁 상병님. 서수오 일병이랑 같이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같이 도망가야지! 행보관님! 저 새끼, 완전 미친놈입니다! 가서 본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니, 괜찮다.”
진수의 등장을 이미 알고 있던 필두였기에 그리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카잔을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 이대로가 딱 좋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진수 말대로 너희는 뒤로 물러나 있어라. 휘말리기라도 했다가 재수 없게 죽지나 말고.”
필두가 양손 가득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에 따라 진수 역시 마찬가지로 본인의 힘을 개방했다.
몰아치는 마나 폭풍. 진수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카잔이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냐.”
“너 같은 악인을 전문으로 처벌하는 정의의 사도다.”
“설마…… 마일더인가.”
카잔이 침음성을 흘렸다. 드리무어를 상대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였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크게 흔들리는 동공. 마일더 한 명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낌새를 보아하니, 드리무어와 마일더는 서로 임시 동맹 체제를 굳힌 듯해 보였다.
실제로 그게 정답이었다.
드리무어 한 명을 상대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일더까지 참전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적으로 말이다.
“드리무어도 네 적일 터인데. 어째서 나에게만 칼을 들이미는 거지?”
“뻔한 걸 묻는군.”
코웃음을 친 마일더가 마나 소드를 들고서 이렇게 답했다.
“대한민국 군인이 무장공비를 잡아야지, 누구를 잡겠나.”
“그렇군.”
카잔이 원하는 대답이 되진 못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카잔은 드리무어와 마일더, 두 남자를 상대해야 한다.
한쪽은 희대의 악인이라 불렸던 자.
그리고 다른 한쪽은 살아 있는 정의라 불렸던 자이다.
어느 쪽이든 껄끄러운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카잔은 둘을 상대하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좋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안 그래도 거슬렸던 두 놈을 한꺼번에 저세상으로 보내주도록 하마!”
“과연 그게 뜻대로 될까.”
“그러게 말이야.”
드리무어와 마일더가 동시에 카잔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수오가 탄식을 자아냈다.
“빛과 어둠이 손을 잡을 때가 오긴 오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수오와 다르게 도혁은 여전히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
사건이 벌어진 현장으로 투입된 9090대대. 그 속에는 김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본래 조항은 영내 대기를 명받았던 병사였다.
그러나 그는 도혁과 수오가 사지로 향했다는 보고를 들은 이후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수색 작전에 자원을 하게 되었다.
사수 자리는 다른 병사에게 대신 맡기기로 했다. 초탄사격 명령이 내려와도 발포에는 지장이 없을 터.
그보다 도혁과 수오의 안전이 훨씬 더 중요했다.
선탑자 자리에서 하차한 전포대장이 병력들에게 외쳤다.
“신속하게 내려서 포위망 구축한다!”
“최대한 소음은 줄이도록 해라!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르니까!”
“움직여, 빨리!”
전포대장의 뒤를 따라 간부들도 다급히 외쳤다.
다른 보병 부대들도 9090대대와 함께 신속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쿠우우웅……!
묵직한 폭발음이 여러 차례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
“무장공비 놈들, 도대체 장비를 어떤 걸 가지고 있기에 저런 무모한 짓을 해대는 거야! 미친 새끼들!”
간부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폭발 소리가 커질 때마다 조항의 안색은 굳어졌다.
‘도혁아, 수오야! 무사해라!’
속으로 두 사람의 안전을 비는 조항.
그때, 수풀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전포대장님!”
병사들이 불안해하는 시선을 그에게 보내왔다.
전포대장이 침착하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병사들이 일제히 총구를 수풀 쪽으로 겨눴다.
“정지, 정지,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구름!”
피아 구분을 할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바로 암구호 숙지다.
답어가 돌아온다면 아군, 아니라면 적군이다.
긴장되는 순간!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등대!”
“누구냐!”
“상병 전도혁입니다!”
도혁의 이름을 듣자마자 병사들의 긴장이 급속도로 풀어졌다.
이들의 앞에 등장한 인물은 전도혁 혼자뿐만이 아니었다.
서수오도 같이 등장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총구를 내린 제1포대. 전포대장을 비롯해 간부, 병사 몇몇이 그들에게 바삐 다가왔다.
“무사하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예. 행보관님하고 진수 덕분에 살았습니다.”
“진수? 행보관님?”
“그게 무슨 소리냐?”
이들에겐 금시초문이었다. 아까부터 필두의 모습이 안 보인다 싶더니, 설마 이곳에 있을 줄이야.
게다가 진수까지 같이 있다니. 도혁의 설명을 들은 병사들의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도혁도 뭔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마구 발생했는데, 어찌 맨 정신으로 설명에 임할 수 있을까.
그도 그렇지만, 도혁이 괜히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오히려 곤란해진다. 그것을 눈치챈 수오가 바로 말을 가로챘다.
“전도혁 상병님이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거 같으니 의무대로 데려가야 할 거 같습니다.”
“뭐? 나 멀쩡한…….”
그러나 전포대장이 도혁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그게 좋겠다. 수오, 너도 같이 가고.”
“예.”
이로써 수오와 도혁은 잠시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딱히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이라면…… 거의 무적이지.’
이것이 수오의 생각이었다.